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17일 목요일

[범용기 제2권] (77) 캐나다연합교회 예방과 그 후유증 - 캐나다에의 行程

[범용기 제2권] (77) 캐나다연합교회 예방과 그 후유증 - 캐나다에의 行程


캐나다에의 行程 (갈리하 총무 내방)

비행기는 동경 – 엥커리지 – 뱅쿠버의 노선을 난다. 뱅쿠버에서는 ‘킹’ 목사라는 늙은 분이 나를 안내하기로 돼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킹’ 목사가 누군지도 몰랐고 그가 안내책임을 졌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러니까 미리 통지할 수도 없었다. 비행기는 새벽 한시에 뱅쿠버 공항에 착륙했다. 거기가 종점이다. 내리는 손님은 세 사람 정도였다. 내리자마자 부리나케 제 갈데로 가버리고 나만은 어디로 갈지 몰라서 대합실에 우두커니 혼자 앉아 있었다. 두루 살피노라니 저쪽 구석에 마감 ‘택시’ 한 대가 서 있었다. 불러서 탔다. “어디든 하루밤 지낼 호텔에 데려다 주소!” 했다.

내가 한국 서울에서 왔다니까, 무척 반가와 한다.

“나도 한국전쟁에 나가 싸운 ‘베터랜’”이라면서 여기저기 3류 호텔을 찾아 돌아다닌다. 새벽 세시쯤이니 들여놓는 호텔이 없다.

그는 “우리집에 갑시다. 변번치는 못합니다만 주무실 데도 있고 잡수실 음식도 있습니다” 한다. “좀 더 호텔을 찾아봅시다”하고 나는 부탁했다. 또 돌아다닌다.

덕분에 현관 불이 켜지고 출입문이 열려 있는 2층 호텔이 발견됐다. 3류 호텔이라지만, 한국에 있다면 1류 여관일 것이다.

그는 내가 숙박계를 써낼 때까지 내 곁에 서 있었다. 그리고 내가 방 배정 받는 것을 보고서야 떠난다. 택시 값도 조금밖에 받지 않는다.

고마웠다.

“당신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오” 하고 나는 감사했다.

“Good Samaritan이 무슨 뜻이냐”고 반문한다. 자기는 처음 듣는 말이라는 것이다.

신약성경 누가복음에 있는 유명한, 예수의 비유말씀이라고 나는 대답했다.

“나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어서 그런 것 모릅니다” 한다.

이 비유를 입버릇처럼 외이고 가르치는 교인과 목사는 강도나 제자상이나 레위인 밖에 안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비유를 모르는 불신자는 이것을 “살고” 있구나! 나는 감개했다.

이튿날 아침, ‘매니져’에게 사연을 말했더니 전화번호를 찾아 킹 목사에게 연락한다. 한 30분 후에 ‘킹’ 목사가 와서 자기 집에 Pick-Up해줬다. 사모님은 ‘꼽추’였다. 이틀인가 그 댁에서 숙식했다.

사모님은 유난히 친절했다. 자기가 ‘병신’이라는 의식은 손톱만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토론토까지의 대륙횡단 기차표를 사준다. 캐빈 독방이었다. 떠불침대는 들어 밀면 저쪽 구석 천정에 붙어버린다. 작은 ‘데스크’에 팔 의자가 있고 문방구도 갖추어 있다. 변기는 뚜껑을 덮으면 등받이 없는 의자가 된다. 온도, 공기 등을 조절하는 버튼이 나란히 있고 심부름꾼 부르는 버튼도 있다. 버튼만 누르면 ‘웨이터’가 일분안에 ‘대령’한다. 창문은 내다볼 수는 있어도 열지는 못한다.

어쨌든, 시골뜨기로서는 놀라운 ‘호강’이다.

말동무 없는 것이 탈이다. 인간은 혼자 살진 못하도록 돼 있다. ‘이웃’은 ‘나’의 분신(分身)이다. 아담은 ‘자연’인에서 ‘자연’ 속에 섞여 살면서도 외로웠다. 하느님께서는 깊이 잠든 아담에게서 갈빗대 하나를 잘라내어 ‘여인’을 만들어 아담의 ‘이웃’이 되게 했단다.

“이것은 내 뼈의 뼈요, 살의 살이다” 하고 아담은 기뻐했다. ‘이웃’이 생긴 것이다. 아내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다. 서로 서로의 ‘Better Half’다. 말하자면 ‘분신’이다.

감옥에서도 독방살이가 제일 괴롭다고 한다. ‘수도승’이라도 별 수 없다. 아씨시의 성 프랜시스는 “오! 축복된 고독이여!” 하며 혼자 살았다. 그러나 그의 고독은 다채로운 복수형 ‘고독’이었다. 그는 해와 달과 별, 나무와 풀과 꽃, 새와 물고기와 짐승 – 늑대까지도 사랑 안에서 이웃을 삼았다. 그는 자연을 Personify해서 이웃으로 대화한다.

그에게는 ‘작은 형제’라는 제자들이 있어서 그의 생활양식대로 같이 생활한다.

그에게는 ‘크라라’라는 본래부터의 ‘애인’이 있다. 크라라는 그를 잊지도 못한다. 그도 크라라를 잊지 못한다. 크라라는 그의 수도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장에 여자수도원을 창설하고 그와 같은 양식의 생활을 한다.

그는 그녀를 가끔이 찾아가서 식사도 같이하고 대화도 즐긴다. 그러니까, ‘고독’이면서도 ‘축복’을 영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청빈’(淸貧)과 ‘순애’(純愛)로 이웃관계를 ‘정화’(淨化)한 것이다. 그를 ‘성자’로 만든 것뿐이다. 물질생활에서 ‘탐욕’을 걸러내고 정신생활에서 ‘정욕’을 순화한 것이 ‘속인’보다 다른 것이다.

그래서 그는 높은 차원에서의 ‘이웃’ 넓은 범위에서의 이웃을 갖고 산 것이다.

쓰다보니 너무 설교조로 미끄러져서 미안하다. 본래의 얘기 줄거리로 돌아간다-.

기타 안 3등 객차 안에 인도인 한분이 있었다. 그도 ‘외톨이’었다. 그는 상당한 지성인이고 인도의 새로운 Nation Building에 헌신한 중년신사였다. 나는 그 동안에 ‘인도’에 대한 저서들을 얼마 읽었기에 대화가 되는 것 같았다. 심심잖게 시간을 보낸다. 내가 ‘힌두이즘’의 여러 가지 습화(習化)된 종교적 미신에 대하여 말하면 그는 머리를 흔든다. “그건 옛날 얘기고 지금은 다 없어졌습니다”하고 잡아뗀다. 인도는 벌써 모든 면에서 후진성을 탈피했다고 주장한다. 나는 말했다.

“사실, 라빈도라나드 타골이나 깐디나 네루 등등을 통하여 인도를 본다면 나도 동감이오. 그러나 바닥에 깔린 제4계급 Untouchable의 눈을 토아여 본다면 그렇게 쉽사리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니 말이요.”

기차는 록키를 넘는다. 흰 눈을 쓰고, 하늘을 꿰뚫은 봉우리들, 아우성치며 곤두박질하는 계곡의 급류, 우거진 송백(松柏)의 밀림, 허리에 흰 옷 두른 자작나무(白構) 숲 – 그 가운데를 신나게 달리는 화룡(火龍) - 옛 어른들이 ‘기차’를 ‘화룡’ 즉 불을 뿜으며 뱀처럼 꾸불대며 달리는 ‘용’이라고 불렀었다. 그건 웅대하달까, 스케일이 크달까, 생각마저 높아지고 넓어지는 것 같았다. 더 넓게 사면을 한 눈에 넣으려면 기차 꼭대기 ‘전망대’에 앉으면 된다. 그러나 얼마 안돼서 눈에 피곤이 온다. 도루 캐빈에 들어가 쉰다.

기차는 록키 올라가는데 하룻밤 – 내려가는데 하루 걸린다.

다 내려오면 평야다. 첫날은 바둑한 같이 설계된 농경지대다. 다음은 산림과 소택(沼澤)지대다. 나흘만에 토론토에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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