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9일 수요일

[0723] 신학사상과 신학교육 - 1965년 5월

神學 思想과 神學 敎育


「기독교사상」1965년 5월

近來(근래) 세계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급속하게 변천하는 중에 있으므로 소위 基督敎王國(기독교왕국)이라던 歐美諸國(구미제국)에 있어서도 ‘Post-Christian Era’라는 稱號(칭호)가 사실일 정도로 불안하게 되었으며 아시아, 아프리카 등 諸國家(제국가)에는 소위 포스트 식민시대‘(Post-Colonial Era)라는 의미에서 變轉無變(변전무변)한 情況(정황)이 속출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 기독교가 존속할 뿐 아니라 未來世界建設(미래세계건설)의 역할을 담당하려면 우선 철저한 自己批判(자기비판)과 아울러 自家(자가) 정돈에 용감해야 할 것이며 동시에 변하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그 속에서 빛과 소금과 누룩의 구실을 담당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크리스찬 思考(사고)와 行爲(행위)가 傳統的(전통적)이요 反復的(반복적)인 데에 안심할 수가 없게 됨과 동시에 온갖 事爲에 신학적인 再設明(재설명)을 요청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神學敎育(신학교육)자체가 근본적인 再檢討(재검토)와 更新(갱신)을 요하게 된다.

(1) 韓國敎會傳來(한국교육전래)의 神學敎育(신학교육)

한국에서는 庶民層(서민층)에 기독교가 盛(성)하였으므로 敎人數(교인수)가 激增(격증)함과 동시에 敎會數(교회수)가 많아지고 그 교회들을 건사할 敎投者(교역자)는 부족했기 때문에 신학 교육은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를 專門的(전문적)으로 맡아 볼 수 있는 교역자를 될 수 있는 대로 속히 또 많이 産出(산출)하는 것을 목표로 했었다. 그러므로 신학교육의 방향은 무엇보다도 먼저 敎會(교회)였으며, 거기서 傳授(전수)하는 神學思想(신학사상)이란 것은 소위 正統主義神學(정통주의신학)이라는 固定的(고정적)이요 物相化(물상화)한 條文(조문)들이었고, 그 傳授方法(전수방법)은 注入式(주입식, indoctrination)이었다. 거기에는 비판이 없고 思想(사상)할 自由(자유)가 없었으므로 거기서 전수되는 것은 하나의 物件(물건)이요 인격적 決斷(결단)을 통한 ‘思想’(사상)일 수가 없었다.

이런 타이프의 신학 교육이 한국에서 半(반) 世紀(세기) 이상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한국 교인 자신들의 創案(창안)에서 된 것이 아니라 선교사들의 專權的(전권적)인 수입품이었으며, 기독교에 생소한 한국인으로서는 그것이 유일한 기독교 신학이요 사상인 줄만 알고 그 무비판적인 傳授(전수)에 충실했던 것 뿐이다. 따라서 그 신학교육은 철저한 ‘敎派的’(교파적)인 신학이며 自敎派(자교파) 이외에 대한 관심은 전혀 무용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파의 敎權(교권)에 얽매여 있다는 의미에서 ‘총회신학교’이기도 했다. 自敎派(자교파) 變證(변증)을 위한 도구로서의 잔 그릇(小器)들이 귀염둥이로 재롱을 부리는 고장이기도 했다.

이런 神學敎(신학교)가 단 하나만 허용되었고, 그 神學敎(신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는 人間(인간)은 그 창설자들의 神學(신학)에 일획도 다른 것이 없도록 예정된 인간들 만이었으므로 歲月(세월)과 함께 하나의 特權者(특권자) 産出(산출) 機關(기관)으로 화해 갔다. 그래서 그 기관을 나온 사람은 교회에서 ‘聖職者’(성직자)로 구별되어 세상에 물들지 않은 ‘신령한’ 存在(존재)로 君臨(군림)하려 했다. 그들은 奉住者(봉사자)보다도 敎權者(교권자)로서 교회를 지배하려 한다. 그것이 더 露骨的(노골적)으로 되면 교회는 그들의 職場(직장)으로 되고 교회 기관들은 그들의 敎權(교권) 각축장으로 화한다.

한국 교회에서의 신학 교육은 교회를 담임할 專任敎投者(전임교역자)를 양성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아주 틀에 박힌 單調化(단조화)한 교육이었다. 세상은 俗(속)되고 惡(악)한 將亡城(장망성)이니까, 그것을 상대로 構想(구상)할 필요는 없다. 聖經(성경)은 文字(문자) 그대로 정확 무오한 天來(천래)의 말씀이니까 이러니 저러니 비판할 여지가 없다. 교회는 세상에서 구별된 거룩한 기관이며 교회를 治理(치리)하는 성직자는 거룩하니 세상과 짝하지 않는다. 그는 교회 안에 들어온 교인들을 다시 세상에 뺏기지 않기 위하여 각별히 건사하고 世上(세상)에서 죄인을 단 한 사람씩이라도 끄집어 내어 교회 안에 들어오게 하기 위하여 ‘예수 믿으라’고 외치는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 ‘타이프’의 교역자를 양성하기 위한 神學(신학)교육에는 多樣的(다양적)인 교과목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이 固定(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2) 신학교육을 위한 신학적 再檢討(재검토)

序論(서론)에서 말한 바와 같이 戰後歐美(전후구미)세계와 戰後新興國家(전후신흥국가)들의 급격한 변모는 여하한 固定主義(고정주의)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 나라에서도 中世紀(중세기)나 日帝下植民地時代(일제하식민지시대)에는 固定主義(고정주의)로도 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에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그러므로 解放後(해방후)부터는 우리 신학 교육의 更新(갱신)을 위한 苦投(고투)가 계속되었으며 이에 몰이해한 固定主義者(고정주의자)들에 의하여 교파의 분열은 조장되었다. 그러나 聖靈(성령)은 全世界(전세계) 교회를 그의 뜻안에서 인도하신다. 한국교회도 더 오래 성령에 역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새 世代(세대)를 맞이하는 신학 교육의 신학적 재검토가 試圖(시도)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섬기는 일(ministry)과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올리는 일을 위하여 성도들을 裝備(장비)시키기 위함이니라. 그리하여 우리가 다 믿음의 일치와 하나님의 아들의 지식을 얻어 성숙한 인간으로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stature)에까지 이르고자 함이라. 이는 이제부터 우리는 사람들의 교활함과 교묘한 속임수에 빠져 교리의 각양 풍조에 이리저리 밀려 다니는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려 함이니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됨을 말하여 모든 데에 우리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려 함이니, 그로부터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어 연결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를 따라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그 자신을 세우느리라”(엡 4:12-16, 필자 자유역).

신학 교육을 신학적으로 규정하기 위한 가장 적합한 성경 본문으로서는 아마도 以上(이상)에 기록한 바울 서한을 넘을 귀절이 없을 것 같다.

여기서 우리는 신학 교육이 ‘크리스찬 봉사’(ministry)를 위한 裝備過程(장비과정)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神學’(신학)도 學問(학문)이니만큼 神學敎育(신학교육)에 있어서 學問的(학문적)인 誠實性성실성(integrity)과 優秀性(excellence)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신학 교육에서 Academic excellence, 즉 學的(학적) 우월만을 노린다는 것은 위험한 不均衡(불균형)을 招來(초래)한다. 거기에는 ‘ministry’를 위한 訓練(훈련)이 重要部門(중요부문)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에 대한 봉사, 즉 ‘ministry’냐 하고 묻는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主(주)님에 대한 奉任(봉사)를 위하여’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크리스찬 미니스트리’는 그리스도론적인 것이어야 한다. 교회를 위한 奉仕(봉사), 즉 敎會論的(교회론적)인 ‘미니스트리’는 그리스도論的(론적)인 데서 抽出(추출)된 第二義的(제이의적)인 것이다. 그리스도 지식, 그리스도 신앙, 그리스도의 몸 造成(조성), 그리고 그리스도 이메지 또는 stature가 각 신자의 성격에 그 장성한 데까지 이루어지게 하기 위한 준비 공작이 곧 神學(신학)교육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ministry의 主(주)는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인 것이다. 組織(조직)교회 안에서 職場(직장)을 확보하기 위한 職業學校(직업학교)로서의 미니스트리 훈련만은 아닌 것이다.

더우기 어떤 特權的(특권적)인 聖階級者(성계급자)를 만들어 내기 위한 特定(특정) 기관일 수도 없다. 따라서 신학 교육은 어떤 聖別(성별)된 特定人(특정인)을 위한 특수 교육 기관이라기 보다도 전체로서의 교회 전체로서의 교언을 위한 교육 기관이란 것이 本來(본래)의 意味(의미)였다고 생각 된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4장에서 말한 ‘성도들’ 또는 ‘우리’라는 것은 모든 크리스찬을 말함이었다. 땅으로 내려오셨던 그리스도, 하늘로 올라가신 그리스도, 즉 그의 生(생)과 死(사)와 復活(부활)을 통하여 신도에게 주어진 名樣(각양) 恩賜(은사, 카리스마)를 정확한 그리스도 지식과 그의 모습에 따라 德(덕)스럽게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결국에는 萬有(만유)가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는 것이다(엠 4:7-21).

그렇다고 조직 교회가 存續(존속)하는 한 有能(유능)한 지도자를 양성 供給(공급)하는 일을 중단할 수는 없을 것이므로 ‘Set apart ministry’ 또는 ‘Special ministry’를 위한 특수신학 교육은 여전히 存續(존속)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신학 교육이 이 少數敎職者(소수교직자)양성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교회 전체를 위한 교육이라는 것을 그 根元的(근원적)인 데서 자각한다면 그 신학교육의 樣相(양상)과 범위가 現存(현존)의 그것과는 온전히 다른 것으로 발전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看過(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신학 교육이 전체로서의 교회의 교육에 책임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전체로서의 교회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ministry가 무엇이며 그 무게가 어떠한 것임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시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7-21).

사도 바울의 논리대로 한다면, 교회는 歷史(역사)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인데, 그 몸의 지체들은 우리 교인들이요. 그 폼의 머리는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타락했던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인간성을 회복한 ‘처음 익은 열매’요 새로운 被造物(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이 새로운 피조물인 교회는 歷史(역사)안에서 그리스도가 唯一回的(유일회적)으로 성취한 和解(화해)와 贖良(속량)의 ministry를 증거하고 또 和睦(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맡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ministry는 聖子(성자)안에 있는 聖父(성부)가 聖靈(성령)을 통하여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하여 섬기는 ministry인 것이다.

이것을 증거하며 이 화목하게 하는 직책, 즉 하나님과 사람들,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에 和睦(화목)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한 직책을 맡은 것이 교회라는 것이다. 모든 교인들을 肢體(지체)로 한 全體(전체)로서의 교회가 이 그리스도의 ministry를 맡은 것이므로 그리스도교的(적) ministry는 全體(전체)로서 교회가 지는 것이며 Special ministry는 이 전체로서의 교회 안에서의 한 特秀奉仕(특수봉사)를 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 교육의 主要(주요)과제가 Ministry를 위한 訓鍊(훈련)이라면 그 敎育任務(교육임무)의 범위는 우선 전체로서의 교회를 위한 교육이 아닐 수 없게 된다.

敎會(교회)의 ‘ministry’가 그리스도로부터 위탁 받은 그리스도 ministry의 傳承(전승)이라면, 그 특징은 그리스도 ‘ministry’의 特徵(특징) 그것이어야 할 것이다. 神學(신학)교육에서의 교육 目標(목표)는 그리스도像(상)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는 圓熟(원숙)한 人間造成(인간조성)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像(상)의 정확한 把握(파악)이 무엇보다도 必要(필요)하다. 그리스도는 (ㄱ) 하나님의 아들로서, ‘여호와의 종’(Ebed Yaweh, 이사야서)으로서 죽기까지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였다. 그의 하나님을 향한 섬김(ministry)은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는 속죄의 Liturgy였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고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한 것이었다. (ㄴ) 그리스도는 또한 사람들을 섬기는 종으로 일생을 지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人(인자)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 10:43-45) 하였으며,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하였다. 그는 ‘많은 사람’, 즉 세상을 섬기는 자로 삶과 죽음의 노정을 삼았다. 십자가는 하나님을 향하여는 속죄의 제물로 나타났으며, 세상을 향하여는 인간 봉사의 극치로 나타났다. 자기를 죽이는 자들에게까지 흔들리지 않는 사랑과 용서로 죽기까지 복종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요한의 설명은 이런 사건에서 얻은 불멸의 인상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그리스도의 ‘ministry’는 세상을 향한 봉사였다. (ㄷ) 그리스도는 소수의 선택된 제자들에게 봉사했다.“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고 했다. 숙식을 같이 하시며 밤낮 함께 지냈다. 그 중에서 선생을 판 배반자가 났으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고난의 언덕을 걸을 때 ‘멀리서’ 구경꾼처럼 따라온 제자들이었으나 부활 후 그는 그들을 일일이 찾아 모았다. 이 소수의 선택 받은 무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한 被選者(피선자)였던 것이다. 이것은 오순절 이후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봉사로 계속된 것이다. 통틀어 말한다면, 歷史(역사) 안에서의 그리스도像(상)은 ‘종으로서의 主(주)님’(Servant Lord)인 것이다. 하나님과 세상과 교회를 끝까지 섬기는 ‘受難(수난)의 종’, 그것이 우리가 닮아야 할 그리스도像(상)인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奴隸的’(노예적)인 것은 물론 아니다. 奴隸(노예) 道德(도덕)이란 노예로서 노예 노릇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그의 信徒(신도)는 하나님의 子女(자녀)로서 가장 철저한 自由人(자유인)이면서 自意(자의)로 봉사하는 종인 것이다. 말하자면 善(선)으로서 惡(악)을 메꿔 가는, 그리고 사랑과 용서로 和解(화해)의 證言者(증언자) 노릇하는 진정한 自由人(자유인)으로서의 자유하는 봉사자인 것이다. 强者意識(강자의식)에 사는 사람들은 自由(자유)를 가장한 奴隸(노예)라 할 것이나, 그리스도와 그의 追從者(추종자)는 그 반대의 인간들이다.

歷史(역사) 안에서의 그리스도像(상)이 그런 것이라면 歷史(역사)안에서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또한 그런 像(상)으로 存立(존립)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向(향)한 헌신과 예배, 세상을 향한 奉仕(봉사)와 和解(화해), 그리고 교회를 향한 鞭撻(편달)과 訓鍊(훈련), 교육과 牧會(목회), 이런 것들이 세상 안에 있어 세상을 위하여 봉사하는 교회의 모습일 것이다. 世上(세상)안에서 스스로의 진실을 태워 빛을 밝히며, 부패 속에 스스로를 녹여들어 소금이 되고 가루 속에 몰래 펴져 누룩 노릇하는 인간들, 그들이 곧 교회의 지체-교회 그것인 것이다. 신학 교육은 교회 전체를 위하여 이런 成果(성과)를 노리는 교육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특수 敎職者(교직자)양성을 위한 神學敎育(신학교육)의 所在(소재)는 어떠한가? 그 테두리 안에서 전체 교회가 종들이라면 그 종들의 종(Servant of the Servants)으로 有效(유효)하게 봉사하게 하기 위한 지도자 양성 프로그램인 것이다. 臺灣(대만)의 C, T, Whang 校長(교장)이 지적한 바와 같이 “世上(세상)안에서의 교회의 손에 맡겨진 3종의 직책은 不均衡(불균형)의 유혹에 不斷(부단)히 直面(직면)하게 된다. 하나님을 向(향)한 직책에서는 禮典的神秘主義(예전적 신비주의, Liturgical Mysticism)에 기울어지기 쉽고, 교회가 향한 직책에서는 祭司長的敎會主義(제사장적 교회주의, Priestly ecclesiasticism)에 빠지기 쉬우며, 世上(세상)을 向(향)한 직책에서는 社會的行動主義(사회적 행동주의, Social activism)에 흘러들기 쉽다”(p. 11). 그러므로 지혜롭고 유능한 교회지도자로서의 敎職者(교직자)가 輩出(배출)되어 교회로 하여금 교회 되게 건사해야 한다. 뉴비긴(Newbigin) 감독이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사람의 직책이란 아무리 직책도 아니게 되기 쉬운 까닭이다”(Anybody’s business may become nobody’s business).

(3) 神學敎育(신학교육)의 當面課題(당면과제)들

(a) 이상에서 시사한 바와 같이 神學敎育(신학교육)이 敎派的(교파적)인 데서 에큐메니칼한 데로 對決(대결)해야 할 立場(입장)에 있다. 그렇다고 敎派(교파)가 解消(해소)된 것이 아니며, 敎派(교파) 교회로서의 신학적 입장도 뚜렷한 바 있다. 특히 바울, 어거스틴, 루터, 칼빈, 바르트를 통하여 흘러내린 改革(개혁) 神學(신학)의 主流(주류)는 아직도 全世界敎會(전세계교회)의 神學的主潮(신학적주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학 교육에서 Academic integrity와 excellence를 유지하려면 이 academic한 神學硏究(신학연구)에서 後進性(후진성)을 甘受(감수)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동시에 ecumemical encounting을 회피해서는 안된다. 世界敎會(세계교회)의 진지하고 自由(자유)로운 神學的對話(신학적대화)에서 얻어지는 결론과 試圖(시도)에 언제나 同情的(동정적)인 協調(협조)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로서의 世界敎會(세계교회)에 대한 신학적 공헌이 있어야 한다. 뿐만아니라, 우리의 學問的(학문적)인 신학이 비록 世界神學界(세계신학계)의 그것에 比(비)하여 特出(특출)한 바가 없다 할지라도 그것이 외부로부터 注入(주입)되고 반복되는 의미에서의 신학이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自身(자신)의 思考(사고)와 決斷(결단)을 통하여 결론지어진 自身(자신)의 신학이어야 한다.

(b) 우리는 신학 교육이 교회로 直面(직면)하는 方向(방향)에서 세상을 向(향)한 방향에로 그 향방을 옮겨야 할 것을 시사했다. 이것은 결코 俗化(속화)나 無謀(무모)가 아니다. 戰鬪敎會(전투교회, Church militant)로서의 가장 悲莊(비장)한 宣敎運動(선교운동)인 것이다. 세상을 향하여 나팔 불기는 쉬워도 세상 속에 들어가 그들에게 사랑으로 종노릇하기는 지극히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몇 갑절의 신앙과 헌신을 요한다. 따라서 신학 교육이 單調(단조), 固定的(고정적)인 내용의 것일 수가 없게 된다. 세상의 生活分野(생활분야)가 多元的(다원적)인 것은 勿論(물론)이지만, 그 生活方途(생활방도)의 多樣性(다양성)에 있어서는 거의 混迷(혼미)할 지경이다. 교회의 어느 한 구석에 凍結(동결)된 인간으로서 이 複雜多端(복잡다단)한 世上(세상)과 應答(응답)을 교환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지금부터의 신학 교육은 거의 換骨脫態(환골탈퇴)할 정도로 多樣的(다양적)이며 自由型(자유형)일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봉급 받고 어느 한 교회를 담임하는 敎職者産出(교직자산출) 이외에 또는 그 이상으로 모든 종류의 평신도들을 그리스도 證人(증인)으로 訓練(훈련) 동원해야 하겠기 때문이다.

(c) 우리 Post-Colonia1 Era에 속하는 새로 독립된 나라들에 있어서는 Nation building의 과업이 또한 우리의 어깨에 지워져 있다. 全人口(전인구)의 4%정도 밖에 안되는 적은 集團(집단)으로서 Nation Building의 직책을 어떻게 수행할 것이냐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여기에는 크리스찬의 독특한 信仰生活(신앙생활)과 아울러 그 높은 倫理生活(윤리생활)이 살아 있어야 한다. 빛이니, 소금이니, 누룩이니 하는 것은 數量(수량)의 문제보다도 바탕의 문제다. 신학 교육과 함께 高潔(고결)하고 斷乎(단호)한 기독교적 倫理生活(윤리생활)이 訓鍊(훈련)되지 못한다면 Nation Building에서 우리의 使命(사명)은 거의 없어진다. 맛 잃은 소금의 운명 밖에 거둘 것이 없겠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 바울이 말한 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前提(전제)는 신학 교육의 모든 각도에서, 크리스찬 생활의 모든 순간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命題(명제)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 문화 속에 그리스도교를 土着化(토착화)하려 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새로운 被造物(피조물)로서의 바탕을 자각하지 못한 채로서는 極上(극상)했자 結슴主義(종합주의)를 넘지 못하게 된다.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나’인 한에서 禮拜(예배)도 ‘나’의 禮拜(예배)가 되고 성경도 ‘나’의 성경으로 되고 신학도 ‘나’의 신학으로 된다. 그리고 내가 접촉하는 우리 文化(문화)도 ‘나’의 文化(문화)로 섭취된다. 그것은 새로운 피조물인 ‘나’일 때에만 내가 참 ‘나’로 복음과 함께 설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교리’의 각양 풍조에 이리 저리 밀려다니는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고 성숙한 인간으로 그리스도의 長成(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려는 ‘새 인간’으로서의 主體性(주체성)을 행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宣敎(선교)의 Object로서가 아니라 宣敎(선교)하는 Subject로서 세상에 진출하는 것이다.

한국은 줄곧 中世紀的(중세기적)인 出閉社會(출폐사회)로 있었으며 기독교 神學(신학)도 이 出閉社會(출폐사회)에 適用(적용)되는 固定主義(고정주의)로 일관했었다. 신학 교육, 특히 장로 교회의 그것은 이 고정주의 一邊倒(일변도)로 강박해 왔었다. 그러나 日帝末期(일제말기)로 부터 解放以後(해방이후)를 이어 現代(현대)의 神學思湖(신학사조)는 怒濤(노도) 같이 밀려 들었다. 에큐메니칼 정신과 世界敎會運動(세계교회운동)도 한국교회 안에 누룩 같이 퍼지게 되었다. 신학과 성경 연구에서 自由(자유)로운 討議(토의)와 강의와 발표가 시도되고 있다. (아직 그렇지 못한 신학교육 기관도 있기는 하지만) 정확한 그리스도 知識(지식), 聖經(성경)과 교회 전통 안에서 具體化(구체화)한 기독교적 공동사회에 대한 지식, 그리고 現世界(현세계)에 대한 지식 - 이런 지식을 하나님나라 확장에 구사할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人間(인간)이 우리의 神學(신학)교육을 통하여 輩出(배출) 되기를 祈願(기원)한다.

〈參考書(참고서)〉

The purpose of the church and its ministry, by H. Richard Niebuhr (Reflections aims of the Theological Education, 1956)
The Advancement of Theological Education, by H. Richard Niebuhr (Danial Day Williams James M. Gustafsom 1957)
A Rethinking of Theological Training for the Ministry in the Younger Churches Today, by C. T. Whang,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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