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30일 수요일

[범용기 제2권] (128)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운동 – 한일 굴욕외교 반대운동

[범용기 제2권] (128)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운동 – 한일 굴욕외교 반대운동


1965년 6월 – 박정권은 미국의 사주에 따라 급속도로 일본에 접근한다.

김종필이 몰래 가고 오고 하면서 ‘오오히라’(太平)와 저두외교(低頭外交)를 벌인다고 한다. 그래서 소위 ‘한일 굴욕 외교 반대 투쟁’이 학원과 민간에서 날마다 격화되어 갔다.

1965년 7월 1일이었던가, 시내 각 교파를 망라한 목사와 교회 지도자들이 영락교회 안에 모여 한일국교정상화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처음에는 한경직, 김재준, 이태준 등 불과 6, 7명이 모였었으나 차츰 그 수가 불어 시내 각 교파 교직자로서 가담하지 않는 분은 거의 없었다.

신학적인 차이나, 세대차, 교파별 등도 문제되지 않았다.

수백명의 목사, 전도사, 문인, 재향군인, 장교 등 각계각층이 ‘일체화’했다. 회의진행절차도 없었다. 다들모여 오순도순 얘기하다 보면 저절로 합의되곤 했다.

결국 성명서와 함께 박정희 대통령, 국회의장, 일본정부, 일본국회, 일본교회, 미국대통령, 국제연합본부 등등에 보낼 공개 서한들을 기초할 위원회가 지명되어 김재준 책임하에 모든 문서가 작성되었고 그것이 검토 채택되었다.

그리고 마감으로 영락교회에서의 공식예배 설교시간에 대강연회를 열기로 했다. 집회허가 없이 강연하려면 교회의 기도회나 예배형식을 취할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집회는 초만원이었다. 연사는 한경직과 나였었다.

이것은 한 교사의 목격담이다.

그리고서 그는 혼잣말 같이 “학생놈들! 어디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하며 이를 악물더라는 것이다.

그 후에 생긴 소위 ‘사립학교 법안’이란 것은 이런 그의 복수심에서 안출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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