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25일 금요일

[0513] 전후의 새 역사를 위한 기독교의 사명

전후의 새 역사를 위한 기독교의 사명


중세기를 지나 근대문명의 건설과 함께 서구의, 소위 기독교 국가들은 전 세계 미개발 지역에 홍수같이 범람하여 제국주의적인 식민지 정책을 감행하였다. 아프리카, 호주, 동남아, 심지어는 고대문명의 대국들인 애굽, 인도, 중국 등에까지 그 독수를 펴서 식민지화에 광분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곳에 감추인 온갖 보화를 파헤쳐 자기들의 금고를 채우고, 그 인간들을 노예화하여 그 고혈을 마셨다. 지금 흑백 등의 인종차별 문제도 이 식민정책 강행과 함께 생겨난 인류의 암인 것이다.

원래 기독교는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종교임에도 이른바 기독교 국가에서는 이 계명 대신에 욕심을 채우고, 영혼 대신에 배를 불리고, 봉사 대신에 지배를 택하고, 사랑 대신에 미움을 심었다. 그리하여 서구의 화려함 속에 동양과 아주의 해골이 호곡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백주의 음모요, 호사 속의 저주였던 것이다. 그 사이에 비교적 예외인 선전운동이 다소의 속량을 가져왔다 할지라도, 자국의 근원적인 악에 도전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세력에 편승하였기 때문에 기독교의 근본 활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도처에서 문화 침략자의 오해를 받게 된 것이다.

이런 근원적인 범과를 저지른 기독교 국가 속에서 자라난 제2세가 현대 문명이다. 물질욕이 윤리를 짓밟고, 혼의 존경이 육욕에 삼킨 바 되고, 사랑은 하나의 ‘센티멘털(sentimental)’로 푸대접받고, 신앙은 우매의 동의어로 다루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공산·자유의 어느 진영을 논할 것 없이 무신론과 유물론의 비탈길에 미끄러지고 있는 것이 현대 문명의 일반적 경향인 것이다. 이런 현대적 ‘에토스’에서 인간은 점점 더 소외되고 허탈과 절망이 늘어간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겪은 현대인들은 온갖 형태의 침략을 막고 선린우호의 국제관계를 수립하는 것만이 세계 평화를 지향하는 길이라 하여 국민을 만들고 문화를 교류시켜 ‘이웃 됨’의 운동을 조장했다. 그것은 기독교의 교훈을 국제관계에 적용하려는 첫 시도였다. 모든 식민지가 독립국가로 탄생했다. 후진국 개발을 위한 경제 및 기술의 원조도 있었다. 이것은 하나의 세계를 지향하는 새 역사 창건의 위대한 운동이었다. 아이젠하워는 평화산업에의 원자력 전용을 선언했고, 케네디는 프런티어 정신을 고조하며 평화군 창건을 제언했다.

그러나 강대국이면서도 아직도 이런 새로운 역사 전환에 냉담하고 오히려 고도로 기술화한 신식민지 정책에 의하여 옛날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다시 달성하려는 나라도 없지 않다. 기독교는 기왕의 기독교 왕국들이 범한 과오를 새 역사에 다시 도입하는 것을 묵과할 수 없다. 모든 형태의 침략에 도전하는 것이 정의와 평화를 위한 기독교의 사명임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댓글 1개:

  1. 강대국들은...
    자신들의 힘을 자랑하고 싶고...
    자신들의 힘을 이용하여 국가적인 이익을 얻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약소국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국익'이라는 것을 내세워서 말입니다.

    그런데
    강대국은 국익을 내세워서 약소국을 침탈하는데...
    약소국은 국익을 내세워서 소수 기득권의 이익만을 추구합니다.

    정의를 세우고...
    평화를 이루는...

    기독교는 자신들의 사명을 망각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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