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28일 월요일

[0913] 신앙생활에서 생활신앙에로

신앙생활에서 생활신앙에로– ‘제3일’지의 성구 수상


이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최대의 계명인데, 그것은 각 개인이 자기의 전 존재를 거기에 집중시켜야 실현된다는 것을 지적한 말씀이다. 이웃 사랑도 내 몸과 같이 하라고 했다. 몸은 그 인간 전체를 상징한다. 예수는 말씀이 몸으로 됐다. 그 몸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 몸이 예수의 전부다. 우리도 몸으로 산제사를 드린다 할 때 우리의 전부를 드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믿는다, 사랑한다, 바란다 할 때 우리의 마음으로만이라든가 말로만이라든가 어떤 단편적이고 일시적인 행위로라든가를 통하여 믿는다, 사랑한다, 바란다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전 존재인 몸으로 평생 그리한다는 것이며, 그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신앙한다 할 때, 그것이 우리 생활의 한 부분인 것같이 생각하기 쉽다. ‘신앙생활’이라 할 때 경제생활, 정치생활 또는 직장생활 등등이 있는 가운데서 믿는 사람에게는 신앙생활이란 것이 또 하나 덧붙는다는 것으로 해석하기 쉽단 말이다. 다른 모든 생활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데 그는 바둑에 깊은 취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시간을 내서 기원에 다닌다 하는 식으로, 그는 신앙이 있기 때문에 부지런히 예배당에 나간다 하는 것 같은, 하나의 첨가된 취미생활이 종교인의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런 하나의 액세서리로서의 신앙생활이란 아무 위신도 명령권도 없는 것이어서 불편하면 언제나 버림받을 성질의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표현이 아니라 ‘생활신앙’이란 표현으로 신앙이 정립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생활이란 몸과 같이, 삶 전체로서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산다는 데는 모든 것이 다 걸려든다. 정치, 경제, 문화, 개인, 가정, 사회, 의식주 등 모든 것이 서로 얽혀든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전 존재를 바쳐 하나님을 믿고 전 존재를 이끌어 이웃을 사랑한다면 그 신앙과 사랑은 우리 ‘삶’ 전체로서 고백되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이 애매하기 때문에 지금의 크리스찬이 생활에 진지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생활로 믿는다, 믿음을 생활화한다.”고 하는 말은 쉬운 일이 아니다. 크리스찬 생활이란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하여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생활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목표로 하고, 일상생활에서 당하는 사건마다 경영하는 사업마다 그것을 실현시키려는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무척 어렵다는 말이다. 더욱이 거기에 이해관계가 붙고 그 상대자가 우리의 심정에 온전히 몰이해해서 우리의 너그러움을 역이용하여 더욱 우리를 침해하려 한다면, 우리가 실제에 있어서 ‘악에 항거하지 말고, 오직 선으로서 악을 이기라’ 하는 태도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취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개인 문제에 국한된 것이라면 또 몰라도 단체 관계일 경우에는 이해관계에서 우리가 마음대로 단체 이익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특히 소송사건 같은 데서는 억울한 것을 풀기 위하여, 정의를 세우기 위하여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자기 나라에 침략군이 들이밀 때에도 인간애와 절대 평화를 위한다는 의미에서 병역을 거부하고 싸우지 않아야 되는가? 그리고 그 취하는 수단이 크리스찬답다 해도 그 결과가 또한 어떻게 뒤집힐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목적 실현을 위한 수단, 절차 같은 것은 사정과 경우에 따라 극히 유동적이고, 환경에 도전한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므로 신앙을 생활한다는 것이 결국에는 우습게 변모하든지 변하는 환경에서 늘상 보호색을 뒤집어쓰든지 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갖게 된다.

그러므로 목적 실현을 위하여 진지하게 시도한 것이 그대로 되지 않았다고 생각될 경우에는 다시 좀 더 나은 행위를 모색하여 수정하고 개량하면서 가능한 최선의 방법을 다시 시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생활신앙의 목표 실현을 위한 행위 전체는 각 사건과 각 단체에서의 시스템이 최종 목표에서 통일되는 것이며, 그 완성은 하나님 나라가 종말에서 완성되는 것같이, 역시 종말에서 예수의 모습으로 완성된다고 볼 것이다.

현재에 우리가 신앙인으로 산다 할 경우에 언제나 실천, 또는 실행을 연상하게 된다. 가령 그리스도교에서 ‘사랑’을 빼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다.(고전 13장) 그런데 사랑이란 실제로 일상생활 기록으로 되지 않는 한 아무 실질도 갖지 못한다. 말로만 사랑한다 하면서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의 양식조차 없는데, 그들에게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라’고 하면서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약 2:15~16) 믿음도 그렇다. 믿는 대로 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믿음’(약 2:17)이다.

이런 방향에서 우리에게 생활신앙이란 행하는 믿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의 현대 생활은 극히 세밀하게 분업화했고 이념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이 아주 복잡하게 서로 엉키어 있다. 우리는 정보사회에 살고 있다.

모든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들은 그 정보 관계의 어느 한 부분을 맡아 일하는 것만으로 산다. 어떤 사람은 방대한 기계장치의 어느 한 버튼을 누르는 것만으로 산다. 어떤 사람은 실험실에서 무언가 새 원리를 연구하며 실험한다. 그들은 종교적인 신앙이니 인간애니 하는, 어떤 형이상학적인 세계와는 무관하며, 어떤 전체적인 세계나 전체로서의 의미를 생각할 여유도 없다. 그가 가정생활에서 아내를 사랑하고 있는지 그렇잖으면 서로 맞지 않아서 별거하고 있는지 그런 것은 그의 연구실이나 실험실과는 상관이 없으며 사람들도 그에게 그런 것까지 간섭하려 하지 않는다.

이렇게 토막토막 끊어지고 흩어진 직장에서 평생을 지내는 인간들에게 어떻게 전 존재를 바쳐 하나님을 신앙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생활신앙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철학이나 신학을 연구하고 사색하는 사람은 사실상 상아탑의 사람이 아닐 수 없으며, 서재 안에서 평생 스스로의 사색의 세계에 몰입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더러 거리에 나와 사랑의 행동자가 돼라 해도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또 그럴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전문적으로 관념의 세계에 파고드는 사람이라 해서 생활신앙의 각도에서 그를 무실천자라고 정죄할 수 있는가? 그는 그가 맡은 사색의 분야에서 또는 실험과 연구의 분야에서 생활하는 것이며, 그의 연구와 사색 자체가 그에게는 생활신앙으로 되는 것이라 하겠다.

말하자면 홍수가 나서 숱한 사람이 섬에 갇혀 있을 경우에, 그 사실을 보도하는 사람이 있고, 그 보도를 듣고 많은 인원과 기구를 동원하여 구조사업에 나서는 사람이 있다. 그런 경우에 전자는 말만의 인간이요, 후자는 사랑의 실천자라고 속단할 수 있겠는가? 생활신앙의 입장에서는 둘다 같은 구조사업에 동참한 사랑의 실천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에서 관념적인 것을 그렇게 경계하고 실천적인 것을 그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양자택일을 위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몸으로 되어 ‘말씀이 육신이 된’ 것같이 관념이 생활로 되어 그 증거가 생명책에 기록되게 하려는 데 있는 것이다. 나는 생명책을 역사에 영원히 살아남는 진실의 증거라고 본다. 역사는 하나님의 테이블이다.

나는 독립된 한국의 첫 집권당인 자유당과 첫 집권자인 이승만 박사에게 천추에 풀리지 않는 유감을 갖고 있다. 그가 크리스찬이었고, 그의 각료들도 크리스찬이 많았다. 그들은 건국의 정신적 기초를 세울 사람들이었고, 기독교적인 신앙과 윤리와 양심을 따라 나라의 첫 전통을 세워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옳으심보다도 자기의 집권욕을 앞세워, 민주체제의 두 기둥인 평화적인 정권 교체와 공정 선거를 모조리 유린해 버렸다. 그 대통령 첫 집권당이 후세에 남긴 국가적 전통이 되었다. 그것이 크리스찬 정치가들에 의하여 결정되고 실행되었다. 물론 야당에 속한 크리스찬들은 그 책임에서 면제되었지만 그들이 만일에 생활에서 고백되는 신앙의 사람들이었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옳으심을 신앙과 생활의 기준으로 삼는 신자였다면, 대통령 자신이 ‘아니다’ 하고 일어섰을 것이며, 그런 유혹이 있더라도, 또 그래야 나라가 잘 되리라는 아전인수적인 신념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보우하사’를 믿는 사람이라면, 부정선거의 설계에 ‘아니다’ 하고 자리를 물러났을 것이다. 그런데 그랬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나는 한국 크리스찬 신앙에 무언가 근본적인 잘못이 있다고 절감했다. 관념으로서는 무엇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생활 결단에서는 불의한 탐욕에 합류하는 것을 오히려 부득이한 것으로 아는 ‘죽은 믿음’의 소유자만을 기른 것이 아닐까? 크리스찬이 빛이라면 암흑이 그 앞에서 물러나야 할 것이고, 크리스찬이 소금이라면, 짭짤한 맛이 나고 썩는 것이 멎어야 할 것이다. 당하는 사건마다 그런 입장에서 행동을 결단해야 할 것인데, 모두가 죽어서 천당 갈 욕심에만 취하여 예수처럼 사는 골고다의 길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으려는 모양이니 목전의 욕심과 안일과 영달을 희생하면서 진리의 증언자가 되려는 용기는 기대할 수 없을 것이 사실이다. 생활신앙에로의 개혁은 시급히 요청된다.

새 것과 옛 것

예수는 여러 가지 비유로 제자들을 가르치고 그 결론으로 이런 말을 하였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를 위하여 훈련받은 율법학자는 마치 자기 곳간에서 새것과 옛것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 13:52)

문화의 건전한 발전을 기하려면 옛것과 새것의 좋은 요소를 결부시켜 그것이 새로운 형태로 성장하게 하고 그 좋지 못한 요소는 지나간 한때의 현상으로 그치게 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물론 무엇이 좋은 요소냐 하는 데에는 한참 논란이 있어야 할 것이다. 사람이란 자기들에게 익숙한 것을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성세대는 더 많이 기성질서를 좋아할 것이고, 새 세대는 또 자기들에게 익숙한 것을 좋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성세대를 온전히 단절시킬 수도 없고 새 세대가 기성세대를 그렇게 할 수도 없는 것이 사실이니만큼 합동하여 제3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공동으로 지워진 의무일 것이다. 세대와 세대에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문화 형태나 사고방식의 차이요, 실존은 한 생명의 연속이며 한 생활의 발전이기 때문이다.

요새 흔히 말하는 10대니 20대니 하는 연령층을 한 집단으로 생각하여 그것이 구세대와는 온전히 단절된 것같이 생각하고 또 단절된 것으로 선전하는 일이 많다. 그리고 “구세대에서 배울 것이 무어냐? 전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히 새로 출발한다.” 하는 식의 태도를 자랑 삼아 과시 한다면 그것은 자기 혼미의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가령 우리 한국 10대나 20대가 그런다고 하자! 그들이 부모 없이 하늘에서 10대나 20대의 모습으로 강림한 것이 아닌 한, 혈통이 계승되었고, 어머니 가슴에서 자랐으니 어머니 마음이 그 마음구조에 스며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어린 시절의 환경과 습관과 친교와 배움이 그들의 심리구조에 뼈다귀가 되어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들이 10대, 20대에 와서 그것을 단절한다고 반발한다 해도 때가 너무 늦었으며, 그들의 과거는 벌써 그들 자신 속에 한 주요 구조로 생리화해 있는 것이어서 그 구조 자체를 단절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지나간 세대는 새 세대가 자기들과 똑같지 않다 할지라도 그것이 새로 자라나는 현상이라는 의미에서 오히려 경이와 찬탄으로 대할 것이요, 실망이나 저주로 임할 것이 아니다. 나무에는 해마다 자라난 흔적이 있다. 그래서 연륜을 남기고 고요히 그 나무의 전체 생명 속에 머문다. 그 성장은 언제나 새 세대의 자유며 투쟁이다. 지나간 세대는 그것을 붙들어주고 지원해 주면서 척추가 되어 동참하는 것뿐이다.

낡은 세대는 새 세대가 자기들과 똑같은 생각과 행동을 해줬으면 한다. 그러나 그것은 욕심이요, 지혜가 아니다. 이 점에서는 교육자가 부모보다도 더 고루한 경우가 많다. 자기들이 가르친 그대로의 답안을 쓰고, 학교에서 만든 규칙과 제도와 규격에서 한 치라도 벗어날세라 감독하고, 그래서 가로수처럼 다듬어진 일정한 사이즈의 인간을 일정한 형에 박아내려 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를 이식해 놓은 데 지나지 않는 것이어서 거기서는 새것을 만들어내기에는 너무 얌전하고 무기력한 인간들이 주로 배출된다. 옛 세대를 위해서는 편리하고 안정된 질서가 세워졌다는 의미에서 자랑이 될지 모르나 거기에 새 세대는 없다. 그것은 구세대의 연장일 것뿐이다. 동양사 반만 년이 그 비슷한 것이었고, 이조 500년이 그 방향을 걸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온전히 ‘노인문화’로 늙어서 앉아 뭉개다 죽은 것이었다.

우리나라, 우리 교회에서의 보수 기호증이란 이 ‘노인문화’의 찌꺼기다. 이것은 거의 무자비할 정도로 배격해야 한다. 더욱이 한국에 새로운 문화, 새로운 생활을 건설해야 할 개혁교회가 이제 선교 100년이 가까워 오는데도 밤낮 소위 정통신학을 고수한답시고 구태의연하여 새 세대는커녕 낡은 세대까지도 등지고 고정된 자기 울타리 속에 칩거하여 정와(井蛙)의 교만에 도취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경우에 새 세대의 반발이란 당연한 것이며, 또 그래야 한다. 나는 지금부터 50년 전, 20세가 될 때까지 기독교와는 아무 관련 없이 지냈다. 그러나 아홉 살 때부터 ‘구학(한문)’ 공부에 반발하여 ‘신학(학교공부)’을 찾아 뛰쳐나갔다. 누가 충동질해서가 아니라 그런 시대 감각이 소년, 청년들에게 육감으로 온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금부터 시작하여 미래에 퍼져나갈 시대 감각이란 지금의 청소년들에게 저절로 득감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미 굳어진 구세대에게는 그것이 저절로 느껴지지를 않는다. 그렇지만 구세대에게는 모든 과거를 일관하여 얻어진 어느 정도 불변의 원리라는 것이 깨달아져 있으며, 그것이 경험으로 신념화해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것은 새 세대에도 전달되어야 한다. 변하는 새 세대라 할지라도 일정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일정한 ‘놈(Norm)’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놈’이란 것이 절대적일 수는 없다 할지라도 그것이 오랜 과거를 일관하여 가치기준으로 되어온 것이라면 그만큼 불변의 가치를 인정해 주어도 무방한 것이 아닐까? 아주 새로이 출발한다 할지라도 결국 해가노라면 “역시 그 말이 옳았구나!”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어 불필요한 낭비를 자백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윤리규범이란 원시시대로부터의 가장 낫다고 인정된 인간관계를 온갖 쓰라린 경험을 통하여 깨닫고 전승한 총화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변하는 새 시대에 온전히 그대로 적용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마치 언어가 시대를 따라 다소 변해지는 정도의 변화에 그치는 것이요, 근본에서부터 단절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젊은이들 도 자기들에게 감전되는 시대 의식에 너무 과히 몰입되는 것을 경계하고 그것을 비판, 취사하는 주입으로서의 지혜를 잃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말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천국을 위하여 훈련된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 주인과 같다.” 여기서 ‘천국’이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완전한 공동사회라고 비유한다면, 그것을 위하여 훈련받은 지도자는 ‘그 곳간’, 곧 자기 지식과 경험을 쌓아둔 ‘브레인과 문화권’ 속에서 그 모든 것, 말하자면 옛것이라고 귀중하게 간직했던 것, 새 것이라고 신기하게 여겨 수집했던 것을 꺼내야 한다. 꺼낸다는 것은 일단 객관적으로 비판하고 어떤 일관된 목적의식에 따라 정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런 일은 주체성 없이는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집 주인’과 같다고 말한 것이다. 예수는 유대인으로서 유대의 문화를 전승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그 근본에서부터 비판했다.

사람들은 그가 과거의 가장 귀중한 전승을 파기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극단의 보수주의자인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를 죽이려고 작정했다. 그러나 예수는 말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마 5:17) 과거를 완전하게 하는 새것, 이것이 건전한 전승이다.

우리나라는 지금 옛것과 새것의 소용돌이 속에 맴돌고 있다. 종교도 다원적이고 생활양식과 사회습관도 다원적이다. 종교도 옛날부터의 불교, 유교 등등이 그대로 있으면서 기독교가 들어왔고, 그동안에 소위 신흥 종교란 것들도 생겨났다. 생활양식도 서양식, 재래식이 뒤섞였다. 사고방식도 옛것과 새것과 더 앞지른 새것 등등이 섞여 있다. 그런 것이 언제까지나 이런 대로 있을 수 없다. 이제 ‘집 주인’이 그 꺼내놓은 옛것과 새것을 하나의 시스템에서 각기 그 소재를 밝히고 한 목적 아래서 한 몸에 봉사할 수 있는 평가와 정돈의 과정을 밟아줘야 할 것이다.

각 지방에서 소위 민속 문화란 것도 차츰 발굴되고 있다. 국악도 이제는 음악 ‘프로퍼’에 끼어들려 하고 있다. 여러 종교들도 이 급속하게 변해가는 세계에서 자기들의 위치와 사명을 찾으려 하고 있다. 옛것과 새것의 집성에 의한 자신의 ‘인테그리티’를 모색하는 표징이라 하겠다.

사람들은 흔히 새것과 옛것을 가장 잘 통합시킨 나라로서 일본을 말한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서양화해서 서구 문명의 지점밖에 안된다는 평도 듣고 있는 것 같다. 우리 동양인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우리가 옛날부터 갖고 있던 문화를 옛것이라 하고 근대에 수입한 서구 문명을 새것이라 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에게 이 두 가지를 어떻게 한 주체 속에 제3의 새 것으로 소화시키느냐가 가장 중심되는 문제이다.

우리의 ‘근대화’가 하나의 인간 황폐를 가져오는 흉작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우리 젊은이들이 ‘세대차’를 말하면서 새것의 첨단을 걷는다고 자부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서양에서 이지러지도록 익어서 저절로 땅에 떨어지지 않을 수 없게 된 산업사회의 말기의 퇴폐를 흉내내는 것이 아닐까? 서양의 시궁창에서 풍겨오는 악취를 새 바람인 줄 알고 들이마시는 어리석음이 아니기를 바란다.

어쨌든 우리는 새것과 옛것의 어느 한 편도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 거짓 절대는 파멸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서로 자기를 버리지 않으면서 상대방을 이해하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하며 서로 비판하면서 건설하여 한 몸으로 성취시켜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용문사 계곡에 아직도 생생한 천년 묵은 은행나무의 거목을 기억하고 있다.

복음과 젊음

‘젊은이’를 인간의 생리적, 심리적 발달 과정에서 본다면, 젊은이 세대를 소년기까지 포함시켜 30세까지, 장년기를 40에서 60대까지, 노년기를 70 이상, 될 수 있으면 90대까지, 이렇게 30년을 한 세대로 치는 방식에 의하여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에 있어서 ‘젊은 세대’를 규정짓는다는 것은 그런 동일 연령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수명, 결혼, 생식, 노화 등등이 동시대에 비슷한 시기에 찾아온다는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공통의 역사적 운명을 짊어진다는 시대성, 환경성이 동시에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젊음의 기질은 이 역사적 환경에 대결하여 거기에 순응 또는 반항의 두 극으로 분화되어 그 젊음의 바탕을 온전히 다른 모습으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는 청년기는 인간의 자기 형성 기간을 의미해 왔다. 아직 세속의 물정에 더럽혀지지 않은 이상과 웅지(雄志)에 사는 시대, 미래의 ‘비전’에 불타서 그 실현 준비를 위하여 용감하게 행동하고 동지를 모아 군단을 만들고, 의에 용감하고 사랑에 작열하며 비겁이 없고 낙망을 모르는 사람, 생각이 거침없이 행동에 옮겨지고, 항상 전진하여 후퇴를 모르는 정열의 세대, 말하자면 급속한 성장 속에서 자기를 형성하는 생명약진의 계절이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젊음’을 이해하는 때, 우리는 복음의 전선에서 영원한 광망(光芒)을 남긴 용사들의 거의 전부가 젊은이들이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성경 창세기에 나타난, 족장시대의 완성된 인물이라는 요셉도 20대에 그 성격을 확립해서, 이집트 고관부인의 유혹을 거부하고 투옥되었으며, 모세가 이집트인과 항쟁을 개시한 것도 20대, 사무엘은 10대에 선발되었고, 군왕의 전형이라는 다윗도 10대에 사무엘에게서 왕위의 약속을 받았고, 그가 거인 골리앗과 대결하여 승리한 것도 10대 소년으로서였다.

지혜의 왕이라는 솔로몬도 젊은이로 두려워하며 위(位)에 올랐고, 예언자들도 거의가 청년기에 부름받았던 것이다. 이사야도 20대였을 것이고, 예레미야는 10대에 부름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아이어서 말할 줄을 모릅니다.” 하고, 그는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사양했다.(렘 1:6) 그리고 신약시대의 여명을 고한 세례자 요한도 30대 초기, 신약의 주인공 예수도 30을 넘을락말락한 청년이었다. 제자들도 대개가 예수와 동년배의 사람들이었고, 사도 바울도 그러했다. 공자도 ‘삼십이립(三十而立)’이라고 했으니, 30대에서 대업을 시작했던 모양이다. 특히 세례자 요한이 자기 뒤에 오는 예수에 대하여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하지 못할 인물이다. 나는 쇠해야 하겠고 그는 흥해야 한다.”(요한 1:27, 3:30)고 한 그 후배에 대한 겸허하고 기대에 찬 태도는 두고두고 배워야 할 놀라운 교훈이다.

그런데 물욕 중심으로 건설된 현 산업사회 속에서 자라난 청년들은 그 특징이 아주 달라졌다. 현대의 첨단을 걷는다는 그들은 우선 발랄한 창조적인 생명력을 느끼지 못한다. 소위 ‘젊은이 문화’라는 것을 보면, 무엇보다도 먼저 외적인 권위를 부정한다는 입장에서 기성질서나 전통적 관습에 반항하고 부모의 친권에 반항하고 전해진 온갖 ‘진리’라는 것을 일단 폐기한다는 심경에서 덮어놓고 부정적인 행동부터 취하려고 한다. 그러니까 신앙은 애당초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나 몰래 스며드는 복면의 권위, 말하자면 텔레비전, 라디오, 그것을 통하여 선전되는 유행, 광고 등에는 양같이 잘 순종한다. 주로 능동적인 창건보다도 수동적인 태세에서 고독, 불안, 열등감, 권태, 자기혐오, 희망 상실, 사회 불신, 무감동 등등의 마음 본새에 휘말려 허무를 씹으며 회색지대에서 자기를 고갈시키는 생활 감정에 산다. 의미 없는 생활이라면 서 그것을 단념하지 못하는 자기분노는 무궤도적인 발산을 강요하게 되어 섹스, 스피드, 강박, 노골적인 감각 표현, 새디즘적인 잔인, 반체제, 반사회적 행동 과시, 몽키 댄스 등의 난무에 의한 망아 등의 현상을 나타낸다. 만화 같은 것도 전에는 아이들이나 보는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지금은 보편화되었고, 차츰 만화나 그림밖에는 볼 기분이 생기지 않는 젊은 층이 늘어나서 이론적인 것은 질색이고, 오직 감각적인 것만을 신앙하여 연약한 독서력과 미숙한 사고력의 소유자로 멈춰버리는 일이 많아졌다.

학생운동 같은 것도 전에는 학술, 연구, 연극, 문학, 스포츠, 미개발 지역에 대한 계몽, 봉사 등을 그 주류로 삼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전체로서의 생활 문제가 주류로 되어 있으며, 따라서 사회, 정치 등 실생활 전체를 제적하는 과제에 직접 개입하는 것을 학생의 당연한 본분이라고 생각 하게 되었다. 우리 한국에서는 실정이 다르지만 서구나 일본에서의 소위 ‘학생 세력’이란 것은 하나의 생활양식으로 되어가고 있다.

그러면 이것이 건전한 자기 형성이나 더 훌륭한 미래사회 건설을 위한 정상 행위냐 하면 그런 것도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것보다도 삶의 무의미, 허무감에서 폭발하는 자기 분노의 발작이라는 것이 심리학자들의 대체적인 결론인 것 같다.

이런 것은 물론 젊은이들만의 잘못이랄 수가 없다. 그 대부분이 기성사회의 영향에서 오는 것이다. 인간소외의 실제, 급변하는 사회와 그에 따르는 극심한 모순, 가치관의 다양화와 그 무지향성에서 각인각법(各人各法)의 불가피성, 매스컴의 너무나 다양 광범한 정보 제공에서 오는 선택의 혼미와 즉흥적인 모방, 상업주의자들의 무책임한 매매제일 행위 등등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회의 잘못은 많고 크다.

우리나라에서는 타율성이 강하기 때문에 청년문화란 것이 좌절되어 있다. 그러나 제 육감으로 받아들이는 젊은이들의 마음의 ‘안테나’는 결코 둔하기만 한 것 같지가 않다. 흥미에 있어서 재즈, 팝송, 기타, 그룹사운드, 리듬 앤 블루스 등이 아니면 시시하게 여겨지는 경향이라든지, 가치관에 있어서 다원, 상대, 통합, 불요(不要), 이질 관용 등의 경향, 제 멋대로 하려는 태도, 이성 관계에서의 자유 개방, 장발(요새는 취체대상이 됐지만), 파격적인 복장, 젊은 층에서의 독특한 용어, 또는 속어 등등이 벌써 낙후고립만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살펴볼 때, 그 주류가 감각 경험에 치우쳐 반지적인 방향으로 달리며 가치다원성은 분리주의를 조장하여 연대의식을 말살하고, 외적 권위에의 무조건 반발은 자기중심적인 생활에 농성하는 결과를 가져오면서 동시에 자아의 연약성을 절감하게 되어 결국에는 무기력한 안일주의에 귀착하게 된다.

그러나 현대의 젊은이에게는 전에 보기 드물던 장점도 많다. 젊은이가 모조리 허무에 잠긴 것은 아니다. 적극적으로 합리성을 찾고 당당하게 자기를 주장하고 용감하게 행동을 취하는 등등의 자질이 자라나고 있다. 권위에 대한 것도 에릭 프롬이 지적한 대로 합리적인 권위와 비합리적인 권위와를 분간하여 건전한 민주질서를 유지하려 한다. 위에서 말한, 허무와 좌절에 시달리는 대부분의 현대 청년은 ‘젊은이’의 상징이라기보다도 유행성 질환에 걸려 그 젊음을 상실해가는 생태라 하겠다. 그러므로 그들은 허약, 노쇠에 가까운 생명이요, 약동하는 젊은 생명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그들의 젊음이 되찾아지도록 격려하며 지원해야 한다. 그리고 건전한 젊은이들은 더욱 활발한 자기형성에로 매진하게 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복음의 능력이 그들의 생명 속에 심어지는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원래 기독교란 생명의 종교, 생활의 종교, 생활 건설의 종교, 살리는 종교로 시종일관되어 있다. 성경의 맨 처음 구절이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있는 것을 더욱 풍성하게 있게 하는 창조주를 믿는다는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땅에 충만하라.”는 것이 신의 축복이었다. 그런 영원한 삶의 고장에 죽음이 개입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죄악적인 것이요, 인간성의 타락상이요, 변태적인 것이라 했다. 그래서 이 파괴적인 죽음의 세력을 극복하고 영원한 생명을 회복하는 것이 속량이요, 구원이라는 것이다. 죽음 앞에 좌절, 낙망하는 인간이 아니라, “죽음아, 네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하고 대결하여 죽음이 생명에 삼킨바 되게 하는 삶을 선포하는 것이 속량주 그리스도 신앙이다. 창조주 신앙의 삶에서 신앙을 살고 속량주 신앙에서 살리는 신앙을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살리기 위한 의지 때문에 자기를 십자가에 죽였다. 그러나 그 죽음은 삶의 종지부가 아니라, 더 큰 삶의 씨앗이 되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묻혀서 백 배, 천 배의 열매로 재생한다. 십자가의 후주(後奏)는 부활의 전주(前奏)였다. 부활은 영원한 삶의 표징이다. 퇴폐한 황무지에 주저앉아 죽음을 영탄(詠嘆)하는 무기력한 인간이 아니라, 신의 의와 사랑으로 역사를 변신하기 위하여 죽음을 짓밟고 삶에로 추진하는 젊음의 인간인 것이다.

조선 말기의 독립협회 시대로부터 일제 중엽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애국지사의 상징으로 우러러보던 이상재 선생은 늘상 YMCA에 나와서 젊은이들과 어울려 지냈다. 그의 농담은 고매했다. 80세 고령이었지만, 젊음이 퇴색된 흔적은 없었다. 젊은이들은 그를 늙은이라고 느끼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그를 자기들과 똑같은 젊은이라고 느낄 수도 없었다. 젊은이들이 높이 쳐다보는 젊은이였다. 젊음은 연령보다도 체질에 있다. 현대의 노화한 체질의 젊은 층은 그 체질 자체부터 젊어져야 하겠다.

사회 환경이 이렇게 매스컴이 이렇고, 모두가 짜증나는 것뿐인데, 그런 설교가 무슨 소용이냐고 대들 것도 짐작이 간다. 그러나 그것 역시 피동화, 기계화한 심리 상태에서 스스로의 주체성을 미리부터 포기하고 드는 패배의식의 표현이라 하겠다. 사람이란 죽음의 최후 순간에도 생각만 고쳐먹으면 그에 대한 세계가 온전히 뒤집히는 법이다. ‘맘먹기에 달렸다’는 것이 인간의 최후 순간까지 간직되는 선택의 특권이다. 복음 안에서 젊은이들이 참 젊음을 발견하여 모든 젊은이들의 가슴에서 생수가 강같이 흘러넘치는 인간상을 만들어간다는 것이 미래 건설의 중심 과제일 것이다.

첫 크리스마스 사건들 - 상징으로 본 명상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날이다. 이 신화적인 사건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크리스마스 얘기는 서술적인 것보다 상징적인 것으로 음미하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까울 것 같다.

1) 그는 객지의 마구간에서 났다. 그리고 천으로 싸서 구유에 누였다(눅 2:6~7)고 했다. 지금 인간은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것이 거의 세계적인 현상이다. 그래서 모두가 비인간화니 인간화니 하는 문제를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다. 물건과 권력 중심의 생활은 가축 인간의 마구간 같은 세계를 만든다. 그러나 그런 고장에 그리스도는 탄생한다. 그런 고장을 찾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와 만나게 된다.

2) 여관에는 방이 없었기 때문이라 했다. 우리 사회는 혁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모든 방은 기성질서로 점령되어 있다. 모든 기성세력은 그것이 동요될까 봐 자기와 자기 주변의 껍질을 굳게 한다. 그 조개껍질은 새것을 모험할 성질의 것이 못 된다. 그래서 새로운 역사는 언제나 십자가를 동반하는 것이다.

3) 큰 별이 나타났다. 예수는 기원전 4년에 탄생했을 것이라고들 한다. 역서(曆書)를 개혁한 디오니시어스 엑시쿼스가 예수의 탄생을 로마건국 753년으로 판정했다. 그런데 헤롯대왕이 죽은 해는 749년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기원전 4년에 해당한다. 그리고 누가복음에 기록된 호구조사는 747년에 된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렇다면 기원전 6년이 된다. 그러니까 예수가 헤롯대왕 말년에 났다면 기원전 4년 사이의 어느 해에 태어났다는 것이 근대학자들의 일반적인 합의점이며 기원전 4년 이후는 아닌 것으로 되어 있다.

그동안에 두 유성이 겹으로 놓여서 새로운 큰 별의 출현이라고 할만한 때가 있었다고도 하지만, 그런 것을 따져서 거기에 큰 의미가 있을 것은 못 된다. 물론 당시는 점성술이 통하는 시대였으므로 어떤 역사적 이변이나 거인의 출현 또는 서거에 있어서는 천상의 별들에도 이변이 있어서 지상의 역사적 사건과 호응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때에는 동 서양을 막론하고 그러했으므로 인간 역사를 신국으로 변혁시킬 구세주의 탄생에 별의 징조가 없을 리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 거의 상식화된 얘기였을 것이다. 성서의 동방박사란 아라비아 방면의 점성학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점성술의 시대가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과 별과의 관계는 하나의 동화에서나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별의 시대’가 온 것이다. 전에는 인간이 지구의 시대에 살고 있었다. 땅이 바다 위에 머물고 하늘은 유리 천장 같은 ‘라키매흐’로 ‘또옴’이 되었는데 등잔을 달듯이 해와 달과 별들을 달아 땅을 비취게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지금 그렇게 믿는 사람은 적어도 지식인 가운데에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지구는 태양계 가운데에 있는 작은 별이다. 인간은 지금 우주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벌써 달에는 두 번이나 갔다 왔다. 우주개발이란 결국 별들의 개발을 의미한다. 별들은 그렇게 자질구레한 것들만이 아니라, ‘붉은 거인’이라는 별은 그 직경이 태양의 450배나 된다고 한다. 어떤 별은 태양의 30만배 광을 낸다고 한다. 어쨌든 우리는 지금 우리의 관심을 별 의 세계에 옮기고 있으며, 벌써 지구에 국한된 존재만으로서 인간은 아닌 것으로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이제부터 별과 인간의 시대에 살아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별의 세계가 아무리 가없이 넓고 크다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이 있으므로 비로소 종합된 의미를 갖는 것이다. 달의 억년 묵은 흙과 돌, 분화구들, 그것은 그것들을 관찰하고 연대를 정하고 의미를 발견하고 하는 인간을 만나기 전에는 스스로의 위치와 의미를 드러내지 못했다. 별이 동방박사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했다는 것은 그리스도, 참인간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별과 그의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뭇자녀들이 나타남을 볼 수 있게 되었고, 허무에의 종속에서 해방될 시점에 이르렀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라 하겠다.(롬 8:19~22) 지금 이 ‘별의 시대’, 우주의 시대에 있어서도 그리스도, 참인간과의 관계에서만 우주와 인간이 바른 이해와 바른 메시지를 갖고 진화의 첨단을 지향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4) 천군, 천사의 찬가. 그리스도의 탄생은 수직과 평면이 교차된 십자가적인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수직), 인간과 인간(평면)의 두 선이 교차된 한 점에 예수가 탄생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에게 평화’, 두 차원이 한 인간의 탄생점에서 찬가가 되어 울려온 것이다.

5) 목자의 경배. 이제 새 시대가 탄생한다. 그것은 제사장의 시대도 예언자의 시대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시대는 목자의 시대다.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요 10:11)고 예수는 친히 말씀하셨다. 불의와 불신앙과 부패와 악정을 규탄하고 심판을 선언함으로써 그 주요 사명을 다했다고 자타가 공인하던 예언자의 시대는 지났다. 과거의 전통이라는 상징 위에 율법과 의례와 고정된 권위를 입혀놓고 민중의 종교심을 이용하여 그들과 신과의 사이에 중개자로서의 특권층을 설정하고 그 특권을 자기들이 독점했던 제사장의 시대도 지나갔다. 그런 관제 종교가들, 직업 종교인들의 시대는 예수의 오심과 함께 그 존재 근거 와 존재 이유를 잃어버린 것이다. 예수는 이런 소위 ‘종교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제부터는 조직체도, 제도도, 교권도 인간을 억압할 수 없는, 다만 목자와 양과의 관계, 요샛말로 한다면 인간 대 인간관계에서 몸으로 봉사하고 사랑으로 목숨 거는 자유로운 목회자의 시대가 온 것이다. 불의와 부정을 규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사랑으로 그것을 변화시켜 바르고 새롭게 하는 일을 한다. 무지한 대중을 가르치고 깨우치고 고치고 길러서 거기서 새롭고 참된 인간상을 만들어내는 일을 한다. 불의를 규탄하는 것은 암흑을 찢고 번쩍 화살같이 빛났다가 사라지는 번갯불이랄까! 끈덕지게 전체를 덮고 있는 암운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구름 속이 아니라, 이 땅 위에서, 예수는 상실된 인간들의 어두운 생활 속에 파고들어 그들의 목자가 되어 그 생활 하나하나를 갱신시키는 인간성 혁신 운동을 시작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제단에 그의 피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아낌없이 부었다. 우리는 여기서 고요한, 그러나 확실한 인간화 운동을 본다.

예언자는 몇 세기에 한두 사람 나타나도 될는지 모르지만 목자는 그럴 수가 없다. 목자는 언제 어디서나 필요하며, 그 수가 많을수록 좋다. 잃어버린 인간이 많으면 많은 만큼 그것을 찾기 위한 목자의 수도 많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직업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목자를 말함이 아니 다. 그것은 목자가 아니라 삯꾼이라고 했다.(요 10:12)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새로 전개되는 목자의 시대에 그 목자장의 탄생을 목자들이 맨 처음으로 찾아와 경배했다는 설화를 대견하게 여긴다.

6) 동방박사들이 찾아와 선물을 드렸다는 것이다.(마 2:1~11) 이 사람들은 이방인이다. 그들은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도 아니다. 그들은 하늘의 별과 땅의 역사를 관찰하면서 인류의 운명을 이해해 보려고 애쓰는 지성인이며, 진리 탐구자들이다. 그들은 새 역사의 건설을 위한 참인간의 탄생을 예견하고 먼 길을 걸어 헤롯왕을 찾았다. 그러나 예수의 조국을 맡은 헤롯왕은 첫 크리스마스를 알지도 못했고, 기뻐하지도 않았다. 그는 탄생한 어린이의 적이었다. 그래도 박사들은 아기 예수를 찾아갈 수 있었다. ‘별이 인도했다’고 쓰여 있다. 인간의 악의를 넘어 전진하는 신의 뜻이 때로는 밝히 드러난다.

지금 전 세계 30억 인간들은 ‘참인간’의 나타남을 갈망하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의식하든 못하든 간에 그 마음의 밑바닥에서 절규한다. “그리스도를 그리스도 교회 안에 유폐시키지 말고 모든 비참과 암흑 속에서 신음하는 인간들에게 보내 달라!”고. 지금 세계사는 그리스도라는 한 ‘참인간’을 원추형의 정점으로 삼고 하나로 모여들려 한다. 그래서 그 화살 끝이 뚫고 나가는 대로 따라가려 한다. 발을 걸어 넘기고 매어 달고 가두고 하는 등등 방해공작들 때문에 인간은 고민하는 것뿐이다. 전 인류가 각기 자기들의 선물을 갖고 그리스도에게로 오는 시대가 가까워지고 있다.

7) 헤롯왕이 아이들을 죽였다.(마 2:16) 동방박사들은 그리 고지식하지 않았다. 헤롯의 악의를 이루어줄 생각은 없었다. 그들은 아기 예수의 거소를 헤롯에게 알리지 않고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갔다. 헤롯은 당황해서 베들레헴 마을의 한두 살 난 갓난 애기들을 모조리 학살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인간의 구원자인 경우에 인간을 자기 가축이나 밥으로 여겨 매사에 달달 볶아대는 악한 집권자들이 이에 반발할 것은 물론이다. 하나님의 의가 선포되는 때, 불의에의 항거는 반드시 생겨난다. 이런 경우에 이미 터를 닦아놓은 암흑의 세력은 자기 집권을 항구화하기 위하여 거의 무한전술을 쓴다.

지금 우리 교회는 이상한 딜레마에 걸려 있다. 안일과 무사주의로 박해나 고난 없는, 영광만의 기독교가 당연한 것인 줄 여기면서 입으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찬양한다는 그것이다. 십자가는 두 가지가 아니다. 그것은 고난과 죽음의 현실인 것뿐이다. 영광과 찬양의 십자가란 고생하기 싫은 신자들이 만들어 입힌 자위용 의복인 것이다. “너희는 각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한 것은 고난과 죽음을 각오하고 따르라는 말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의 고민을 그 내용으로 한 것이다. 그것은 쓴잔이었다. 예수가 예수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셔야 할 쓴잔이었다. 우리가 참인간으로 형성되려 할 때, 헤롯의 살벌한 손이 움직일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각오 없이 크리스찬일 수가 없다. 그러나 아기 예수는 결국 헤롯의 손에 죽고 만 것이 아니었다.

교회는 고난을 통과하면서 자기를 세워가며 전진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제 우리는 첫 크리스마스에서 명암 양면을 본다. 하늘이 열리고 천군 천사가 노래하고 별 따라 학자들이 오고 목자들의 경배가 있고……. 밝고 평화로운 영광스런 장면이다. 그러나 암흑면이 동시에 온다. 목자도 학자들도 흩어지고 아기 예수에게는 헤롯의 칼이 겨눠진다. 짐승들 마구간에, 침대가 아닌 구유에 누인 가엾은 아기에게 살인자의 칼끝이 노리고 있는 것이다.

그의 생애는 30년 계속됐다. 그러나 시종 이런 긴장 속에서 전진했다. 그의 인간애는 십자가 위에서 몸으로 폭발했다. 그의 시신을 둔 무덤도 터졌다. 20세기가 지난 오늘 전 세계는 그의 방향으로 흘러들고 있다. 마치 모든 강물이 바다에 흘러들 듯이, 크리스마스는 진정 위대한 계절이다. 인간 역사에 새 차원의 세계가 돌입하여 낡은 역사를 변질시켜 진정 인간다운 인간 역사를 빚어가는 참인간, 새 인간, 새 인류의 시조, 둘째 아담이 우리에게 오신 날, 지금도 오시고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댓글 1개:

  1. 이 글의 제목은 "신앙생활에서 생활신앙에로'이지만... 그 속에는 몇 개의 독립된 주제가 포함되어 있다.

    '새 것과 옛 것'
    '복음과 젊음'
    '첫 크리스마스 사건들 - 상징으로 본 명상'

    이 글들은... 장공 김재준 목사가 성경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명상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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