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17일 목요일

[범용기 제2권] (72) 재건의 행진곡 – 휴전과 재건

[범용기 제2권] (72) 재건의 행진곡 – 휴전과 재건


1953년 6월 8일 판문점에서 포로교환 협정이 조인되고 1953년 7월 27일에 판문점에서 국련군 최고 사령관과 조선인민군 최고 사령관과 중국인민의용군 사령관 사이에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이제는 이북의 재침(再侵)이 있을 수 없게 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협정을 부인하고 여전히 북진통일을 고집한다. 휴전반대 ‘데모’가 거리에 급류(急流)한다.

인민군에게 쫓겨서 유랑(流浪) 정부를 끌고 이리저리 옮겨다닌 이승만으로서는 ‘멘즈’(體面)를 세우기 위해서라도 벼텨봐야 할 것이었다.

어쨌든, 휴전은 됐다. 이제부터는 ‘건설’이다.

교회도 재건해야 한다. ‘한신’도 재건해야 한다.

1954년엔가, 캐나다연합교회 외지선교부 총무 ‘갈리하’가 내방했다. 동자동 찌그러진 방에서 우리는 ‘한신’ 재건에 대하여 의논했다. 그는 현장에서 교사 건축비로 만달러를 내놓는다.

우리는 캠퍼스 후보지를 찾아 돌아다녔다. 스캇 박사도 같이 다닌다. 이사장 김종대가 제일 열심이었다.

함태영 부통령도 열심이었다. ‘함’ 옹은 금호동 골짜기 맞은편 산, 시유지 약 3만평을 시청에서 대부할 작정이었다. 나와 스캇 박사도 같이 갔다.

거기는 피난민들이 마구 들어와 밤새에 ‘하꼬방’(바락크) 대 여섯씩 짓고 주저앉은 고장이었다. 아무도 그들을 철거시킬 재주는 없다. 교회기관이면 더 얕보고 덤벼든다. 산도 가파라서 캠퍼스 만들 고장이 못 될성 싶었다. 스캇 박사는 더 거들떠 보지도 않고 돌아갈 차비를 차린다.

다음으로는 왕세자의 첫 애기 무덤 있는 데를 봤다. 이왕실 재산이어서 더 까다로웠다.

혜화동 카톨릭 신학교 뒷언덕을 봤다. 카톨릭 재단에서 대부한다면 몰라도 우리에게는 인연이 닿지 않았다.

성균관대학교 뒷언덕을 봤다. 땅은 넓다. 그러나 역시 성균관대학교 연고지어서 실현가능성이 없었다.

간데마다 내가 머리를 가로흔들게 돼서 죄송스러웠다.

그러는 동안에 김종대는 수유리 화계사 입구 언덕과 화계사 주봉(主峰)인 뒷산과 산 넘어 저쪽 평지까지 약 10만평짜리 기지를 발견했다. 일인들이 고급주택 후보지로 입수했다가 버리고 간 귀속재산이다.

한 평에 그때 돈 78전씩인가 주고 불하까지 했다. 공간감도 있고 전망도 좋았다. 다 자란 풀숲이 우거져 있었다. 일본 비파호 오오미(近江) 형제 단원으로, 양심적인 건축기사인 강윤 씨에게 설계를 부탁했다. 언덕이 길게 뻗쳤으니 집도 이층으로 언덕 길이에 맞춰 길게 지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하얀 빛깔이면 좋겠다고 한다.

사철 푸른 송림 속에 하얀 집이 선다.

폐허 속 재건의 첫 심볼이 될 것이었다.

강윤 씨도 설계비도 받지 않았다.

공사감독은 건축가 김중업 씨가 맡았다.

학교측 총감독이 선정돼야 한다.

동자동에서 이사회가 모였다.

부통령인 함태영 옹이 학장이고, 김재준은 부학장이라는 임직이 공고됐다.

이사장은 김종대 대신에 박용희 옹이 선임됐다.

김종대는 뼈빠지게 일하고 일이 되자 물러가는 셈이었다. 말하자면 ‘공성신퇴’(攻城身退)다. 몹시 섭섭했던 모양이다.

“잘들 해 보시오” 하고 어디론가 나갔다. 그러나 ‘실행이사원’의 하나로는 남아 있었다.

함태영은 연로하여 실무를 총괄하기 어려웠다.

그는 ‘학교 재정과 재단 관리는 내가 한다’, ‘나를 대신할 실무자로서는 조선출을 쓴다’, ‘ 김재준은 부학장으로 교육책임만 진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조선출이 ‘학감’ 겸 ‘교감’으로 임명됐다.

나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교육이 내 본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감’으로서의 조선출인 경우에는 그가 돌리는 결재서류에 내 도장이 찍혀야 한다.

학교측 공사 총감독을 뽑기 위해 실행 이사회가 모였다. 당시의 이사장은 박용희 목사였다. 조선출은 자기가 ‘교감’이니 딴 감독이 필요없다고 한다. 그러나 일인양역(一人兩役)은 어렵다는 것이 이사회의 의견이었다. 나는 ‘장희진’을 추천했다. 옥신각신 논란이 많았다. 그러나 결국 장희진으로 낙착됐다.

장희진은 재빨리 소용 될 목재들을 계산하여 인천의 대성목재소에서 증기 건조를 마치고 설어다가 교정에 가로세로 쌓아놓았다.

덕분에, 거의 30년이 지난 오늘에도 문틀이나 문설주 하나 찌그러지는 일이 없다.

유리도 최태섭 사장의 호의로 인천 판유리 공장에서 싸게 사들였다.

다음해 12월, 학교 교사만은 언덕 위에 선 산정같이 덩그렇게 돋보인다. 그러나 허울 뿐이오 속에는 아무 것도 없다. 가구도, 책상도, 의자도 없다. 도서실에 책도 몇천권을 간직할 수 있는데 거의 빈 서가다.

캐나다 선교사로 종교교육을 전공한 ‘미스 로오즈’란 할머니가 우리 학교에서 종교교육 과목을 담당했다. 그가 안식년에 귀국하여 친구들을 찾아, 예배실 의자를 마련했다. 한 사람이 의자 한 개씩 기부하라 했단다. 그리하면 그 의자에는 기부한 분의 이름판을 박아, 영구 기념한다고 권했다.

그래서 어렵잖게 의자가 장치됐다.

동자동 기지와 건물은 감리교 배재학당 재단에 팔았다. 우리는 그것으로 기숙사와 교직원 사택을 짓기로 했다.

수유리에서의 한신 재건작업도 그럭저럭 3년의 휴식없는 강행군이었다. 아직 사택시설은 없었지만, 캠퍼스는 지켜야 한다.

학교 대문 안 개천가에 옛날 빈농이 살던 오막살이 초가집 한 채가 있었다. 나와 내 식구는 그 집에 옮겨 들었다.

단칸 방에 장판은 있으나 불은 안든다. 천정에는 쇠줄을 늘이고 신문지를 쇠줄에 감아 붙였다. 군데군데 찢어져 신문지가 너덜너덜 내리 달렸다. 천정 속은 쥐의 왕국이었다. 수 없는 쥐들이 밤이면 ‘운동회’를 연다. 뛴다 쫓긴다. 짹짹거리며 소란을 피운다.

나뭇가지 네 개를 네모 꼴로 땅에 박고, 거적대기를 반쯤 허리에 둘른 것이 변소다. 멀지감치 저쪽 구석쟁이에 있다.

나는 ‘숙환’인 대장염 이질에 걸렸다. 백리(白痢)로 시작하여 적리(赤痢)로 번진다. 배를 비틀어 짜내는 내 기름이다. 점점 도수가 잦아진다. 죽을 지경이었다.

서대문 밖 적십자병원 내과 과정으로 있는 내 조카 하용 박사가 앰불랜스를 갖고 와서 당장 싣고 병원에 간다. 특별실 독방에 입원시킨다. ‘데라마이싱’인가를 흠뻑 먹인다. 위도 결정적으로 파업(Strike)한다. 영양주사로 연명한다.

달반 지냈다. 그 동안에 꽃다발 갖고 위문오는 친구가 수 없이 많았다. 이질은 없어졌다.

그런데 하루는 위가 빳빳해지고 아파서 기절할 지경이 된다. 나는 침대 머리를 거머쥐고 몸을 비틀며 신음했다. 엉엉 고함치며 딩군다. 휠체어에 담겨 X-Ray실에 갔다. 여러 가지 ‘포오즈’로 일곱장인가 찍었다. 다 괜찮은데 한 장만이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위문어귀에 돌출문이 있다는 것이다.

의사들의 종합진단이 있었다. 다시 찍어도 마찬가지다. ‘암’으로 밖에 볼 수 없는데 다른 사진들이 암 환자의 그것과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 소문이 들리자 자녀들이 달려왔다. 그때 ‘상철’도 서울에 있었다. 상철, 혜원, 신의사, 정자 등등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 갖고 왔다

강형룡 의사가 주동이 되어 시내 각 병원 외과 의사들을 불러 재확인하고 수술하기로 했단다.

나에게 통고하는 책임은 강의사가 담당했다.

강의사는 내 옆에 와서 솔직하게 말한다.

“암인 것 같은데, 그래도 초기니까 지금 수술하면 별문제 없을 겁니다. 집도는 각 병원 유명한 전문의들이 공동으로 하게 됐습니다…….”

왠 일인지,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남의 일 같이 대답한다.

“그래, 좋을대로 하게나!”

후일에 들은 얘기지만, 강의사는 나의 너무 담담한 태도에 놀랐노라고 하더란다. 천성이 그렇게 돼 먹었으니까 그러했던 것 뿐이다.

이 일이 있는 다음날엔가, 나는 멀쩡하게 됐다. 위가 아픈 증세도 없어졌다. 미음, 잣죽 따위를 조금씩 먹어도 별일 없었다.

이우정의 집이 거기서 가까운 적선동이었기에 ‘어머니’가 끓여주는 잣죽을 식을세라 싸들고 끼니 때마다 온다.

아이들은 ‘엄마’에게는 알리지 않았다고 했다.

‘하용’ 의사의 ‘숙부’라는 관계 때문에 입원비와 약값 그 밖의 모든 비용은 전액 면제라 했다. ‘동업자 윤리’에서의 ‘호의’였다.

나는 ‘하용’에게 금일봉을 주며 하루 의사들을 술 좌적에 초대하여 감사의 뜻을 표하라 했다.

입원중에 밤낮 나를 간호하고 병실 안 살림을 총괄하고 방문객들을 대해 준 분은 김해순 여사였다. 수석 간호원이었다. 지금은 안희국 교수의 부인으로 농촌사업에 협조하고 있다.

두달 만에 퇴원했다. ‘하용’은 서울대학병원 X-Ray 전문의인 박사님의 사설개업 진찰실에 들러 다시 검사해 달라고 했다.

그는 ‘관장’하고 흰 횃가루 물을 먹이고 일곱장의 사진을 찍었다. 투시할 때부터 ‘하용’ 의사가 같이 참여했다.

결과는 “아무 이상없다”로 끝났다. 문제의 ‘한장’도 이제는 아주 가그러져서 흔적이 없다고 했다. 의사는 “생사람 배를 가를 뻔 했구먼!”하고 웃는다.

나는 집에 왔다. 다리가 휘청거려서 몸이 균형을 잃는다. 집에는 애기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식구가 하나 는 셈이다.

고양이가 들어오자 쥐들은 총퇴진했다. 고양이 냄새만으로도 쥐는 못 견디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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