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24일 목요일

[범용기 제2권] (110) 5ㆍ16 군사반란(1961) – 박정희란 사람은?

[범용기 제2권] (110) 5ㆍ16 군사반란(1961) – 박정희란 사람은?


그가 정체불명의 사나이라지만 들춰보면 아주 모를 사람도 아닌 것 같다.

그는 1919년 9월 30일 경북 선산군의 한 빈농이ㅡ 아들로 태어났다. 1937년에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문경에서 소학교 교사로 있다가 만주에 가서 만주군관학교를 1942년에 졸업,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유학, 일본군 육군중위로 관동군에 배속됐다고 쓰여 있다.

만주군관학교에 있을 때에는 한국 독립군 토벌에 선봉섰다는 소문도 있다. 깜찍한 일본군이 ‘죠센징’ 토벌에 ‘죠센징’을 앞장세웠으리라는 것쯤은 짐작이 안가는 것도 아니다.

일본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혈서로 ‘천황’에게 충성을 서약했다는 얘기도 있다. 허긴 ‘죠센징’으로서 ‘관동군’에게 배속됐다면 일봉인 인상으로 일본에 충성했으리라는 심중만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 같다.

1945년 8ㆍ15 해방이 되자 그는 당황한 것 같다. 얘기로는 북경을 거쳐 만주로 진격중인 ‘8로군’에 끼어볼까해서 그리로 갔다가 채였다고 한다.

그는 무작정 서울에 돌아왔다. 마침 이승만 정부에서 ‘국군’을 창설한다고 어디서 어떤 모양이로든 ‘군인’으로 있어봤다는 사람이면 무조건 받아, 6개월 단기훈련을 거쳐서 장교로 임관하는 것이었다.

박정희도 거기 지원 1946년 2월에 한국육군사관학교 2기생으로 졸업했다.

그는 1948년 10월 여수, 순천 좌익반란사건에 주동, 또는 방조의 혐의로 ‘군재’에서 사형구역, 무기징역으로 선고됐다고 한다.

1949년 2월 13일, 민정당에서 발표한 여수ㆍ순천 반란사건 조사자료에 의하면 “박정희는 그 당시 육군소령으로서 이중업 남로당 조직책의 지령에 따라 이재복 군부연락책에 의하여 육군본부내 공산당 조직을 담당했으며 전 군부내 조직을 통괄한 사람이다”고 쓰여있다.

“박정희 소령은 육군사관학교 생도대장으로 근무하면서 남로당 세포조직을 담당하였고 후임인 오일근(吳一根) 소령에게 ‘세포책’을 인계하고 제4연대로 전임했다”고도 쓰여 있다.

그 당시 국방부장관인 이범석 장군으로부터 군부내 공산당세포 적발에 1차 숙군(肅軍)의 명령이 내리자 박정희 소령은 자기 신변이 위험해짐을 알고 자기를 신임하는 상관인 정보국장 백선엽 중령에게 자수, 자백하고 정보부 소속인 김일안(金一安) 소령의 협력을 얻어 불구속 입건이 됐다. 백선엽 정보국장과 그 소속부대인 방첩대(CIC)가 이 사건의 수사담당 기관이었는데 김일안 소령은 방첩대장임과 동시에 박정희와는 동기생이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너그럽게 다뤄졌던 것이라 한다.

백선엽과 김일안은 박정희의 구명을 위해 그가 갖고 있는 군부내의 공산당원 명단을 제공하게 하고서 박정희는 공산당 숙군에 공로가 크다는 이유로 용서를 상신했다고 한다. 그리고 박정희 소령 없이는 정보부 운영이 곤란하다고 육군수뇌부에 제언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형구형에 무기징역이라는 판결과 직위 파면 등등이 지워지고 국방장관 신성모로부터 복직발령이 내려 정보부에 근속하게 됐다고 했다.

박정희 소령이 군부내 공산당원 명단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공산당원으로서의 열심분자였음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종선조직이 볼쉐비끼 조직이론인데 그 조직책은 요직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후의 박정희는 정보장교로서의 재능을 발휘하여 상승일로를 걸어 마침내는 반란에 성공, 정권을 가로채는 데까지 성공했다는 것이다. (더 자세한 것은 ‘제3일’ 속간 28호를 보라) 그는 배신(背信)의 화신(化身)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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