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30일 수요일

[범용기 제2권] (119) 5ㆍ16 군사반란(1961) – 대한일보 논설도 쓰고(1962)

[범용기 제2권] (119) 5ㆍ16 군사반란(1961) – 대한일보 논설도 쓰고(1962)


나는 비교적 조용하게 수유리에 은거(隱居) 했다.

그렇다고 동면(冬眠) 상태였던 것은 아니다.

설교부탁은 여기저기서 거의 매주일 되었다. 교회 창립기념예배니, 누구의 환갑잔치니, 목사위임식이니 하는 등등의 교회 행사에는 거의 빠짐없이 초청된다. 약혼식, 결혼식 주례로서의 빈도도 상승한다.

신문 잡지 등에서 ‘잡문’ 부탁도 온다.

친구의 유혹이 있으면 명산 대천에 관광도 간다. 말하자면 유유자적(悠悠自適)이다.

하루는 황혼이 짙어 컴컴한 수유리 내 ‘장막’에 김연준 대한일보 사장이 찾아왔다. 그는 나를 늘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선생님, 대한일보 논설위원으로 모시고 싶어서 이렇게 왔습니다. 사설은 신문사로서의 주장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제가 신문을 맡은 바에는 사설이 독특한데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설’이 시사(時事)의 뒤꽁무니나 따라다니며 구차한 콤멘트나 하는 정도라면 또 하나의 신문을 경영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정치고 경제고 문화고간에 ‘도의’(道義)가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저는 ‘도의’ 사설을 꼭 넣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밖에는 부탁 드릴 분이 없습니다. 며칠에 한번씩 잠시 들러 주십시오, 그때는 제가 제 차를 보내드리겠습니다. …”

“그 바쁜 시간에 이렇게 먼길을 찾아주셨는데 거절하기 죄송합니다만, 그러면 가담가담 잡문이라도 적어 보내겠습니다. ‘사설’은 너무 어마어마하구요.”

그는 “꼭 논설위원으로 모시겠습니다” 하면서 떠나갔다.

그때 마침 내가 강원도 정선지방을 탐승한 일이 있었기에 그 기행문 비슷한걸 적어 보냈더니 그 비좁은 지면을 계속 할애해 주었다.

얼마 지나서 그는 또 밤에 찾아왔다. 말하는 도중에 라디오에서 ‘중대방송’이 있다면서 진행 중의 프로를 중단한다. 우리도 잠시 얘기를 중지했다. ‘통화개혁’이란 것이다.

“손해 당할 조건은 없습니까?” 했더니 자기에게는 아무 영향도 없다면서 태연했다.

그럭저럭 나는 대한일보가 KCIA에 의하여 폐문될 때까지 10년 동안 논설위원 책임을 계속했다. 그야말로 날마다 잠시 들리는 정도였지만 논설위원 회의에는 꾸준하게 참여했다.

그때 논설위원으로서는 강영수(주필), 주요한(회장), 허우성, 한태연, 신상초, 조동필, 엄요섭, 김은우, 민병기(후기에) 등등이었다. 모두 야당적인 평론가들이었지만, 강영수 주필만은 치밀한 신중론자로서 가시돋힌 단어를 매끈하게 갈아넣는 명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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