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24일 목요일

[범용기 제2권] (100)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와 그의 ‘하야’ - 시국선언

[범용기 제2권] (100)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와 그의 ‘하야’ - 시국선언


“서론”이 길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그리고 요구조항만을 적어 본다.

① 마산, 서울 기타 각지의 데모는 주권을 뺏긴 국민의 울분을 대신하여 외친 학생들의 순수한 정의감의 발로며 불의에는 언제나 항거하는 민족 정기(正氣)의 표현이다.

② 이 데모를 공산당의 조종이나 야당의 사주(使嗾)로 보는 것은 고의의 왜곡이며 학생들 정의감에 대한 모독이다.

③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데모에 나선 학생들에게 총탄과 폭력을 기탄없이 남용하여 공전의 민족참극을 빚어낸 경찰은 자유와 민주를 기본으로 한 대한민국의 국립경찰이 아니라, 불법과 폭력으로 권력을 유지하려는 일부 정치집단의 사병(私兵)이다.

④ 누적된 부패와 부정과 횡포로써 민권을 유린하고 민족적 참극과 국제적 수치를 초래한 현정부와 집권당은 그 책임을 지고 물러가라.

⑤ 3ㆍ15 선거는 부정선거다. 공명한 선거에 의하여 정, 부통령을 다시 뽑으라.

⑥ 3ㆍ15 부정선거를 조작한 자는 중형에 처하라.

⑦ 학생살상의 만행을 위에서 명령한 자와 직접 하수한 자는 즉시 체포 처단하라.

⑧ 깡패를 철저히 색출 처단하고 그 전국적 조직을 분쇄하라.

⑨ 모든 구속된 학생은 무조건 즉시 석방하라. 설사 파괴와 폭행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는 동료의 피살에 흥분한 비정상 상태하의 행동이요 파괴와 폭동이 그 본의였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⑩ 공적지위를 이용하거나 관권과 결탁하여 부정축재한 자는 민, 관, 군을 막론하고 가차없이 적발 처단하여 국가의 기강을 세우고 부패와 부정을 방지하라.

⑪ 경찰의 중립화를 확립하고 학원의 자유를 절대 보장하라.

⑫ 곡학아세(曲學阿世)의 사이비 학자를 배격한다.

⑬ 정치 도구화한 소위 문화인, 예술인을 배격한다.

⑭ 시국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학생들은 흥분을 진정하여 이성을 지키고 속히 학업의 본분으로 돌아오라.

⑮ 학생제군은 이북의 선전에 이용되지 않도록 경계하라. 그리고 이남에서도 종내의 ‘반공’명의를 도용하는 방식으로 제군이 흘린 피의 댓가를 정치적으로 악이용하려는 불순분자가 있음을 조심하라.

1960년 4월 25일
대학교수단

이 선언문은 정석해를 의장으로, 이종우(李種雨)가 기초하여, 토의 수정한 것을 이항령이 낭독한 것이며 권오돈의 만세삼창으로 마무리된 것이었다.

나 자신은 서울 시내에서 20리 외따로 있는 수유리의 화계사 골짜기에 있었기 때문에 소식도 몰랐고 ‘교수단’ 모임도 물론 몰랐다. 알았댓자 그 당시의 신학교 교수란 성명이 없었다.

1960년 4월 25일 대학교수단 데모 날에야 알고 시내에 들어갔다. 동대문 가까이서부터 교수단 행진대열의 옆변두리 보도를 같이 걸었다. 학생들의 교수단 옹위와 그 존경도는 대단했다. 너무 감사하고 기뻐서 어쩔줄 모를 지경이었다.

시청앞 광장은 Sit Stirike 학생들로 초만원이었다. “민주국가 건설하라”, “매판자본 물러가라” 등의 프랑카드를 들고 나서는 학생들은 시민에 비하여 얼마나 ‘선각자’인가를 나는 맘깊이 느끼며 스스로 머리가 숙여졌다.

고대생 선배인 이철승이 인촌 김성수의 ‘장기전’ 유훈을 발표하고 고대생에게 해산을 권고했다. 고대생들은 일어나 대열을 지어 학교로 행진한다.

시민들은 이미 흩어져 제각기 자기집 가기에 바빴다.

바로 그날 밤이었던가 나는 수유리 신학교 마당에 서 있었다. 횃불을 휘두르며 고함치는 찝차부대가 수유리 신작로로 몰려든다. 의정부 최인규 집을 부수고 그를 잡아낼 계획이었단다. 가는 길에 수유리 파출소도 불에 삼켜졌다. 의정부 최인규는 벌써 어디론가 도망쳤고 그의 호화 주택만 액운을 당했다. 그가 내무장관이었으니까 당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이튿날 또 시내로 간다. 미아리 고개길에서 찝차탄 데모대를 연방 만난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쳐다봤다. 고열(高熱)에 들떠 미친 사람 같았다.

그러나 시내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학생들은 태풍후의 지저분한 검부러기들을 말끔하게 청소한다. 질서도 정연했다. 관제 폭력단의 만행만 없었더라면 학생들의 희생도 덜했을 것이고 시민생활의 정상화도 비교적 순조로웠을 것이 아닐까 싶다.

서소문밖에 독립문 가는 길에서 시민대열에 끼어 같이 걸었다. 이기붕 집앞에서의 소동을 목격했다. 정동 대법원 앞에서 “선거소송 속히 판결하라”고 고함치는 일부 데모대에 섞이기도 했다. 종로 중앙청 사이 길에서 ‘의전’ 학생들이 흰 까운차림으로 부상데모원들을 병원에 운반하는 광경을 봤다. 성스러운 얼굴들이었다.

동아일보나 외국기자들의 찝차가 나타나면 환성을 올리며 그들을 환영했다.

* * *

1960년 4월 26일

미국 주한 대사관의 마카나키는 아래와 같은 취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본 대사관은 이 나라 국민의 갈망을 심심한 관심을 갖고 주시한다. 법과 질서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지지한다. 이 점에서 국민도 동조해야 한다.
당국은 국민의 정당한 불만에 응답할 조치를 취할 의무가 있다. 정의를 선양하고 솔직하고 철저한 해결책을 취해야 한다. 미봉책을 쓸 시기는 지나갔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을 두 번이나 방문하여 권고했다.

4월 27일

이승만은 대통령 사임서를 정식으로 국회에 제출했다.

그리고 학생들이 자진 치안과 질서유지를 담당하여 평온하게 공백기를 극복했다. (학원사 발행 4ㆍ19 기록 인용).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