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15일 화요일

[범용기 제2권] (57) 교권에 민감한 서울의 중견목사들과 한국신학대학 – 속개된 대구 총회에서

[범용기 제2권] (57) 교권에 민감한 서울의 중견목사들과 한국신학대학 – 속개된 대구 총회에서


1951년 총회는 대구에서 속개됐다.

김재준 사건을 위임맡은 임원회에서는 부산총회 때의 처리안 그대로를 통과시켰다. (초고 297면 참조)

38선이 생기기 전, 이북 노회 총대수 그대로의 이북 ‘총대원’이 정회원으로 자리를 차지했다. 전 총회원 수의 3분의 2가 갑작스레 늘었다. 그들은 ‘은혜갚음’으로라도 미국선교사들과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총회원의 절대다수가 저켠이었으니 김재준 처단은 일사천리로 가결됐다. 대구의 젊은 목사 ‘박병훈’이 장장 2시간에 걸친 고소 이유를 낭독했다 한다.

일제말기, 전영택 목사가 서울에서 ‘새사람’이란 월간지를 간행할 때, 나는 간도 용정에 있었다. 전영택 목사로부터 원고청탁이 왔다. 나는 “정통이라는 이단”이라는 제목의 “엣세이”를 발표했다.

박병훈은 주로 그 논문을 들고 나와 나를 고발하더라는 것이었다.

경기노회 부총대였던 강원용은 수석총대 전필순의 양해하에 역시 2시간 이상 김재준 변호연설을 했다. 세계교회와 세계신학사조의 방향을 곁들여 한국장로교회의 맹점을 통박했다. 그러나 총회로서는 ‘기정방침’이어서 이론을 초월한 ‘독재’로 일관됐다.

총회로서는 거듭하는 불법에 항거하는 총대원들은 절대소수로 몰려 설자리가 없어졌다. 그들은 퇴장했다. 김세열, 이남규, 박재석, 김종대 등 ‘백전노장’들도 퇴장했다. 전라도 장로교회들은 거의 전부가 ‘혁신’ 측이었다. 경상도는 보수 일색이랄 수 있겠고 경기 충청은 반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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