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15일 화요일

[범용기 제2권] (67) 환도와 재건(1953-1958) - 순강(巡講) 행각

[범용기 제2권] (67) 환도와 재건(1953-1958) - 순강(巡講) 행각


공자님처럼 “주유천하”는 못할망정, 전반적인 순회강연이 필요하게 됐다. 정통주의자들의 음성적인 허위선전을 양성적인 진실로 격파해야 한다. 예수도 바리새교인들과의 변론을 회피하지 않았다.

경상도에는 해병대와 같은 돌격상륙이 필요하다. 전라도와 충청도는 그 분위기와 대세가 개혁운동의 ‘기류’에 덮여 있기는 했지만 신학적인 이론체계가 결핍햇다. 한신졸업 목사님들의 응원도 해야 할 판이었다. 전라도에는 김세열, 이남규, 조승제 등 원로급 목사들이 있어서 맘 든든했다. 교회마다 대 환영이다. 남장로 선교사들과 그들의 추종자 또는 동조자들이 방해했지만 결정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군산에는 한신 졸업생으로서 큰 교회 맡은 사람이 많았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예’와 ‘아니오’를 똑똑하게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시기까지 ‘보류’한다는 신중성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중에서 김영천 장로가 선봉장으로 나섰다. 그 당시에는 집사였다.

성명서도 내고 ‘그룹’도 만들었다. 상당히 오랜 후일에사 우리 졸업생들이 개혁운동에 ‘인테그레잇’ 할 수 있었다. ‘허현’(?) 장로는 최태용 계열이었으나 우리켠 거물급이었고 최태용 씨 계열도 동조했다.

이규갑 씨도 ‘열심당’이었다. 전주에서의 연합강연회는 서정태 목사 교회당 안과 바깥 앞마당이 차고 넘치는 성황이었다. 서울 성암교회 안병부 목사가 찬조강연으로 웅변을 토했다. 그는 동경 법정대학 정경과 정규 졸업생으로서 식견도 있고 말솜씨도 ‘웅변’이었다.

나를 소개하는 장로가 말했다. “김재준 교수를 악평하는 분들이 하도 극성을 부리길래 우리는 머리에 뿔이 돋힌 어마어마한 괴물(怪物)인줄 알았었는데 정작 만나보니 작고, 얌전하고, 약한 시골 소학교 선생같다….”

어쨌든 강연은 성공적이었다.

대구에서는 우리 졸업생 ‘예종도’ 목사 교회에서 강연하기로 돼 있었다. 그리로 갔다. 예종도는 강단 모새기 마루에 앉아 있고 어떤 장로가 사회했다. 설교 시간에 강단에 올라가 앉았다. 그때까지도 말썽이 없었다. 일어서서 강대상에 나가려 할 순간, 사회하는 장로가 나를 끌어 강대상 아래로 밀어제친다. 그리고 자기가 설교한다.

나는 그야말로 ‘얌전하게’ 순해빠진 ‘양’같이 앉아 예배했다. 그날밤, 내 여관에 두 젊은이가 찾아왔다. 그 교회에 출석하는 대구대학 교수라고 한다.

“오늘 김목사님이 그 장로에게 항거하셨더라면 그 교회는 난장판이 됐을 것입니다. 그 장로님은 김목사님을 욕 보이려고 그런 ‘비례’(非禮)를 의식적을 감행한 것입니다. 우리는 김목사님이 참으시는 걸 보고 안심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싸우렵니다.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대구에는 ‘박재석’이라는 거물급 목사가 있었다. 그는 익살꾼이랄까, 재담과 농담이 샘솟듯 한다. 남의 얘기같이 구슬려 간다. 다 듣고 나면 ‘제자랑’이다. 그 분이 대구에서의 우리켠 주장(主將)이다. 이쪽 저쪽에서 ‘소진’, ‘장의’처럼 종횡(縱橫)한다.

내가 지방교회를 방문할 때면 꼭 따라 나선다. 심심찮게 인심을 어루만지고 주무른다.

경주는 난공불락의 도시였다. 나와의 ‘절교’를 선언하고서 목사가 된 우리 졸업생이 교회를 맡고 있었다. 강연에 교회당을 빌려주지 않는다. 거기서도 평신도와 장로들 가운데는 ‘열린마음’ 가진 이가 적지 않았다. 그들은 소학교 강당을 빌렸다.

그래서 우리는 경주에 상륙했다. 씨는 뿌려진 셈이었다.

충남 서천, 삼례 등지에도 들렀다. 대전 수원도 역방했다. 광주에서는 백영흠 목사의 ‘독립교회’가 ‘전방기지’다. ‘여수’ 교회는 김재석 목사 부부와 부모님이 모두 우리 ‘한신’ 졸업생이니만큼 문제가 없었다. 목포에는 이남규, 조승제, 장하원 등이 있고 이해동도 있었기에 순조로웠다.

수원서도 그런데로 강연할 수 있었고 대전은 어려웠으나 소규모의 모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많은 교회가 전체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탈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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