2018년 6월 1일 금요일

[1879] 조약돌 몇 개

조약돌 몇 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사람이 밥을 먹거나 직장에서 일하는 것처럼 육적, 동물적인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인간 이상의 신적 차원이 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물었을 때에 베드로는 열두 제자들을 대표하여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 아들이니이다.” 그때 예수께서는 아주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서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 너는 반석이니 내가 그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내가 네게 천국 열쇠를 준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보면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선행적인 계시에 의하여 가능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도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나 자신의 선택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기계적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우연도 필연도 아니고 은혜입니다. 내가 예수의 손을 붙잡은 것이 아니고 예수가 내 손을 붙잡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 근원을 확신하게 됩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은 오직 은혜와 통합니다. 내가 예수를 구세주로 믿은 다음에도 죄를 범합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도 그렇게 합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하고 늘상 기도하면서도 유혹 앞에 약합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은혜의 질서가 없다면 아무도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 갚는다는 균형적인 보상이 아닙니다. 조건 없이 내어주는 속죄 사랑의 무량애의 심정입니다.

내가 기독교인이 됐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으로서는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유교 전통을 절대로 신봉하고 있었고, 그밖의 것은 이단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논어에 ‘공호이단(攻乎異端)이면 사해야이(斯害也已)’라는 구절을 글자 그대로 믿었고, 기독교는 이단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선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됩니다. 종종 성경책을 행상하는 매서인이 우리 집 사랑에 찾아와서 밤새워 전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손님 대접은 깨끗이 합니다마는 그의 열성 어린 전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일은 없었습니다. 선친께서는 “나는 공맹지도(孔孟之道)를 하는 사람이오. 공호이단이면 사해야이라 하였소.”라고 하셨습니다. 그 구절이 내게도 익숙해져서 80이 지난 오늘에도 내 말같이 기억됩니다.

나는 유교 윤리에도 아무 불평 없이 순응하였지만 유교의 의례에도 충실했습니다. 큰집은 종가인지라 제사가 많았습니다. 할아버지 상사 때에는 거의 한 달을 온 식구가 큰댁에 모여 숙식했습니다. 그 번쇄한 상례는 주례(周禮)를 본뜬 것이라는데 어찌 복잡한지 말로 옮길 수 없었습니다. 제례는 그렇게까지 번거롭지는 않았습니다만, 상당히 엄숙해서 종교적인 감정을 자극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유교 윤리는 나에게 종교적 윤리가 되고 유교는 나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다만 유교에서 천(天)이란 개념이 막연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님’자가 제대로 의식화되지 못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언가 초자연적인 인간 이상의 신, 조상의 혼백이나 무당의 잡신 또는 귀신과는 다른, 참하나님이 있어야 하겠다고 은근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19세 때에 웅기에 있었는데, 하루는 웅상에서 고개를 넘어 웅기로 오고 있었습니다. 그 완경사의 길 중턱쯤에 일본인들의 신사가 있었습니다. 신사래야 작고 작은 막사 같은 것이어서 사람이 지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는 제법 큰 문짝 없는 대문이 있었습니다. 웬일인지 그 앞에 섰을 때 나는 무슨 숭엄한 외경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경건하게 경례를 한 일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내게 내재한 종교성의 발로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유교에서의 제사 때보다 훨씬 더 짙은 종교 감정이었다고 하겠습니다.

그 며칠 후에 나는 꿈에 다시 그 고장에 가서 웅기항의 바다를 내려다 보고 있었습니다. 웅기항에 아주 화려하고 찬란한 목선이 한 척 들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지개를 싣고 오는 배인 것 같았습니다. 그 배에 사람이 하나 타고 있었는데, 사람의 키를 훌쩍 넘기는 백옥석 비석 하나를 그 배에 싣고 와서 항구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비석을 내가 서 있는 곳에 운반해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 백석은 매끈하게 다듬은 것이었습니다만 글자는 새겨져 있지 않았습니다.

비석을 가져온 사람이 말했습니다. “이제 네 스스로 이 비석에 새길 비문을 지어 새겨라.” 나는 어리둥절해서 망설이는 동안에 꿈에서 깨었습니다. 거기서 무슨 계시가 있었는지, 있었다면 무엇을 암시하는 것인지 지금도 설명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 나름대로 해몽한다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어찌하였든 잊히지 않는 꿈이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때에는 나는 예수교 신자도 아니었고, 신자가 되리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80평생을 지내고 보면 하나님이 나를 알고 계셨다는 은혜의 감격을 느끼게 합니다. 웅기에서의 나의 기록은 부끄러운 참회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때가 3ㆍ1 운동 다음 해였기에 두만강을 건너 만주나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쪽으로 망명 가는 독립지사들이 배 타고 웅기에 와서 며칠 머물다가 두만강을 건너는 것이 보통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서 민족주의를 배우게 되었고, 3ㆍ1 운동의 자세한 소식도 듣게 되었습니다. 나도 가만 있을 수 없어서 서울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해 초가을에 만우 송창근 형을 만난 것이 또 하나 나의 행로에 새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만우 형은 고향이 웅상이었는데, 3ㆍ1 운동 당시에 남대문교회 전도사로 있다가 <독립의 노래> 가사를 지었다는 혐의로 6개월 징역을 살고 근친하러 웅상에 온 것이었습니다. 그 길에 웅기에 들렀는데, 웅기교회에서 사흘 동안 저녁마다 특별집회 강사로 모신 것이었습니다.

나는 교회에 아무 관심도 없었기에 강연회에는 불참했습니다. 그는 어느 날 나의 하숙집에 찾아주었습니다. 시골티가 없는 말쑥한 미남이었고 예의바르고 겸손했습니다. 나 같은 시골 청년에게 큰절을 하고 자기소개를 간단히 하고서 곧 나갔습니다. 그 이튿날 거리에서 나는 다시 그를 만났습니다. “3ㆍ1 운동에서 우리 민족은 되살아났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민족 독립과 인간 자유를 위하여 앞장서야 합니다. 김 선생 같은 이가 이런 시골에 묻혀 있을 때가 아닙니다. 서울 와서 공부하십시오. 더군다나 서울에는 유명한 백부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마음은 들떴습니다. 그러나 대답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웅기 청년들에게도 3ㆍ1독립운동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바람은 이스라엘 민족의 바벨론 포로 시대에 에스겔이 본 바람과 그 유를 같이한 바람이었습니다. 마른 해골들이 다시 살아 큰 군대가 되어 행진하는 생명의 바람이었습니다.

결국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창골집에도 알리지 않고 아내에게도 말하지 않고 단신으로 굽도리 배에 올랐습니다. 기선이라곤 하지만 큰 종선 정도였고 낡아빠진 고물이었습니다. 바다가 설레기 시작하니 배는 뒹굽니다. 원래 육지에서만 자란 나로서는 생리가 맞지 않아서 멀미는 창피할 정도였습니다. 청진에서 하룻밤 지내고 작은 항구들을 역방하여 차호에 들렀을 때에야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 조금 뱃밥을 먹고 원산에 내리니 살 것 같았습니다. 원산의 바다는 파랗게 맑아, 스무 자 밑 바다에 피라미 떼요, 하늘거리는 해초들이 거울 속같이 보여서 신기했습니다. 구경삼아 예배당에 들어갔더니 풍금 치는 소리가 단음이 아니어서 그것도 신기했고 언덕 중턱이라 조망도 좋았습니다.

그때에는 경원선이 개통되었던 것 같습니다. 석왕사를 지나 삼방 골짜기를 누벼 철원의 억새 벌판을 달립니다. 서울 남대문 역에 도착한 것이 늦은 오후였다고 기억됩니다. 웅기에서 배를 같이 탄 사람이 아마도 광도(히로시마) 중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인 김예근 군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그는 나보다 훨씬 연하였지만 키 크고 몸이 성숙하고 혈기 강한 젊은이였습니다. 배 안에서도 멀미 같은 것은 모르는 것 같았고 어떤 중년 술집 여자와 홑이불도 같이 덮고 밤새며 재미 보는 모양이었습니다. 내 듣기로는 후일에 그가 채 못 살고 죽었다고도 했고 이북에 넘어갔다고도 했는데 아마도 벌써 고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서울역에 내린 나는 해말쑥하게 세련된 서울 남자들을 눈여겨보았습니다. 다듬이질한 모시 겹옷으로 바지저고리 두루마기를 만들어 입고 발에는 구두를 신었습니다. 모자는 맥고모자거나 왕골로 짠 중절모였습니다. 시골티라곤 하나도 없는 환골탈태한 도시인이었습니다. 여자들은 장옷을 쓰고 눈만을 내놓고 다니는 것이어서 미녀인지 추녀인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이튿날 예근 군은 부산으로 향해 가고 나는 다방골 백부님 댁에 갔습니다. 안채와 사랑채가 안 대문으로 통하게 된 꽤 큰 저택이었습니다. 나는 백부님께 넙죽 큰절을 하고 꿇어앉았습니다. “너 언제 왔느냐?” “어제 왔습니다.” “어디서 잤느냐?” “여관에서 잤습니다.” “이 녀석, 여관이 다 뭐냐, 곧장 이리로 올 거지.” 하고 굵은 음성으로 꾸짖으셨습니다. 그러고서는 곧 안색에 화기를 띠시면서 “잘 왔다, 건너편 행랑이 널찍하니 거기서 유숙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중동학교 고등과에 등록했습니다. 후에 서울대학교 총장까지 하신 최규동 선생이 안일영 선생과 손잡고 전문대학 입학시험 준비를 위한 수리 중심의 강의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교수법이 하도 능숙하셔서 머리 둔한 학생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중학교를 졸업한 학생들도 이 중동학교에 와서 대학 입학을 위한 총정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학 전문학교 입학생으로서는 중동학교 졸업생 아닌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일본 말 가르치는 일본인 선생도 있었는데, 노인이었고 밤낮 학생들의 놀림감이 되었으나 잘 참는 분이었습니다. 그때 중동학교는 보성중학교 건너편에 있었습니다. 3ㆍ1 독립선언 다음 해였기에 일본인에 대한 반감이 격심했고 사이토 총독의 문화정치선언으로 언론계에도 새봄이 오고 있었습니다. 백부님은 인사동에 한성도서주식회사를 창설하고 장도빈 선생 등과 함께 한글로 쓰인 새 저서들을 출판하면서 친히 전무 취재역으로 일하셨습니다. 《학생계》라는 학생을 위한 월간 잡지, 《서울》이라는 일반 시민을 위한 월간지도 내었습니다. 《서울》 주간은 장도빈 선생이었고, 《학생계》 주간은 오천석이었습니다. 오천석은 이십대 약관이었지만 한글 문장 구조에 서투른 그 당시에는 얻기 드문 존재였습니다.

나의 중동학교 성적은 좋은 편이었으므로 그대로 나갈 수 있었다면 경성 의학 전문학교나 보성 전문학교(현 고려대학 전신)쯤에는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고, 그리했더라면 어느 지방 의사나 재판소 판사쯤으로 종신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내가 웅기 금융조합을 떠나지 않았다면 극상했자 어느 지방 은행 이사로 승진했을 것이고 주색의 수렁에 빠져 죽은 지 오래였을 것입니다.

중동학교 고등과도 하기방학이 되어 학생이 모두 귀향했습니다. 마침 백부님이 근친하러 가신다기에 나도 따라나섰습니다. 우리 집에는 부모님, 형님, 형수님, 아내, 누이동생, 조카들이 같이 있었습니다. 대가족입니다. 큰집에는 과장 영감이 오셨다고 여러 부락 노인들이 찾아와서는 식사 때에도 돌아가지 않습니다. 안채에서는 아낙네들이 오늘도 내일도 잔칫상을 차려야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사잇방 아랫목에 호랑 보료를 깔고 앉으셨습니다. 옆에 문갑은 신좌처럼 모시고 장죽을 놋재떨이에 똑똑 두들기며 “삭발위승하고 중머리가 되어 무슨 면목으로 근친이냐.”고 하셨습니다. “승혈이 만항(僧血灣港)이라 하였느니라.”고 하시면서요. 반가우실 텐데 짐짓 위신을 보이시는 것이겠지요!

한여름을 지내고 백부님은 다시 서울 길을 떠납니다. 나도 백부님 모시고 다시 서울로 향했습니다. 웅기까지 갔는데 서울에는 콜레라가 퍼져서 매일 사람이 죽는다고 매일신문의 제3면을 메꿨습니다. 신문 기삿거리가 없으니까 기자들은 좋아라고 과대선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백부님은 걱정이 되셨습니다. 조카애라도 아들과는 다르니 그런 위험지대로 데려가기가 죄송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아버님께 인편으로 편지를 띄우셨습니다. 아버님 회답은 수수께끼 같은 내용의 것이었습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니 언지비복이며 언지비고(人間萬事 塞翁之馬 焉知非福 焉知非稿)리까.” 하는 간단한 어구였습니다. 이것은 중국의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을 때에 전 국민에게 동원령을 내려서 장정은 모조리 징용해가던 때 얘기입니다. 만리장성 가까이에 한 말장사가 있었는데 식구라고는 아들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하루는 그 외아들 녀석이 준마를 타고 달리다가 떨어져서 뻗정다리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아, 화로다! 화로다!” 하고 매일 슬퍼했습니다. 그런데 진시황의 징발령이 내렸습니다. 징발관이 장정들의 신체검사를 합니다. 이 말장사 아들은 뻗정다리인지라 징용에서 면제되어 집에 그대로 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하마터면 외아들을 잃을 뻔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죽을 때까지 부자동거하게 되었습니다. 늙은이는 매일 “아, 복이로다. 복이로다!” 하였다는 얘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 아버님의 편지는 나의 상경에 거절도 찬성도 아닌 은어를 쓰셨습니다마는, 실속인즉 안 가는 게 좋겠다는 뜻을 은어로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백부님은 다시 나를 데리고 옛집에서 돌아오셔서 한 달가량 더 계시다가 가을바람이 설렁이는 시원한 계절에서 다시 서울로 향하셨습니다. 나도 물론 따라나섰습니다. 서울 와서 보니 서울 사람들은 콜레라가 유행 하는 줄도 모르고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몇십명이 구토, 설사를 했지만 ‘감기 들렸다’는 정도로 무심한 것이었습니다. 과대선전도 언론의 횡포라 하겠습니다.

와보니 중동학교는 개학한 지 한 달이 지났고, 수학도 물리, 화학도 어찌나 빨리 나갔는지 나로서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백부님은 수입원 없이 쓰기만 하시니 얼마 남았던 한강 건너 토지를 팔아 쓰시고 그것이 바닥나자 다방골 집을 팔아 그보다 훨씬 작은 공평동에 주택을 마련하고 이사하셨습니다. 나도 공평동에 옮겨 행랑에 이은 길쭉한 사랑에 있었습니다. 작은 들창이 천장 밑에 나란히 있었고 그 바깥은 길이고 굴뚝은 없고 내구리(연기)는 길가 구멍에서 모락모락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연탄이 나오기 훨씬 전이었기에 장작이나 솔잎을 때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집집마다 모락모락 나오는 아침밥 짓는 연기는 장안을 솔향기로 채우는 것이어서 향연을 마시는 감미로움이었습니다.

나는 아침 일찍 남산 잠두에 들러 약수터 뒤 언덕을 걸어, 남산 꼭대기에 올라 아침 해를 맞이하곤 했습니다. 남산 정상은 무당들 무대여서 푸짐한 제사상이 차려졌고 무당품이 난무하는 것이었습니다. 잠두에서 서울 장안을 굽어보면 하얀 안개 자욱한 호수 같았고, 그 당시 건축 중이던 총독부 청사가 그 머리의 투구를 내밀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남산 약수는 오염되지 않았기에 기껏 마셔도 소화를 도울 뿐이었습니다.

나는 학교에도 다니지 않으면서 백부님 댁에 폐 끼치는 것이 죄송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인사동에 있는 경성도서관 종로지관에 나가 혼자서 독서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말 책은 전무나 다름없었기에 주로 일본말 문학서를 읽었습니다. 인생에 대한 탐구심도 차츰 절실해지고 있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톨스토이 전집』,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센케비치의 『쿼바디스』 등을 탐독했습니다.

마침 그 무렵에 서울 시내 장로교회 연합 주최로 승동 예배당에서 김익두 목사님의 부흥회가 열렸습니다. 설교 후에 병자에 대한 안수도 하셨고, 치유의 기적도 자자하게 선전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구름 모이듯 몰려 와서 승동 예배당 안은 부인들로 가득 찼고, 남자들은 바깥마당에 멍석 깔고 앉았으며, 두 번 세 번 조여 앉았고, 목사관 담장 위와 교회당 주위의 담장에도 삭개오 못잖게 올라앉았습니다. 하도 사람이 많이 모인다기에 나도 구경삼아 갔습니다. 믿을 마음이나 믿는 마음으로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온전히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의 설교는 아주 서민적이고 구수해서 듣기에 부담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끝날까지 줄곧 빠짐없이 나갔습니다.

아마도 마지막 날이던 것 같습니다마는 김익두 목사님은 창세기 1장 1절인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다”를 본문으로 설교했습니다. “우리는 다 스스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내가 있는 것은 내 부모가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부모님은 그들의 부모님, 또 그 윗대 부모님 이렇게 밀고 올라간다면 마감에 가서 하나님을 끌어냅니다.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느냐? 끝없는 순환논리에서 아무 해결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다’ 하는 구절은 절대자의 선언입니다. 이 선언은 인간의 추리에서 맺어진 것이 아닙니다. 절대자의 선포입니다. 그러므로 그 절대자를 믿고 그의 선포도 믿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선결 과제입니다. ‘내가 믿습니다’ 하고 내 마음을 열어 그 선포를 받아들이는 순간, 하나님은 내 하나님이 되고 나는 그분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 믿으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은 당신들 심령 속에 오셔서 당신들을 새사람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자녀로 영접하실 것입니다.”

그의 용어가 꼭 이러한 구절들과 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마는, 그 뜻은 어김없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렇다’ 하고 마음문을 열었습니다. 가슴에 뜨거운 정열이 타올랐습니다. 무어라 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그 기쁨은 생리적, 심리적 작용이 아니었습니다. 온전히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영의 감격이었습니다. 나는 이것이 성령 강림이로구나 하고 벅찬 기쁨에 황홀해졌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믿기로 작정했다고 하면서 일어서서 증언하거나 강단 앞에 나가 목사님의 기도를 받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쑥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나와 하나님과의 신비한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인간 차원 이상의 초자연적 관계였습니다. 기도하고 싶어 견딜 수 없었고 성경 말씀 읽기가 꿀같이 달았습니다. 확실히 딴 사람, 새사람이 탄생한 것이었습니다. 그 후 승동 예배당에 출석했고 새벽기도에도 나갔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물론 부흥회를 마치자마자 황해도 자신의 맡은 교회로 갔습니다. 나는 서울에서 이 교회 저 교회 두루 다니면서 예배했습니다. 결국 강단이 교회의 생명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설교가 무슨 축음기판 돌아가는 것같이 느껴졌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그 설교자의 속에서 소화되어 그 설교자 자신의 말로 변화되어 선포되는 것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입에서 조작되어 그것이 위에서 충분히 혼합되고, 어느 정도 소화된 다음에 장으로 내려가서 또 철저하게 소화되어 피가 되면 그것이 심장에 모여 다시 심장의 지극공평한 분배로 혈관에 보내집니다. 피가 오염된 혈액은 폐장에 보내어 갱신합니다. 재생운동입니다. 우리의 심령은 하나님 말씀을 먹고 사는데 그것도 세속의 악에 오염되거나 자신의 심적 유혹에 오염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매주일 예배 모임을 갖습니다. 주간에도 각 기관에서 성경 공부, 선한 사업의 계획과 실행, 교인 심방, 특히 환자나, 사고난 가정, 특별한 가정 행사 등을 계속 실행해야 합니다. 그것이 목회요, 목사의 본직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신앙이 순진하고 독실한 평신도라도 맡아내기 어렵습니다. 전문가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신학대학이 필요하고 성경학교도 필요합니다. 신학교 교수는 학자이긴 하지만 목회자는 못 됩니다. 목회할 사람들에게 신앙의 골격을 조성해 주고 훈련하고 교육하는, 군대의 교관 비슷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얘기가 빗나간 것 같습니다만, 내가 믿기로 작정하고 열심을 냈던 그 당시의 교회 강단이 비생명적이었다는 것을 부연하노라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나는 기독교에 대한 좋은 서적들을 찾아봤습니다. 기독교서회에 가 봤지만, 번연의 『천로역정』 초역본이 고작이었고, 광고지 같은 전도용 팸플릿이 몇 개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인사동 경성도서관 지점에 가서 일본어로 쓰인 기독교 서적들을 읽었습니다. 감명 깊게 탐독했습니다마는 몇 주일 지나고 보니 읽을 책이 없어졌습니다. 그래도 무려 수십 권을 독파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나는 이제 크리스찬이 되었습니다. 믿을 바에는 진지하게 믿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외식이나 직업적이나 흉내 내는 따위 신앙은 경멸해버리자고 말입니다. 한국 교회는 하나님 말씀의 설사병에 걸렸다고 느꼈습니다. 씹지 않고 통째로 삼켰기 때문입니다. 씹는다는 것은 진지한 비판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의 도서관 독서생활은 나의 후일의 신학 수련을 위해서도 보탬이 되었습니다.

나는 일본으로 뛰려고 맘먹었습니다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사람의 의도와 하나님의 예정이 똑같이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먼 후일에야 깨달았습니다. 위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나는 학교에도 안 다니면서 백부님 댁에 폐만 끼치는 것이 죄송스러웠습니다. 그래서 하숙집으로 옮겼습니다. 하숙비가 밀린 대로 몇 달을 지냈으므로 하숙집에서 그대로 놔두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부자리를 떼이고 쫓겨났습니다. 눈 퍼붓는 한겨울에 잘 데 먹을 데 없이 거리를 방황한다는 것은 낭만의 선을 넘어 고통의 쓰라림이었습니다. 그러나 열등감의 포로가 된 일은 없었습니다. 무일푼의 걸식승 성 프란체스코를 몸으로 따른다는 긍지로 가슴을 내밀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몸은 몹시 쇠약했습니다. 상수도도 변변찮고 하수도 시설은 거의 없었던 당시의 서울에는 이질이 감기보다 더 비율이 높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나도 예외가 아니어서 적기, 백리가 장을 비틀어 짜냅니다. 그 아픔은 심각했습니다. 그래도 여비만 생기면 일본으로 뛴다고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런 소식을 듣고 집 형님이 멀리 창골집에서 나 몰래 서울로 오셨습니다.

하숙집 문을 갑자기 열어젖히면서 들어오자마자 “너 데리러 왔다. 가자.” 하고 서두르셨습니다. 하숙집에 남은 식비를 손수 청산하고 유명하다는 한의사에게 가서 진맥시키고 화제(和劑)를 얻어 육미, 팔미, 십전대보탕 등을 각기 20첩씩 3제를 지어 손수 배낭에 쑤셔넣어 괴나리봇짐을 만들어 짊어지셨습니다. 남대문 정거장에서 함경선에 올라, 기차가 떠났을 때에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앞길을 막으려고 이러는 것이 아니다. 우선 집에 가서 몸부터 성하게 치료하고 다음으로 일본 유학이든 어디든 네 맘대로 하게 하려는 것이다. 집에서 학비 보낼 여유는 없으니 네가 고학할 수밖에 없겠고 그런 몸 갖고 고학할 수는 없지 않으냐? 내 맘을 오해하지 마라.”고 하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나는 죄송스러워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도 눈물이 글썽해졌습니다.

우리는 웅기에 내려 웅기령을 넘어 100리 길을 걸어서 늦게야 창골집에 갔습니다. 아내도 거기 있었고 대가족인 식구들이 대문 밖에 뛰어나와 반겨 주었습니다. 부모님도 계시던 시절입니다. 자연인만으로서의 인간이었더라면 문제없이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방인 진영에 포로가 된 심경이었습니다. 북새에 귀양 간 충신의 고독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 그것은 ‘다시 난’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바탕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창골집의 자연환경도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황막한 호지(胡地)같이 스산했습니다. 아버님 말씀과 같이 내가 환장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즐겁지 않은 몇 달을 지냈습니다. 결국 두만강 하류 연해지 바람이 모래 언덕을 쌓아놓은 사막의 촌락에 소학교 교사로 갔습니다. 그 촌락 이름은 용현이었는데, 대한 기독교라는 우리 민족 종교의 출산지였습니다. 세계 공동체로서의 기독교가 아니었으므로 막힌 데가 많았습니다. 6개월을 지내고 보니, 차츰 친교가 이루어져 그리 외롭지 않았고 20대 청년들과 30대의 장년들 중에서 예배 모임을 청해 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주일날에는 예배도 했습니다. 대한 기독교에서는 안식일을 지키는 전통을 고집하는 것이었습니다.

여섯 달을 지내며 맘을 붙이려 할 무렵에 창골집에서 형님이 당나귀를 끌고 왔습니다. 창골집 근처 여덟 개 동네가 연합하여 귀낙동에 소학교를 창설하게 되었고, 교사는 내게 맡기기로 했으니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섭섭해하는 용현 학생들과 학부형들과 작별하고 거기를 떠났습니다.

아홉 개의 한문서당을 해산시키고 나이와 학년 등을 감안하여 고등과, 중등과, 초등과의 셋으로 나눠 고등과를 내가 맡고 중등과를 내 오촌 조카 희용이 맡고 보통과는 귀낙동의 유일한 보통학교 졸업생인 내 먼 친척 젊은이가 맡았습니다. 2년 만에 나는 학교 교실에서 주일학교와 예배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낙향한 토반들이 모여 사는 고장이기 때문에 유난스레 완고했고, 복음의 씨앗은 가시덤불 속에서 싹튼 곡식알 같았습니다

동네 어른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소학교육을 시키려고 학교를 창설한 것이지 예수쟁이 만들려고 학교를 하는 거냐?”

그러나 나는 밤에도 학교 교실에서 기도하며 혼자 지냈습니다. 식사는 옆집에서 시켜 왔습니다. 설교라고 하기는 했습니다만 자기도 모르는 소리를 요령 없이 지껄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다들 열심히 듣고 무언가 감동하는 것 같았습니다. 서울 있을 때 경성도서관에 다니며 되는 대로 읽은 것들이 소재 구실을 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보다도 성령의 직접 적인 감화가 듣는 사람들 마음속에 작용한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나귀를 통해서도 그의 뜻을 전했다니 말입니다.

한여름 초복날 밤이었습니다. 동네 청년들이 떼를 지어 몽둥이 장대 등을 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하숙집에 몰려왔습니다. 그 예수쟁이를 두들겨 잡는다는 구호였다 합니다. 밤 자정인데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학교 교실에서 혼자 철야기도를 했습니다. 무슨 고함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영문을 모르고 기도만 했습니다.

잠시 후에 하숙집 부인이 내 방에 들어와 공손하게 인사하고 침착하게 말했습니다. “지금 동네 청년들이 복날 막걸리에 얼큰히 취해가지고 호미, 절구 방망이 등을 들고 선생님을 욕보인다고 떠듭니다. 선생님 여기 계시지 마시고 속히 피신하십시오.”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대답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내 걱정은 마시고 속히 댁에 내려가 보십시오. 나는 여기서 혼자 밤을 새우겠습니다.”

부인은 마지못해 집으로 갔습니다. 나는 조용히 묵도하며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고래고래 고함치는 소리가 차츰 가까워 졌습니다. 그 순간 나는 황홀할 정도로 가슴이 벅차고 기쁨이 넘치고 즐거워졌습니다. 그 기쁨은 내게서 나오는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의 위로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두 번째로 성령 충만을 경험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밖에서 떠들던 소리는 고요해졌습니다. 그들은 도중에서 흐지부지 흩어지고 만 것이었습니다. 그럭저럭 1년 반이 지났습니다. 고등과 학생은 석 달만 더 공부시키고 졸업장을 주기로 했습니다. 예배도 계속 했고 주일학교도 했습니다만 집에서 아이들을 가둬놓고 못 나가게 하는 바람에 인원 수는 자꾸 줄어들었습니다.

그때 동경 유학 중에 있던 송창근 형, 채필근 목사, 강봉우 장로 등은 나를 동경에 데려갈 계획을 세우고 추진 중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시골서 그만큼 봉사했으니 네 공부를 해야 하지 않느냐? 여비 생기는 대로 떠나와라. 조선 학생으로서 제 돈 쌓아놓고 공부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 넌들 고학 못할 까닭이 있느냐? 속히 오라.”고 하는 독촉 편지가 왔습니다.

나는 그때 무보수로 일했으니 동경 갈 여비가 있을 까닭이 없었습니다. 마침 두만강가 요새지로서 산성이나 포대로 쓰던 신아산에서 소학교 선생으로 오라는 초빙장이 왔습니다. 월급도 제대로였고, 일본 군대도 한소대 주둔하였고, 헌병대도 있고, 금융조합도 있고, 간이치료소, 신약국 등도 있는 고장이었습니다. 나는 당장 그만두고 그리로 갔습니다. 졸업반 학생은 내가 데리고 신아산에 가서 석 달 더 공부시켜 그 소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졸업시켰습니다. 여섯 달 지내고 보니, 동경 갈 여비가 마련되었습니다. 거기도 기독교회는 없었고 완전한 이교 동네였습니다. 나는 내가 데리고 간 학생들과 함께 소학교 구석진 방에서 몰래 예배를 계속했습니다. 로마의 카타콤 예배를 연상하기도 했습니다. 서울 있을 때 센케비치의 『쿼바디스』를 읽은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내도 같이 있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임신하여 만삭이 되었습니다. 나는 그때 춘원의 『무정』을 처음 읽었습니다. 나는 아내를 설득하여 큰 집에서 몇 해 시집살이를 더 해달라고 했습니다. 너절한 의복 보따리를 꾸려 이고 아내는 나와 함께 걸었습니다. 200리를 걸으면 아오지읍에 도달합니다. 거기서 아내의 본가인 회암동 가는 길과 웅기로 가는 길이 갈라집니다. “우리 서로 뒤를 돌아보지 말고 가자.”고 하여 노상에서 갈라섰습니다. 아내는 울음이 터질 것 같았으나 잘 참는 모양이었습니다. 그 후 3년, 나는 동경 청산학원 신학부에서 신학을 마쳤습니다. 그동안에 아내는 창골집에서 농사와 길쌈으로 중노동을 하면서 지냈고, 신아산에서 임신했던 첫애를 낳아 벌써 세 살이 되었더군요. 그애가 지금 금호동에서 개업하고 있는 신영희 의사의 아내 됐던 사람입니다. 얼굴도 반반하고 성격도 남성적이었지만, 딸 하나 아들 다섯을 낳아 기르노라고 고생도 했습니다. 불행하게도 근육무력증이라는 희귀한 병에 걸려 30대에 저세상으로 옮겼습니다. 신 의사의 몸 바친 성의로 그만큼이라도 생명이 연장되었던 것이기에 낳아 기른 부모로서는 유감이 없습니다.

나는 동경 청산학원을 졸업한 해에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 갔고, 가을 학기에는 피츠버그의 웨스턴신학교로 옮겨서 구약을 전공했고, 1932년 갑작스런 경제공황에 밀려 귀국했습니다. 때는 일본 군벌에서 민주를 침략 점령하고 중국 본토에 침입하여 동남아까지 내리미는 판국이었습니다. 일미 전쟁은 시일 문제일 뿐이었습니다. 나는 부랴부랴 귀국해서 평양 3년, 간도 3년, 중・고등학교 교목 겸 교사로 있다가 1940년 서울에서 조선신학대학의 산파 겸 보육 역할을 맡아 고생고생 험로를 걸어 평생을 불태웠습니다. 지금은 86세 노옹으로 산가에 은퇴하여 마감 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마음만은 아주 늙은 것 같지 않아서 이런 평범한 기록이라도 적어두는 것입니다.

댓글 1개:

  1. 이현주 목사님의 [돌아보니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네]라는 책을 언젠가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생각과 방법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때로는 정도를 걷고... 때로는 꼼수를 부리고...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선택하고 결단하며 살아왔습니다.

    어느 순간 자신이 돌아온 길을 돌아보면서... 갈짓자 행보를 걸어온 자신이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것은... 누군가의 돌보심과 은혜였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장공 김재준 목사는 그런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면서 생각난 여러 에피소드들을 '조약돌 몇 개'라고 비유한 것 같습니다.

    우리 각자의 조약돌들은 몇 개이고... 어디에서 뒹굴고 있을까요?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