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17일 목요일

[1251] 전두환 시대 : 우리의 길은? / 1981년 2월

[3] 우리의 길은?


결국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결정할 것이고 우리의 나라는 우리 민족이 책임져야 한다는 원점에서부터 출발해야 하겠다.

이승만 박사는 “우리의 독립은 외교에 의해서만 기능하다”고 주장했다는데 “외교”가 없을 수 없고 외교에 등한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겠지만, 자기의 독립성이 확고하지 못한 경우의 외교는 빌붙는 외교, 의존하는 “외교”여서 애당초부터 냉소나 멸시의 대상이 된다.

우리에게는 미국에 대한 의존심리가 습성처럼 박혀 있다. 우리가 일제 군국주의 식민지 정책에서 풀려나, “사이비” 독립이라도 맛볼 수 있었다는 데는 미국의 협력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6ㆍ25 동란 때, 미군의 전투가 우리에게 민주주의의 편모(偏貌)라도 남기게 해 줬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 모든 것이 미국자신의 이익을 위한 정책에서였고 “희생”이나 “시혜”(施惠)는 아니었다는 것도 똑바로 봐야 할 것이다. 38선 자체가 미국의 “제 3”의 세계전쟁을 상상한 “거점” 설정이었고, 경제성장은 일본이나 미국 자본의 유리한 투자 행위였고, 우리의 너무나 저렴한 노동임금을 악이용한 착취행위였다는 것도 기억하고 대처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선 이런 것을 자유로 검토하고 생각하고 가르치고 선전하고 대책을 세우고 하기 위한 자유분위기를 쟁취해야 한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체제만 되면 다 된다고 낙관해서도 안된다. 민주주의란 국민전체가 나라의 주인이고 나라의 책임자가 된다는 것이니 만큼, 그것을 맡아 감당할만한 “人間格”을 개발해야 한다.

우리는 “도산 안창호”선생의 생애와 사상과 그가 남긴 “홍사단”운동에서 많은 교훈과 실제를 배워 실천에 옮겨야 할 것 같다. 물론 도산 선생의 때와 오늘의 상황이 꼭 같은 것이 아니고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의 투쟁도 대규모의 권력구조로 되어 세계를 갈랐으니 만큼, 그 이념, 전력, 제도, 철학 등등에 있어서 힘의 덩어리와 대결의 성격이 “대규모”일 밖에 없고 폭력혁명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지하운동, 게릴라전 등등이 계산 항목에 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도산 선생이 미국에서는 성공했지만, 본국에서는 그 아름다운 운동이 일제에 의하여 짓밟혔고, “수양동우회”란 이름의 후신(?)도 옥고와 좌절로 지도자급(級)의 몇 분은 일제 앞에 제1차 충성을 서약하고 탈락했다. (친일문학전집 참조) 도산 선생이 만주에서 이상촌 건설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도 그 상대방의 실리주의가 “도산”의 이상주의를 너무 거세게 압도했기 때문이라 하겠다. 지금은 현대식 경영법에 의한 거대한 재벌체 형상을 통해서만 본격적인 거대한 사업을 성취할 수 있다. “이소성대”(以小成大)는 좋다. 그러나 언제나 “시간”의 한계가 승패를 판가름한다. “Too Late”란 “한”(恨)을 미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도산”의 이상을 부리나케 밀어야 한다. 마치 “Fruit Express” 열차처럼 밤낮 초속도로 달려야 할 판이다. 도산 선생이 보신 것과 같이 우리 민족은 적어도, 남한의 현실로 볼 때, 허영에 들떴고, 공짜를 좋아하고 속임수에 재빠르고 폭군 앞에 비겁하다.

우리가 보기에는 현 “전두환 정권”은 확실히 악마적인 권력이다. 하느님도 인간도 모르고 “선”과 “악”의 선택과 결단에서 “악”을 택하고 “의”와 “불의”에서 “불의”를 택한다. 총칼로 국가주권을 찬탈한 것 이상으로 더 큰 불의가 어디 있겠는가? 민족의 꽃인 제나라 학생을 백주에 대량 학살하고 시체를 구둣발로 짓밟아 터뜨리고 채 죽지 않은 젊은이 목을 올가미 줄로 매어 달리는 추럭에 매단다. 땅바닥에 뒷잔등, 앞배가 긁혀 피투성이 되어 끌려가는 내 족속의 참상을 스포츠 구경으로 여기는 그런 인간이 악마적이 아니라면 악마는 없는 것이다. 그 “악매가 “나라’의 대통령이랍시고 해외에까지 나온다니 너무나 뻔뻔스런 악마가 아닌가?

그런데 한국민으로서는 소위 지식인이란 자들이 그가 작성했다는, 자기 나름대로의 “헌법”에 맞춰 고르는 “국회의원”에 출마하겠다고 기가 나서 날뛴다. 종교지도자들 가운데서도 소위 조찬기도회에서 그의 “주권”에 대제사장적인 인준을 부여하고, 그가 자기 권력옹호기관으로 날조한 입법위원이니 자문위원이니 하는 “감투”를 “유유락락” 받들어 모시고 그 앞에서 “황공무지”한 저자세를 “사진”으로 입증했다. 그것이 그이들(종교지도자)의 본심이든 아니든 간에 그런 것 때문에 “성직”이 격하되고 하느님의 영광이 더렵혀지고 그리스도의 “혼”이 상품처럼 팔렸다는 나무람만은 듣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한승인 씨가 엮은, 그의 주저 (主著)인 “도산 안창호”를 읽으면서 이 민족은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만드는, 진짜 인격 개조의 “속사람 혁명” 과정을 맹렬하게 병행시켜야 하겠다고 절감했다. 그 실천방안으로서 -

① 한국 도시나 농촌에 샅샅이 박혀 있는 기독교회를 “핵”으로 써야 하겠다. 교회 안에서 그런 운동이 겸행되는 것을 금지할 아무 이유도 없다.

② 결코 “게토” 분위기를 조성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회원을 늘리기 위해서, 잘 모르는 사람을 함부로 허입해서도 물론 안될 것이다.

③ 독서회를 강화하고 읽으며 배우고 깨달은 것을 공개토의 모임에서 발표하고 평가한다. 다시 말해서 평생 학도로 지내야 한다.

④ 사담에서도 민족애, 나라사랑, 구체적인 국토개발 설계, 낭비 없는 일상생활, 이웃의 당면문제, 본국소식, 우리 운동에 대한 설명 등등을 화제로 낼 것이다.

⑤ “침묵의 다수”를 우리의 동조자로 믿고 그들의 삶의 문제에 협력하고 아쉬운 데를 긁어주는 친구가 될 뿐 아니라,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까지라도 “적”으로 대하지 말고, 그야말로 모든 조건을 초월하여 사랑을 실천하여야 한다. 적어도 그렇게 노력하자는 것이다.

⑥ 어느 누구의 기념사업 같은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넓직한 유한지(遊閑地)를 사서 거기에 지질에 맞는 나무를 심는 것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그이를 위한 기념만이 아니라 자연과의 낭만을 살리는 것이 된다. 거기에 무슨 기념관 같은 자그마한 집이 있어서 유지나 동지들의 휴양이 가능하게 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이런 항목들은 뜻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다. 도산 선생처럼 “사욕” 없이 생각을 실천에 옮긴다면 더욱 속히 이루어질 것이다.

한국은 지금, 미국의 군사기지, 일본의 경제식민지로 되어 좀처럼 벗어날 길이 없게 됐다고 본다. 일제 시대 때에 독립운동이 해외에서 진행되고 그 주역이 해외를 무대로 연출되었던 것과 같이 지금도 그럴 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해외에 나온 선배, 후배들과 자라는 후손들이 본국의 해방과 독립에 적극 참가하여 “主投”(주역)답게 활동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본국에 용감한 항거세력이 아주 사그러졌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더 결정적인 폭발을 위한 지하인맥(人脈)의 팽창과정으로서의 침묵일지 모른다.

우리는 그들에게 희망을 걸고 그들은 지원해야 한다. 해외뉴스 전달과 운동비 조달과 서로의 “커뮤니케이션”에 의한 선전과 우방국가들에 대한 “로비”, 불법독재권력의 대변기관에 대한 압력 등등을 더욱 강화해야 하겠다. 그러니까 세입 세출에 상응하는 예산을 세워야 한다는 말이며 그런 것을 목표로 큼직한 현대적 기업체가 있어야 하겠다는 얘기다.


“다리” 위에서


한국은 동양의 이스라엘이랄까? 크지도 않은 국토가 강대국들의 쟁파전에 언제나 교량 역할을 한다. 첫 싸움은 다리 위에서 시작된다. 임진왜란 때에도 일본의 “풍신수길”은 중원에 진출하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한반도를 교량으로 쓰려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중국은 자기네 땅에 오기 전에 막아버리려고 한반도에 출병했고 일본은 한반도에서 본격전을 서두를 밖에 없었다. 결국 애매한 우리 나라가 격전장이 되고 피해는 온통 우리 백성이 뒤집어 쓰게 되었다. 청일ㆍ로일의 두 전쟁에 있어서도 진짜싸움은 우리나라에서 붙었고, 극상했자, 만주에서 마감매치를 한 것이었다.

이제 제3차 세계대전이 보수파 정치인들의 신경을 쑤시는 것 같다. 미국은 소련이 거추장스럽고 소련은 미국이 밉다.

언젠가는 최후를 가늠하는 싸움이 벌어질지 모른다. 싸움하면 둘 다 망한다면서도 싸우잖을 수 없게 될지 모른다. 초강대국이라는 이 두 나라 사이의 “교량’도 한반도다. 그래서 아예 허리를 끊어서 둘이 나눠줬다.

이제 열전이 벌어진다고 가상한다면 미국은 태평양을 건너야 하고 소련은 “강” 하나 건너면 되니 저쪽이 유리하다. “레이건”은 일찌감치 호전적(好戰的)인 전두환을 구슬려 “미ㆍ일ㆍ한 군사 일체화”를 실현시키고 한국을 일본의 경제기지, 미국의 군사기지로 굳히고 일단 유사시에는 한국군으로 “탄환막이”구실을 하게 하고 국지전이라도 일으켜서 무기 장사라도 하고 해ㆍ공군으로 지원함네 하면서 또 한 번 무차별 폭격이라도 한다는 심사인 것 같기도 하다.

이것 역시 “다리 위” 싸움이어서 “다리” 만이, 제일 먼저 부서지고 그 위의 주민은 덧없이 죽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을 허용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군부가 국가 주권을 전단해서는 안된다.

“카아터”는 국제적으로 “인권”을 확립함으로써 인간살육에 신나 하는 전쟁주의자를 소외시키려 했다. 그러나 “레이건”은 “안보”제일주의를 빙자하여 전두환을 전쟁 앞잡이(?)로 쓰고 “인권”이란 것은 그 나라의 “내정”에 속한 것이니 딴나라의 알 바가 아니라고 돌아 앉는다.

김대중 사건은 “내정”으로 되고 민주운동하는 애국자들도 “내정”에 속한 것으로 치부해서 전두환의 재량에 맡겼다. 인권침해 최우등생으로 뽑혔다는 한국이 이제 더 우쭐해진다면 전두환은 이제부터 어떤 일을 저지를 것인가? 그러나 역사란 그렇게 말랑말랑한 진흙만이 아니니까 전두환이 맘대로 빚어 온통 제 얼굴만을 구워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1981. 2. 제3일 속간 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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