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9일 수요일

[0716] 한국신학대학 25년 회고 - 1965년

《신학연구》(1965년)

한국신학대학 25년 회고


한국신학대학 25년은 난항의 역사였다. 공적인 기록들에 의한 역사는 어느 사학도의 손에서 되어질 것이다. 마치 ‘낙수(落穗)’같이 어디선가 흘려진 하찮은 얘기들은 일부러 줍는 사람 없이는 후에 남지 못할 것이기 에 나는 이번에 이 방향에서 숨은 얘기들을 모아 하나의 ‘전등잡기(剪燈雜記)’ 식으로 엮어 볼까 한다. 보고 들은 것이 나 자신이기 때문에 저절로 내 얘기가 끼어드는 데 대해서는 독자의 소납(笑納)을 바란다.

만주의 산하에는 아직도 봄이 먼 것 같았다. 겨우내 온 눈이 깔축없이 남아 있어 몹시 차가웠다. 1939년 3월 27일 나는 용정 은진중학교 교목으로 있으면서 예기한 바 없는 전보를 받았다. 신학교 창립준비위원회가 모이니 서울로 곧 올라오라는 전보였다. 마침 입학시험 중이어서 나는 못 간다는 회전(回電)을 보냈다. 그러고서 석 달쯤 지낸 1939년 6월 8일에 김대현 장로님께서 금 30만 원(25만 불)을 신학교 기금으로 바쳤다는 통지를 송창근 형으로부터 받고 곧 김대현 장로님께 감사의 전보를 보냈다. 그 후 5일 만인 6월 13일 채필근 목사로부터 ‘조선신학교 설립 개요서’가 왔다. 그 당시로 말하면 조선신학교 설립 기성회가 전국적으로 조직되고, 거기서 ‘창립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위원회에서 김대현 장로님의 기부 승낙을 받았으며, 그 위원회의 회장이 채필근 목사님, 실무를 맡은 이가 송창근 목사님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송 형은 그 당시 흥사단(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입건, 보석 중이어서 사회활동이 부자유했기 때문에 그 신학교 설립 사무를 그만두고 만주 무순교회 목사로 갈 생각이라는 편지를 내게 보내 왔다. 나는 좀 더 계속하라고 격려의 전보를 보냈다. 그것이 1939년 7월 13일의 일이다. 19일에 송 형으로부터 계속 시무 결정의 회전이 왔다. 그리고 1939년 7월 26일부로 김대현 장로님으로부터 나에게 보낸 서한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으나 나는 받지 못했다. (나에게 전해지지 못하고 반송된 것이 지금 그 댁에 보관되어 있다.) 내가 올라와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라고 송 형으로부터 수차 편지가 왔다. 하기방학이 되자 나는 서울, 평양 등지를 역방(歷訪)할 계획으로 여로에 올랐다. 8월 1일에 용정을 떠나 2일에 서울 도착, 3일에 김대현 장로님을 방문, 8월 6일에 나의 학우인 김영환 씨와 한강 보트 위에서 세 시간 한담하며 모든 형편을 들었다. 그리고 평양, 황주, 함흥, 서호 등지를 찾아 구우(舊友)들을 만나고 8월 15일에 용정에 돌아왔다.

총독부에서는 설립 인가 신청만 내면 곧 인가해 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학교를 설립하면서 교회 총회의 인가 없이 총독부 인가부터 먼저 받는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서 총회 때까지 인가 신청을 보류하기로 한 것이었다. 총회는 9월에 평양에서 열린다는 것이다. 1939년 9월 18일에 나는 총회에서 평양신학교를 직영으로 하여 급히 문을 열기로 하고 조선 신학교(한신대)는 당국으로부터 설립 인가를 받을 수 있거든 해보라는 정도로 인허 아닌 인허를 내렸다는 소식을 전문(傳聞)했다. 그리고 이틀 만인 9월 23일에 나는 ‘조선신학 교수로 초청 지급 상경’이라는 전보를 받았다. 그때 벌써 송 형은 김천 황금정교회로 떠난 후여서 신학교 설립을 위한 실무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급히 서두른 것이었다. 나는 9월 25일에 은진을 사임하고 26일에 거기를 떠나 28일에 서울 도착, 29일에 김대현 장로님 방문, 10월 13일부터 신학교 설립 사무에 착수했다.

이때는 평양신학교 설립 인가 신청과 조선신학교의 그것이 함께 총독부에 제출된 때였으며, 평양신학교는 평남도지사가 적극 지원 중이었고 조선신학교는 총독부로서의 선약이 있었기 때문에 총독부로서는 몹시 난처한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루머도 구구했다. 평양에 인가 난 다는 말, 서울이 유리하다는 말, 둘 다 인가한다는 말 등등이 총독부 관계관의 입에서 유포되고 있었다. 그러기에 설립준비위원장 채필근 목사님은 12월 11일, 조선신학교 인가는 유망하다는 소식을 우리에게 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부터 두 달 후인 1940년 1월 22일에 결국 조선신학교는 인가할 수 없다는 내정이 전해졌으며, 채필근 목사님은 평양신학교 교장으로 내정되고, 동년 2월 9일에 평양신학교 인가가 공식으로 발표되는 데 까지 이르렀다.

총독부 당국에서 그렇게 결정한 이유를 전문하면 1) 기독교의 일본화를 위해서는 평양신학교를 인가하고 평남도지사에게 일본화 임무를 맡기는 것이 더 확률적이라는 것, 2) 선교사들의 본부였던 그 발부리에 폭탄을 터뜨리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 3) 교회의 대부분이 함평 양도에 있다는 것 등이라 했다. 그러면 왜 조선신학교에 인가한다는 것을 선약했느냐, 그 약속을 지키려면 둘 다 인가해야 마땅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거기 대해서도 신중히 고려했다고 대답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일본 기독교단 통리(統理) 도미다 미쯔루(富田 滿) 씨를 일부러 초청, 숙의한 결과 ‘한 교파, 한 신학교’가 정상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에 미안하지만 선약을 이행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로서는 학교 인가 얻을 소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 년마다 갱신하는 강습소 인가라도 얻어 어쨌든 신학교육은 시작해야 한 다고 결정했다. 강습소 인가는 경기도청의 권한에 속한 것이었으므로 그리로 예비교섭을 진행했다. 도청에서는 적극적인 호의를 보였다. 총독부에서 경기도를 버리고 평안도를 택한 데 대한 불만도 노골적으로 터뜨리는 것이었다. 서류만 내면 1주일 이내에 인가한다는 것이었으므로 우리는 곧 서류를 준비하는 한편, 입학 안내서를 작성, 인쇄하여 각 노회에 보내기까지 했다. 3월 4일에 강습소 인가 신청을 제출하여 3월 22일에 인가장을 받았다. 인가장 받기 얼마 전인 2월 19일에 이사회에서 윤인구 목사와 나를 정교수로 초빙한다는 정식 결정을 했다.

나는 3월 23일에 부친상을 당했으나 그동안에 주소를 이리저리 옮겨 다닌 탓으로 집에서 보낸 세 번 전보가 이 주소 저 주소로 돌아다니다가 23일 오후에야 내게 배달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도청에 가서 조선신학원 인가서를 받아온 날 오후에 전보를 받은 셈이다. 24일에서 30일까지는 불효한 상자(喪者)로 함북 경흥의 산골에 있었다. 돌아와 4월 1일에 입학고시를 필하고 4월 2일에 개원식, 4월 4일부터 수업, 4월 5일 밤에 첫 입학생들과 함께 성찬식, 그리고 헌신 선서를 했다. 그 후부터는 매일 수업에 여념이 없었다. 초대 학장은 김대현 장로님이었다.

개원식에서 김 장로님이 말씀하신 짧은 취임사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적은 일에 충성하는 자를 돌봐 주신다는 신념을 나는 내 경험에서 체득하고 있습니다. 나는 ‘조선신학교’란 간판으로서 처음부터 크게 벌이는 데 두려움을 느껴 왔었는데, 이제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으므로 이렇게 초라하게 작은 기관으로 출발하게 됐습니다. 나무 자라듯 오래오래 더디 자라는 생명일수록 더 견실한 법입니다. 나는 원래부터 ‘이소성대(以小成大)’를 원합니다. 이제 이 적은 조선신학원이 꾸준히 자라 전 조선뿐 아니라, 전 세계에 유명한 신학교로 결실할 것을 확신합니다. 적은 데서 출발했기 때문에 그 장래는 더욱 견실합니다.”

이소성대를 견실한 철학으로 삼아 일생을 밀고 나온 김 장로님의 소신 있는 모습과 함께 조선신학원의 미래도 축복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나도 믿고 싶었다.

1939년 9월 30일이었다고 기억되지만 나는 그 당시 천식증으로 성북동 숲속 별관에서 지내시는 김 장로님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는 편지를 몇 장 내놓으면서 회답을 써 달라고 했다. 그중 하나는 김익두 목사님으로부터 온 것이었는데, 신사참배 문제로 “선교사들이 신학교 문을 닫고 갔는데 당신이 신학교를 새로 한다는 것은 선교사에 대한 의리를 보든지 신앙적 양심으로 보든지 배교에 가까운 잘못이 아니냐.”고 호되게 나무라는 내용의 것이었다. 나는 무어라고 회답을 써야 할지 몰라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얼마 후에 그는 “아마 김 목사가 당장 답장 쓰기는 어려울 거요! 그런데 나는 기도하는 중에 이 성경 구절을 생각했소.” 하면서 전도서 3장 8절을 보여주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심경을 짐작할 수 있었다. “때가 다르니 하는 일도 다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전 3:11)는 신념에서 그는 결의를 굳게 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방향에서 회답을 써 드렸다.

1940년 1월 20일 나는 김 장로님의 신앙담을 했다. 경주 가까이서 사신 모양이며 지금의 흥해 제일교회가 그의 맨 처음 봉사하던 교회 후신이라 들었다. 초창기 신자였으므로 그의 자녀들과 함께 고된 핍박을 받아 왔고, 한일합병 당시에는 일진회, 일본 경찰 등의 위협을 겪어 가며 믿음을 지켜 왔다. 그가 평생 실행한 십일조 헌금은 듣는 자로 하여금 옷깃을 바로 잡 게 했다. 모든 수입의 10분의 1은 맨 처음에 성별하여 ‘김필헌’이란 이름으로 저금한다. 그것을 교회에 헌금하기도 하지만, 토지 가옥 등을 사기도 한다. 때를 따라 처리하면 더 큰 목돈이 된다. 그리하여 개척 교회도 세우고 전도인도 돕고 했다. 지금의 신암교회, 창신교회 등도 그의 창설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남은 전부는 ‘조선신학교’ 설립기금 속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는 마감에 재산을 총정리하여 두 아드님, 장손, 사모님, 자기 등에 등분하여 자기 몫은 전액을 조선신학교에 헌납했다. 한국 신학이 금후에 아무리 진취(進取) 넓게 발전된다 할지라도 그 속에는 김대현 장로님의 정성이 그 핵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으로 믿는다.

1940년 하기방학을 마치고 9월 어느 날에 개학했다. 나는 성묘도 할 겸 고향에 갔다가 개학 며칠 전에 서울로 왔다. 김 장로님은 여름 동안 숙환이 가중하여 9월 15일 세상을 떠나셨다. 비통했다. 이사회가 상가에서 모여 윤인구 목사를 제2대 학장으로 선임했다. 장례식이라도 성대히 하는 것이 그에 대한 당연한 예라 하여 시내 각 교파를 망라하여 장례 프로를 짰다. 장례는 9월 22일이었는데, 장례식 바로 전날 새벽 네 시에 시내 각 교파 목사들이 총검속(總檢束)되었다. 무슨 영문인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김대현 장로님과 김영철 장로님 댁에도 검속하러 갔던 모양인데, 한 분은 세상 떠나시고 한 분은 상자시니 손을 못 대고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목사라곤 나 하나만이 남았다. 내일 아침이 장례식인데 나까지 들어가면 사식(司式)할 목사도 없게 된대서 상주들이 내 숙소를 딴 데 정하고 집에 못 가게 했다. 나는 집에 아이들을 불러 일기 등속을 태워버리고 누가 찾아와서 숙소를 물어도 모른다고 대답하게 해뒀다. 그러나 별일이 없었다. 다음 날 장례 프로에 참여할 사람들을 갑자기 바꿔, 장로들을 목사에 대신하게 하고 내가 사식하여 별고 없이 안양에 안장했다.

학교에는 나와 약초교회(지금의 초동교회) 목사로 우리 학원 강사인 야마구치(山口重太郞) 씨와 둘만이 남았다. 윤인구 학장도 검속되었기 때문 이다. 이런 위기에는 더욱 분발해야 한다고 생각됐기 때문에 시간표를 만들어 새 학년을 합반하고 하루 여섯 시간씩 깔축없이 강의했다. 한 3주일 지난 어느 날 종로서에서 ‘김택’이란 담당형사가 와서 강의중인 나를 불러내어 데리고 갔다. 학생들은 이제 정말로 문이 닫히나 해서 몹시 당황 해했다. 나는 휑한 취조실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취조를 받았다.

“신령회란 것을 아는가?”
“모른다.”
“신학교 교수가 그걸 모를 리 있는가?”
“알면 안다고 하지 왜 모른다고 하겠는가?”
“목사들이 다 왜 잡혔는지 아는가?”
“그걸 당신이나 알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리고서는 이런저런 생뚱한 소리를 하며 소위 조서를 꾸미는 것이었다. 나는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이야기였으므로 시종 모른다고만 했다.

“당신도 유치장 맛을 봐야겠소!” 하면서 이제는 자기 방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그는 그 ‘조서’를 갖고 고등계 주임한테 가는 모양이었다. 아마 한 시간이나 기다렸을 것이다. 그는 나왔다.

“당신 모른다고만 하면 되는 줄 아오? 맛 좀 보겠소?”
“당신 맘대로지 내야 보고 안 보고 할 거 있소?”

“그런데 당신도 으레 넣어야 할 건데 당신까지 없으면 학생들이 동요되고, 그 학생들이 시골에 흩어져 이런저런 이야기를 퍼뜨리면 민심이 불안해지겠기 때문에 도로 나가게 하는 거요. 나가서 아무 얘기 말고, 가르치기만 해요. 그리고 당신 모른다던 것들을 금후에라도 알게 되면 알리시오.”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오니 학생들이 “와!” 하고 모여 좋아했다.

갇힌 지 40일 만에 목사들은 다 나왔다. 그러고서는 일본 시찰을 보낸다고 무더기로 일본에 다녀오게 하기도 했다.

1941년 3월 22일로 우리 강습소 인가는 만기가 된다. 다시 신청했으나 평양신학교 측과 평남도지사의 항의로 도청에서도 난처하게 되었다. 두 달이 지나서야 ‘이번만’이라는 조건부로 인가가 나왔다. 그러니까 학장인 윤 목사는 마음이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버젓하게 학교령에 의하여 신학교 하는 것이 첫째 염원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틈을 타서 고관들, 고관 퇴물림, 유력자라는 사람들이 학교 인가를 내준다고 각양 허풍을 치며 접근했다. 1942년 5월 우리 강습소 인가는 다시 끝났다. 또다시 청원했다. 그러나 인가가 나올 리는 없었다. 수업은 여전히 계속했지만 윤 학장은 늘 맘이 초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에 학교령에 의해 경영하는 신학교는 성결교회의 ‘경성신학교’ 뿐이었다. 그래서 감리교신학교, 우리 신학교, 그리고 경성신학교가 합동해서 ‘경성신학교’ 이름으로 신학교육을 계속하자는 교섭이 진행되었다. 그것이 거의 다 돼 가던 판에 ‘경성신학교’ 측에서 갑자기 거부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동 교섭을 진행하던 사람들은 끈덕지게 그 방향으로 노력했다. 그래서 1942년 12월 29일 우리 신학교와 감리교신학교가 우선 냉동(冷洞) 감리교신학교 교사에서 합동 교수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경성신학교’와의 합동은 실현되지 않았다.

1943년 초부터 새로운 움직임이 파도쳐 왔다. 조선에 있는 모든 조선인 교회와 조선 안에 있는 일본인 교회가 합동하여 ‘조선기독교단’을 만들자는 운동이었다. 이것이 거의 성숙되었을 무렵, 총독부로서는 일본인 교회 와 합해진 ‘조선인 교회’는 단속하기 시끄럽다는 이유에서였는지 하여튼 이남의 장로교회와 전국 감리교회를 합하여 혁신교단이란 한 교단을 만들고 성결교회는 탄압하기로 방침이 결정됐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조선신학원 이사장이던 전필순, 원장 윤인구, 그리고 감리교회에서는 이동욱 등 제씨가 주동이 되어 전격적으로 혁신교단을 결성, 전필순 씨가 초대 통리로 되었고, 윤 원장은 교학국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조선신학원과 감리교신학교는 합동하여 혁신교단 신학교로 발족하려 하였다. 이것이 1943년 겨울방학에서 학년 말까지에 된 일이었으므로 학생은 없었다.

그러나 이남 노회들이 이에 불응하였고 경기노회도 명목상으로는 총회를 탈퇴하고 혁신교단에 가입한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거의 전부가 이에 반발하는 터였으므로 결국 총회에서 특별위원을 보내어 경기노회를 다시 조직하고 혁신교단 가담 목사들을 제명하게 되었다. 조선신학원에서도 나와 일인 교수 미야우치(宮內 彰) 목사가 다같이 사직원을 내고, 혁신교단 운동에 반대했다. 결국 설립자의 명의로 이사회를 개편하고 이사장과 원장이 경질되고 감리교신학교와의 합동교수는 거부하고 지금의 덕수교회에서 따로 개강하기로 했다. 그 얼마 후 혁신교단은 와해되고 말았다.

1943년 초여름에 덕수교회에서 개강한 조선신학원은 외부로부터의 압력이 증가됨에 따라 내부로서의 단결은 더욱 굳어졌다. 강습소 인가도 없이 개강했대서 불법집단이라고 도경에서 위협했다. 우리는 그때마다 맘대로 하라고 대답했다. 구약은 유대 민족의 세계 정복을 위한 야심에서 쓰여진 책이니 가르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많이 가르쳤다. 마침 그때 그것이 내 담당과목이었기 때문에 문제삼을 것도 없었다. 형사가 와서 왜 구약을 가르치느냐고 했다. “구약에 유대인 세계 제패에 대한 얘기가 있으나 그런 것은 예수님께서 다 더 높은 차원에서 정리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입장에서 그런 불완전한 내용을 정리하면서 가르치는 것이니 문제 될 것 없다.”고 대답했다. 형사는 잘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궤변을 농한다.”고 비시시 웃으면서 가버리곤 했다.

1944년부터는 학생들에게 개별적으로 징용장이 나왔다. 징용되는 대로 동남아니 일본 어느 탄광이니 하고 맘대로 실어 보냈다. 당시에 면서기라도 하고 있는 사람은 징용에서 면제되었다. 그래서 학생들은 하나씩 둘씩 말없이 사라졌다. 징용장이 나오기 전에 면서기로라도 취직해 둬야겠다는 사람은 그것 때문에 가버리고 징용장 받은 사람은 어디론가 도망하기 위해 사라지는 것이었다. 학생 하나가 독립운동을 했대서 잡혀가 감옥에서 죽었다. 또 한 사람은 말하자면 거물 축에 들 인물이었는데 일본이 항복할 날이 멀잖으니 우리 망명 정부가 돌아올 때까지의 공백 기간에 혼란을 막기 위한 조직이 미리부터 있어야 한다고 그 일에 열중하다가 역시 잡혔다. 그러니까 헌병과 형사가 아침부터 밤까지 붙어살게 되었다.

그렇잖아도 우리는 징용 때문에 저절로 폐교될 운명에 봉착했다. 학교 문을 닫지 않기 위해서는 재학생 전체가 교수 인솔하에 어디엔가 집단 징용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교수 미야우치 목사를 총독부에 보내서 교섭하게 했다. 총독부에서는 크게 칭찬하고 일본 ‘구주(九州) 탄광’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신학교를 하면서 일하게 해준다고 구수한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미야우치 목사는 반승낙이나 하고 돌아왔다. 그때는 벌써 일본에 대한 폭격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맥아더가 밀고 올라오는 중이었으므로 구주 탄광에 학생을 보낸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얘기였다.

나는 이를 절대 거부했다. 우리 학생의 대부분은 가족 가진 어른들인데 그들이 곱신곱신 그리로 갈 리도 없고 그들이 안 가면 학교는 어떻게 면목을 세우느냐고 설명했다. 미야우치 교수도 납득하고, 다음에는 관계에서 유력자인 하나무라(경성제대 법과 원로교수) 씨와 함께 총독부에 들어가 조선 안에서 어디든지 징용 보내 주기를 청했다. 좋은 데를 고르라기에 여기저기 생각하다가 결국 평양 종연화학 공장을 택했다. 이것이 허락되어 그 당시 우리 학교 전임강사였던 전성천 목사 인솔하에 전교생이 그리로 갔다. 나는 학원을 지키며 혼자서 몰래 입학시킨 7명의 학생을 가르치며 지냈다. 그때 들어온 학생 중의 한 사람이 지금 울릉도에 가 있는 이일선 목사다.

평양 간 학생들은 학교 문을 닫지 않기 위한 의용심과 충성심에서 만 난을 참으며 근 일 년을 무진 고생했던 것이다. 신학생다운 생활을 실천한다는 의미에서 그 공장에서 제일 어려운 일, 제일 싫어하는 일들을 자진해서 맡아 했다. 일인들에게도 존경을 받으면서 일했던 것이다. 배고팠던 얘기는 더할 나위가 없다.

1945년에 접어들면서 총독부 압력은 더해졌다. 설립자 김영철 장로에게는 재정적으로 손떼지 않으면 좋지 않을 거라고 연방 위협해 왔다. 그래서 우리는 이사회를 모으고 김영철 장로로 하여금 재정원조를 중단하게 했다. 그것은 김 장로의 신변을 걱정해서였다. 그리고 학교는 그래도 모험하기로 했다. 예산을 세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당시 교회 맡은 졸업생들에게 사정을 말하고 부족액을 헌금해 보내라고 했다. 불과 두 달 이내에 예산이 서게 됐다. 총회에서도 3,000원(지금의 1,500불)을 보내 왔다. 나는 그 어려운 시절에 우리 졸업생들이 그렇게까지 신속하게 또 정성껏 응답해 준 것을 지금도 눈물겹게 고마워하고 있다.

미야우치 교수는 일인이었지만 참으로 진실한 크리스찬이었다. 우리가 아무리 총독부며 일본에 거슬리는 말을 했어도 절대로 새는 법이 없었다. 1945년 봄에 그는 나이 45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징병이 되어 졸병으로 어디론가 가버렸다. 야마구치(山口) 목사는 노구로 영양실조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학교 사무실에는 흔히 나 혼자 앉게 되었다. 1945년 6월쯤 이었던가 광주에 있던 정경옥 목사(전 감리교신학교 조직신학 교수)가 들어 와서 “김 목사, 조선신학교는 끝까지 지켜 주시오. 학생이 한둘이라도 좋고, 그 학생들이 신학생답지 못해도 좋소.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아도 그래도 3년을 뒀다가 내보내시오. 그래도 뭔가 남으니까요!”라고 했다. “그럼 김 목사, 꼭 부탁이오!” 하고서는 허둥지둥 나가는 것이었다. 그는 그 길로 병들어 불귀의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와 같은 해(1928년 9월)에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것 이외에 아무 인연도 없는 터였고 그가 귀국하여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활약할 때에도 나는 한 번 만난 일도 없이 지냈다. 그런데 뜻밖에 그가 찾아와 그런 ‘유언’ 같은 부탁을 던지고 갔다는 것은 이상할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의 최후의 모습을 그리며 엄숙한 책임을 느끼곤 한다.

1945년 8월 15일은 왔다. 숨어 공부하던 몇 안 되는 우리 학생이 제일 먼저 거리에서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평양 갔던 학생들도 거기 있는 공장 커튼을 뜯어 ‘독립만세’ 플래카드를 만들어 들고, 아직 아무도 나서지 못하는 평양 시가를 맨 처음으로 만세 부르며 행진해서 역까지 갔다고 한다. 그 길로 기차 타고 모교에 돌아온 것이 8월 16일이었다. 우리는 다같이 한없이 기뻤다. 그때 평양에서 돌아온 상급생들은 강신정, 송두규, 김창복 등 제6회 졸업생들이다. 몇 날 후에 미야우치 교수도 돌아왔다. 제주도 가서 땅굴을 파다 왔다는 것이었다. “될 대로 됐으니 이제 맘이 놓인다.”고 하면서 학생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귀국했다.

학교는 이에 온전히 새 세대로 돌입한다. 우선 널찍한 교사를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교수진을 강화해야 한다. 그래서 송창근 박사, 최윤관 목사, 한경직 목사 세 분을 정교수로 초청했다. 그들도 쾌히 승낙하고 한 몸 같이 밤낮 없이 일했다. 그 당시 이사장이었던 김종대 목사도 글자 그대로 동고동락했다. 동자동에 천리교 본부가 있고 시내 40여 소에 천리교회가 있어 한 재단에 들어 있는데 아직 접수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김종대 목사가 알아 가지고 왔다. 그걸 접수하기로 하고 가봤다. 방대한 재단이었는데, 거기에는 일인들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알고 보니 일인들은 벌써 그 재단 전체를 수입천리신자(輸入天理信者)들로 조직된 종교단체인 한국천리교회에 이관시키고 대문에는 서울원예학교라는 간판을 붙인 것이었다. 그 재단으로 학교 설립 신청을 해서 문교사회부로부터 인가까지 나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대로 하지 중장에게 직접 접수원을 냈다. 그것이 8월 하순, 해방된 지 몇 주일 후밖에 안 되는 때였으므로 일인 재산을 어떻게 처리한다는 아무 규정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하지 중장은 그것을 상공부에 보내고, 상공부는 다시 문교사회부에 보냈는데 거기서도 어쩔 도리가 없어서 시청으로 가서 한인 시장을 만났다. 임대차 계약서를 쓰래서 곧 작성 제출했다. 그것이 미인(美人) 시장에게로 갔다. 이름은 윌슨이었는가였는데 그가 이 사건 때문에 전화로 문의하는 것을 곁에서 들었다. 어떤 데서는 법이 생길 때까지 보류하라고 권고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법이 생기면 그때 그 법대로 할 셈치더라도 그때까지 집을 비워둘 건 뭐냐? 몇 푼이라도 임대료 받는 게 낫잖느냐.”고 그가 대답하는 것을 엿들은 우리는 일이 되나 보다 생각했다. 내일 아침에 다시 오라는 것이었다.

이튿날 나는 한경직 목사와 함께 또 그리로 갔다. 시장은 부시장 ‘꺼스토프’ 대령에게 “이걸 접수해서 이 사람들에게 주라.”고 명령했다. 함께 동 자동으로 왔다. 꺼스토프가 일인 관장(官長)과 한인 천리교 신도 대표를 불러다 놓고 접수 선언을 했다. 그들은 깜짝 놀라면서 “이 재단은 종교법 규대로 한인으로서의 천리교회에 이관됐고, 이 재단으로 원예학교 설립인가까지 받았는데 이제 와서 웬일이냐?”고 했다. 그리고 문교부에 등록된 서류와 학교 인가장을 갖다 보였다. 거기에는 문교사회부 장관격인 미인(민간인) 밀러의 사인이 있었다. 그걸 보던 꺼스토프 대령은 그 인가장 뒷등에다가 “내가 이 재산을 접수한다.” 하는 글을 쓰고 자기 사인을 했다. 그리고 그것을 일인 관장에게 주면서 이걸 대문에 갖다 붙이라는 것이었다. 어리둥절했던 것은 한인 천리교도 대표나 일인 관장만이 아니었다. 우리 자신들도 군정이란 이런 건가 싶어 일시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그 이튿날 그들은 문교장관격인 ‘밀러’ 씨에게 호소해서 그가 친히 찾아왔다. 꺼스토프는 그의 설명을 듣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냐?”고 끄덕 이면서도 “접수한 건 접수한 거니까!” 하고 더 대꾸를 하지 않았다. 밀러 씨는 나가면서 나를 보자고 했다. 그는 나에게 “내가 더 좋은 자리를 마련해 볼 테니 이건 포기하는 게 어떠냐?”고 하면서 신학교 자리로는 적당 치 않다고 했다. 그리고 “주검 있는 곳에 독수리 모이듯이 목사들이 이렇게 덮쳐서야 되겠느냐.”고 나무라기도 했다. 그러나 나도 꺼스토프 식으로 “이미 접수된 거니 나는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섭섭하오!” 하면서 그는 대문 밖으로 나갔다. 그 후에도 한인 천리교도들이 준동했으나 “민족반역자!”라고 송 형이 고함치는 바람에 결국 단념하고 자취를 감췄다.

일인 장관과 그 부하들이 거기 있는 한인 천리교도들과 밀회하고 하는 것이 눈에 거슬린대서 꺼스토프는 제1진으로 여기 일인들을 송환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나에게 쪽지를 주면서 일인들을 모아 놓고 선고하라고 했다. “내일로 송환 캠프에 옮길 테니 그리 알라. 불복하면 검속한다.”는 것이었다. 그 이튿날로 일인들은 떠나 버리고 잡음은 사라졌다.

시내 40여 소에 천리교회가 있었다. 그중에서 제일 큰 중앙교회가 지금의 영락교회 자리에 있었고, 지금의 경동교회 자리에는 천리교에서 둘째가는 교회가 있었다.

1945년 9월에 학교령에 의한 조선신학교 인가를 받았다. 1946년 4월부터 송 형이 교장으로 취임하고 예의(銳意) 확장에 진력해서 1948년 재단 법인에 의한 정규 대학으로 인가되었다. 그것이 미군정 말기의 일이다. 그 당시의 문교부장은 오천석 박사였다.

일제 시대부터 해방을 거쳐 그 후에 이르기까지 단절 없이 지내온 신학교는 우리 학교뿐이었다. 경성신학교도, 감리교신학교도 해방 후의 자가 정비를 위한 시간을 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학교에 일본, 만주, 북경, 남경, 평양, 그리고 감리교, 성결교 등등에서 각양 배경과 전통을 가진 각양각색의 신학생들이 전입학했다. 학생이 350명을 넘었다. 철수했던 선교사들이 돌아오고, 이북 교역자들과 교회 지도자, 교인들이 수십만 명 남하해 오고, 부산에는 미국의 메첸파, 메킨타이어파가 고려신학교를 점유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신학적인 사상전을 벌이고 있었다. 각기 특이한 전통에 속한 신학생들이 중도에 들어와 현대 성서비판학과 현대 신학의 솔직한 강의를 듣게 되니,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 신학의 교육이념에 변동이 있을 수는 없었다. “이단 교수다!”, “신신학이다!” 하고 뒷공론은 대단한 모양이었으나 정면으로 맞서는 일은 없었다.

내 구약개론과 구약강해 시간에는 학생들이 강당에 꽉 차서 열심히 청강하고 한마디 빼놓을세라 필기를 하는 것이었다. 혹시 채 못 알아들은 것이 있으면 시간 필한 후에 찾아와 진지하게 다시 알아보곤 했다. 고지식한 나로서는 내 강의 내용은 어쨌든 간에, 학생들의 청강의 태도만은 만점이라 생각했다.

1946년 이북 교회와의 연합이 단절된 채 ‘남부대회’라는 이름으로 남부만의 총회가 열렸다. 우리 학교는 총회 직영 신학교로 되어 이사진이 개편되었다. 1947년 4월 18일에 ‘제33회 총회’가 대구에서 열렸다.

그런데 총회가 열리기 2주일 전에 경북노회 주최로 교직자 신학강좌가 준비되고 강사로 내가 초청되었다. 나는 학교 일도 분주하고 해서 두 번 이나 사절했지만 사람이 일부러 올라와서 기어이 와야 한다고 조르길래 개회 전날에 가기로 했다. 나는 순진한 생각으로 교직자들에게 다소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간 것이었다. 대구역에 내렸으나 아무도 나온 사람이 없었다. 제일교회가 강좌 장소였기에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가며 그리로 찾아갔다. ‘경북노회 신학강좌’라는 게시판은 써 있었으나 교회 문은 굳게 닫히고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동산 언덕 위를 이리저리 산책하다가 내 멋대로 어느 여관에 들어갔다.

두루 수소문을 해서 늦게야 몇 분 목사님들과 접촉할 수 있어서 예정대로 개강은 했다. 사람이라곤 여남은밖에 오지 않았다. 그러나 다들 쟁쟁한 문제의 목사님들이었다. 나는 조직신학 강의를 시작했다. 질문도 많았다. 이틀 사흘 지내는 가운데 사람들은 차츰 불었다. 공개 강연회는 회를 거듭하는 대로 성황을 이루어서 마감 날에는 청강인도 수백 명이었고, 강연회는 제일교회당이 차고 넘쳤다. 다들 맘 놓고 기뻐해 주었다. 그래서 장로님들은 며칠 해인사에 가서 쉬고 가라고 그렇게 계획까지 짜놓았다. 나도 즐거웠다. 하도 내가 ‘이단 교수’라는 선전이 자자하니 시험하기 위해서 불러온 것이었다는 내막을 나는 후에야 알았다. 나는 그렇게까 지 순진한 축이었다. 그런데 듣던 것과는 달리 의외로 ‘정통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의혹을 풀고 오히려 기뻐했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마감 날 밤 강연을 필하고 나오자마자 송창근 학장으로부터 “곧 상경하라.”는 전보가 두 장이나 날아왔다. 나는 정거장으로 직행하여 그날 밤으로 상경했다. 일주일 후에 열릴 총회를 앞두고 학생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51명이었던가의 학생이, 주로 내 강의와 다른 몇 교수의 강의 내용이 ‘신신학’이라는 점을 들고 일어나 총회에 호소하자는 운동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래서 학우회 결의를 얻으려다가 실패되자 그들은 비공식으로 문서를 작성해 가지고 총회에 내려가 그 팸플릿을 총회원들에게 배부하기까지 이른 것이다.

조선신학교 점거, 합동, 폐지, 제3신학 설립 등 신학교 행정 문제가 신학 논쟁과 서로 어울려 치열을 더하면서 7년간 계속되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1953년 ‘기독교장로회’의 새 출발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동안의 곡절 많은 경과에 대해서는 『기독교장로회 약사』에 요약됐기 때문에 번기하지 않는다.

1948년 가을에 송창근 학장이 미국으로 갔다. 그는 매일 두통이 심해 서 그대로 집무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졌다. 그래서 부랴부랴 휴양차 도미한 것이다. 그때만 해도 우리 동료들은 고혈압이 뭔지도 모를 정도로 의학에 무식했다. 미국의 밥 존스 대학교에서 얼마 쉬고 있던 그는 거기서 종합진단을 받은 결과 ‘고혈압’ 이외에는 다른 아무 병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자신도 처음 듣는 일이어서 그게 얼마나 무서운 병인 줄 미처 몰랐다.

1949년 5월 그의 모교인 피츠버그 웨스턴신학교 졸업식에 동창회로서의 간곡한 초청장을 받고 그는 그 길로 갔다. 그는 나에게 동창회 ‘연회(banquet)’ 광경을 감격에 넘친 긴 사연으로 편지해 왔다. 120 몇 회 졸업식이었으니 초청받은 동창생도 모두 명사였고, 호텔 큰 홀이 가득했다. 멀리 한국에서 온 졸업생이자 신학교 학장이라서 만당이 기립 환영하고 스피치를 시키고 제각기 신학교를 위한 가능한 최선의 원조를 약속했다. 각 교회에서 초청할 약속을 하고 프로를 만들려고 송 형을 여기저기서 끌었다. 송 형의 학교를 위한 앞길은 환하게 열리는 것 같았다. 그는 전 미국 큼직큼직한 동창들의 교회를 역방할 꿈에 꽃을 피우면서 나에게 소식을 전해 왔다. 그리고 그는 잠깐 밥 존스 대학교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며칠 후 너무나 흥분한 그는 그만 고혈압으로 독방에서 졸도했다. 우연히 문을 두드린 어느 미국 학생에게 발견되어 급거 입원했으나 용태는 중했다. 며칠을 혼수상태로 있다가 의식이 돌아온 때에는 반신 불수로 어쩔 길이 없음을 발견했다. 우리 학교 동창인 음악 전공하는 한인근 군이 그 가까이 있었기에 간호에 전념했다. 시간과 함께 차츰 나아서 겨우 기동하게 됐다. 그는 그동안에 죽음을 각오하고 신학교 학생들에게 간곡한 편지를 보내 왔다. 내가 죽어서 뼈라도 돌아가거든 신학교 문간에 묻고 오는 학생들이 밟고 지나가게 해 달라는 둥, 소처럼 일하다가 몸 바쳐 제물이 되어 달라는 둥 하는 내용의 편지가 읽혔을 때 학생들은 목놓아 울었다.

1950년 초에 그는 걸어다닐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그래서 기어코 살아 돌아왔다. 학교는 다시 활기를 띠었다. 총회 관계에서도 패배주의가 일소되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하나님의 심판은 임했다. 공산 침공으로 하루 동안에 모든 것이 뒤집어졌다. 학교는 무기 휴교를 선언하고 학생들은 한강 이남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대다수 교수와 그 가족들은 그대로 남았다. 친구와 선배들이 시골로 피하라고 강권했으나 송 형은 이를 고사했다. “내가 이제 이 찌그러진 몸을 갖고 치사스레 어디로 도망간단 말이요. 여기 있으면서 하회를 보겠소!” 하는 것이었다. 며칠 안 돼서 보위부 정탐인 성싶은 괴한 두세 사람이 지키고 있었으니 갈래야 갈 수도 없었다.

어느날 나, 김정준, 정대위 등이 한꺼번에 세브란스에 자리잡고 있는 공산군 헌병대에 불려갔다. 가노라니 송 목사도 그리로 오고 있었다. 그들은 세브란스 병원 간호원이 탈출해서 신학교 구내에 숨었으니 사실대로 말하라는 것이었다. 김정준 목사 집에 들러 밥 먹고 제 집으로 간다면서 나갔다고 김정준 목사가 대답했다. 집 주소가 어디냐고 물었으나 김정준 목사는 모른다고 했다. 그 간호원은 성남교회 교인이었으므로 송 목사가 가로맡았다.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나 책임을 물으려면 성남교회 목사인 내게 물으라고 송 목사는 그들에게 말했다. 그들은 알겠다면서 “오시래서 죄송하다.”고 대문 밖에까지 전송해 줬다. 송 목사는 잘 걷지 못하니 그들이 부축해 주었다.

한 달쯤 지나서 밤 한 시에 군인이 와서 대문을 두드렸다. 정대위 목사가 나와 있었다. 정 목사와 나는 도동파출소에 붙들려 갔다. 사람이 수십 명이 잡혀와 고된 심문을 받고 있었다. 우리는 파출소 안에서 차례 오기를 기다렸다. 한 시간쯤 후에 저쪽 파출소장 방문이 열리면서 송 목사가 밀려나왔다. “이 사람 집어넣어!” 하는 소장의 명령이 던져졌다.

나와 정 목사는 반사적으로 일어서 말을 건네려 했지만, 순경이 고래고래 소리치는 바람에 흠칫하고 말았다. 송 목사는 옷고름을 뜯기고, 유치장으로 끌려갔다. 우리 둘은 얌전하게 기다렸으나 차례가 오기 전에 동이 훤해져서 그대로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오전 열 시에 다시 오라는 것이었다. 열 시에 또 갔으나 아무도 없고 소장만 있어서 꽤 관대하게 대해 줬다. 그는 송 형이 기독교 광신자며 친미파라고 했다. 나는 그가 결코 그렇잖으니 놓아 달라고 했다. “여보, 이게 이승만 정분 줄 아오?” 하고 노려보는 데는 더 할 말이 없었다. 나는 해방 5년 전에 남하했고, 다시 미국 갔다 온 일도 없으니 걸릴 조건이 없다고 하면서 나가 있으라는 것이었다. 송 형은 며칠 후 중부서에서 놓여나왔다. 그 얼마 후 우리 집은 ‘역산(逆産)’ 딱지가 붙고 일주일 내로 어디든지 나가라는 통고를 받았다. 그래서 식구들과 함께 40리 밖 ‘도농’으로 갔다. 거기서 서울 탈환 때까지 있었다. 송 목사는 8월 20 며칠엔가 다른 재경(在京) 목사들과 함께 납치된 채 이북으로 옮겨져서 오늘까지 소식이 없다.

1951년 부산 피난 중 미국 프린스턴 신학생들이 금품을 모아 한국 신학생들을 도왔다. 아담스 선교사가 그 일을 맡아, 우리 학교에도 공평하게 나눠 줬다. 우리는 그것을 밑천 삼아 학생과 선생의 공동생활 아래서 신학교를 개강하기로 했다. 항서교회에서 개강은 했지만, 학생이 잘 곳도, 밥해 먹을 곳도 없었다. 마침 권남선 목사가 자기 소유인 부민동 언덕 밭을 줘서, 학생들과 함께 그 질퍽한 인분 거름을 밀어제치고 흙을 뒤집고 거기 천막을 치고 거기서 밥해 먹고 거기서 자고 거기서 배우고 거기서 예배했다. 그래도 모두들 보람을 느끼며 즐겁게 고생했다. 김종대 목사가 이사장이고 정대위 목사가 학감이었는데 빈손 갖고 학교 하기가 하도 어려우니까 탄피 수집 사업을 맡아 했다. 김종대 이사장, 정대위 학감, 그리고 김창준 이사가 순전히 무보수로 일했다. 거대한 사업이었지만 수익은 비교적 적었다. 그래도 그것으로 얼마 경상비를 꾸려 갔다.

1953년 8월 30일에 동자동 옛터로 환도했다. 서울은 문자 그대로 폐허였다. 전선은 모조리 끊어져 너저분하게 땅에 드리우고, 유리는 죄다 부서져 유리창 달린 집이라곤 거의 없고 북촌과 효자동 쪽을 빼고는 어디를 가도 허허벌판이었다. 가다가다 무너지다 남은 허리 잘린 집들이 파헤친 무덤처럼 서있을 뿐이었다. 동자동 신학교에는 빈 교실만이 깨어진 독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책 한 권도 남아 있지 않았다. 피아노 세 대도 간 데 없었다. 수도는 터져 땅속만 적시고 우물은 오만 가지 쓰레기로 메워져 있었다. 기숙사는 형체만 남아 있었다. 재건한다고 장담은 하면서도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루터교 군목이 와 보고, 자기 교파 본부에 말해 4,000불이 왔다. 그걸로 기숙사를 고쳤다. 밤이면 유리를 빼 가고 변소에서 사기통을 뜯어 가고, 도적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김정준 목사는 궁여지책으로 망치 들고 변소 사기통을 두들겨 모두 금이 나게 했다면서 쓴웃음을 보였다.

1956년 캐나다 선교부에서 시찰을 왔다. 교사 신축비를 담당한다는 약속을 남겼다. 우리는 학교 기지를 찾기 위해 서울 근처를 모조리 답사하다가 결국 수유동 언덕을 택했다. 한 평에 70환에서 80환 정도로 입수했으니까 지금 말한다면 거저 가진 셈이다. 건축가 강윤 씨가 설계를 맡아 줬고, 장희진 목사가 현장 감독을 맡았다. 그래서 캐나다 교회 헌금 10만 불로 1957년 12월까지에 지금의 교사가 완성됐다. 다음해 ‘ICA’ 자금과 동자동 기지 대금으로 식당과 사택들이 건축되었다. 그래서 한국신학대학 역사의 제3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댓글 1개:

  1. 해방 직전... 김재준 목사는 함께 미국에서 유학한 정경옥 목사의 유언과도 같은 말을 듣게 된다.

    “김 목사, 조선신학교는 끝까지 지켜 주시오. 학생이 한둘이라도 좋고, 그 학생들이 신학생답지 못해도 좋소.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아도 그래도 3년을 뒀다가 내보내시오. 그래도 뭔가 남으니까요!”

    당시 김재준 목사의 표현으로는 별 일면식이 없던 정경옥 목사가 일부러 찾아와서 위와 같이 말했다고 한다. 신학교육의 열악한 상황 속에서 한국 교회의 미래는 신학교육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교육자의 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맘만 먹으면 외국 유학을 쉽게 다녀올 수 있는 상황에는 쉽게 이해할 수 없겠지만... 당시로서는 가르침과 배움은 그만큼 절실했었다고 생각된다.

    교육은 지금 당장 결과를 원하는 마음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다. 언젠가 내가 뿌린 씨앗이 먼 훗날 결실을 맺을 것이라는 희망을 붙잡고 가르치는 것이다. 과거의 교육자들은 그러했고... 그러한 교육자들은 그야말로 교사를 '천직 '으로 느끼며 교육에 임했다.

    오늘날 교권이 바닥에 떨어진 상황은 여러모로 복잡하다. 스승의 날이 다가오는데... 스승같은 스승이 없다는 말과 함께... 제자같은 제자도 없다고 한다...

    배움이 끝이 없는 것처럼... 가르침도 끝이 없다고 TV에서 보았다. 단순히 학교에서 배우는 것만 교육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인생의 순간 순간이 배움이고... 가르침이라고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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