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15일 화요일

[0469] 역사 안에 임한 그리스도 (1959년 10월)

역사 안에 임한 그리스도–그리스도교에서의 역사 이해


《사상계》(1959년 10월)

[1] 자연ㆍ인간ㆍ역사

자연이라면 그야말로 절로절로여서 다만 존재한다는 것뿐이다. 거기에도 자연법에 의한 변동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되어진 현상일 뿐이고 역사라고 말할 것이 못 된다.

역사는 시간 안에서 자유하는 인간이 어떤 이상을 실현함으로써 생의 공허를 메우려는 활동의 결과이기 때문에 자유하는 인간을 빼놓고 역사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요새 우리나라에 강의하러 왔다는 시드니 후크 교수는 저서 『역사상의 영웅』에서 “역사가 어떤 남자나 여자로 말미암아 조성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어서 약간의 신학자들이나 신비적 형이상학자들을 제외한다면 누구나 다 이것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가 여기서 ‘신학자나 형이상학자’를 꼬집어 말한 것은 역사가 오직 인간만의 무대요, 하나님이나 기타 인간 이상의 다른 아무것도 용납할 데가 못 된다는 실증주의적 입장을 명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논평은 차츰 할 셈치더라도 우선 “역사가 인간의 무대라는 사실을 긍정함에 있어서는 우리도 그리 인색하게 굴 필요가 없다고 본다.”

도대체 인간이 참으로 원하는 것은 실존적인 진리, 즉 그의 진정한 목적을 사실화하려는 그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의 목표를 성취하려는 노력에 있어서 그는 혼자 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우선 다른 사람들의 생활과 엇갈려 있음을 본다. 그는 어떤 자연환경에서 보다도, 그가 출생한 공동사회 안에서의 사회적ㆍ경제적ㆍ지적 조건 등에 의하여 좌우됨을 발견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그는 역사에 의하여 조성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온전히 자기 스스로가 자기의 시작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자기 스스로가 시간 안에서 자기를 완성할 수 있는 것도 아닌 한 그는 역사 안에 존재하면서 역사로 말미암아 조성됨과 동시에 역사를 또한 조성해 가는 피치 못할 역사적인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가 출생한 공동사회의 사회적ㆍ경제적 또는 정치적 조건들이 그를 자동적으로 결정해 버리는 것같이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있어서나 그 인간의 인격적 결정을 거치지 않고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역사란 주로 과거를 말하는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과거가 자동적으로 현재의 인간에게 유입되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역사적 유산은 현재의 하나하나의 인간들의 인격적 결단에 의하여 그에게 수락되기도 하고 거부되기도 한다. 과거의 지적 유산도 현재의 각계 인간의 학습을 통해서만 그에게 역사적인 유산으로 실현된다. 도덕이나 신앙은 더군다나 그러한 것이다. 미래도 역시 그러하다. 인간이 어떤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실현하려는 노력이 곧 그가 역사를 조성하는 것이라 한다면, 현재와 그 실현될 목표와의 사이에 놓여 있는 시간이 마치 생일날 기다리는 어린애들에게서 보는 것과 같은 ‘무의미한 중간시간’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에게 주어진 미래는 그가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는 순간순간 인격적 결단에 따라 사용될 위기의 연속이겠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예부흥 이후의 서양인들은 역사 안에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려는 종교적 역사관을 거부함과 동시에 인간의 종국의 목표를 저세상, 또는 영원에 두려는 신앙을 비웃는 경향이 날로 늘어갔다. 따라서 현대인은 자기의 종국을 현세에 두고 그것을 역사 안에서 실현하는 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과학, 철학, 예술 등 각 부문에 있어서 인간이 현세적으로 가질 수 있는 자연법을 유효적절하게 이용하여 더 좋다고 생각되는 문명을 건설해 가노라면 일은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리하여 역사는 종교적인 드라마가 아니라, 원시시대의 시작에서부터 끊임없는 문명의 고층계급으로 올라가는 자연발생적인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역사의 종교적인 해명 자체도 과거의 어느 미개했던 단계에서의 인간사상이 남겨 놓은 찌꺼기라고 단정해 버린다.

그러므로 현대에 있어서 역사는 결국 ‘인류 문명사’이며, 무지, 질병, 빈곤, 고역 등에 대한 개인적, 사회적 개선의 기록이다. 그동안에 범죄, 타락, 전쟁, 혁명 등이 돌발하였고, 또 여전히 발생할 것이라고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역사가 그 진보를 근본적으로 정지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도리어 그런 것 때문에 인간은 더 나은 선후책을 강구해내는 계기를 발견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리하여 역사는 확실히 진보해 왔고, 또 진보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진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출발점에서 멀어졌다는 것인가 또는 궁극 목적에 가까워졌다는 말인가? 만일 궁극 목적에 가까워졌다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진보’이라면 세속주의적인 현대인은 과연 역사의 궁극적인 종국을 파악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다만 자연적인 사실에 의하여 입증될 이성적 진보라는 데서, 기술적인 발단, 사회생활의 원활동을 목표로 한 것이라면 그것이 궁극적인 것이 아님은 물론이고, 따라서 진보 여부를 측량할 수 있는 표준일 수도 없다.

[2] 인간성의 문제

역사가 인간만이 만들어가는 무대라는 것을 그대로 시인할 때, 맨 처음 걸리는 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성 자체의 문제다. 인간이 힘이 세다, 재주 있다, 기술이 놀랍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간의 가치가 다 측정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도덕적인 요청이 불가피적으로 붙어 돌아가는 것이며, 그것이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측정하는 핵심인 것이 사실이다. 기술적으로 우주여행을 실천 단계에까지 올려놓았다 해서 그 인간의 도덕성이 그만치 앙양된 것도 아니며 그렇게 되어지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인간 전체가 달라붙어 만들어가고 있다는 역사가 도덕에서 유리된 폭력의 각축장으로 화해 있는 것을 보면서도 대담하게 진보만을 자랑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인간성 자체가 이율배반 때문에 도덕적으로 행선(行善)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인 경우에 ‘진보하는 역사’라는 허울 좋은 어휘에 안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호라 나는 괴로운 존재로다!” 하는 개인으로서의 탄식과 아울러 ‘아, 역사의 불가능이여!’ 하고 또한 탄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사람이 그 이성을 통하여 자연을 통어할 줄 알게 된 반면에 역사의 파국에서 희생당하고 그의 이상이 역사의 현실에 굴복하게 되는 것이 오늘의 현상이다. 인간은 인간 자신, 즉 그의 본성으로 말미암아 그 자신을 왜소하게 만들고 있다. 더군다나 인간은 죽는 존재다 할 때 원자탄, 수소탄 등의 폭발은 고사하고 가령 방사능 관계로 인간의 생식기능이 정지되는 경우만을 상상한다 할지라도 불과 한 세대 안에 그 최후의 한 사람이 죽고 – 그리고 지구는 커다란 무덤으로 허공을 돌고 – 도덕적으로 근엄하지 못한 어느 한 사나이가 버튼 하나를 성급하게 눌러버리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는가? 역사는 인간만의 무대라고 생각할 때 점점 더 미쳐 돌아가는 인간의 신경과민과 정신분열증에서 우리는 대체로 초조와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3] 섭리

역사는 사람만이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사람이 하려는 그대로 되는 것도 아니었다. 카이사르가 가장 성공한 통치자였다거나 나폴레옹이나 진시황이 위대한 통치자였다 할지라도 그들도 여전히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운명이랄까 우연, 또는 역사적 필연이랄까에 위협을 받고, 떨며 그 앞에 서 있었다. 그가 분노로 자기에게 일격을 가할까봐 무서워했다. 현대인도 우쭐대며 인간을 치켜세우다가 몇 번 역사에 얻어맞고서는 그만 역사 자체를 우상화하고 그에게 아첨하기 시작했다. 역사의 격류는 우리를 여지없이 밀어 팽개친다. 섣불리 그것에 대항하다가는 섰던 자리조차 없어질 것이니 눈치봐서 그가 미는 대로 떠내려가자는 식으로 되어버렸다. 역사가 마치 자연과 같이 기계적이다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그 결과로는 역사가 비인간적이 되고, 따라서 역사적 회의주의와 상대주의 그리고 비인간적인 경향이 늘어갔다. 이러한 틈에서 그리스도교는 다시 영의 자유로운 창조에 의하여 역사를 해방하려 한다. 즉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며 역사 안에 종교의 힘을 도입하는 자유를 고조하게 된 것이다.

[4] 그리스도교에서의 견해

그리스도교 자체가 역사적인 종교라는 점은 너무나 많이 언급된 것이어서 또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구약이나 신약의 거의 전부가 그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전개되어 있다. 대체로 역사적인 사건의 기술과 해설에 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그리스도도 역사적 인물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역사적 인물이요, 그리스도교가 역사적인 종교라는 데는 현실에 뿌리 박고 있다는 든든한 점도 있지만 동시에 적어도 두 가지 약점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이 화육한 분이라면 절대적이어야 할 것인데, 역사 안에 있는 사람에게서 어떻게 절대를 찾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역사는 과거의 기록에 의하여 전해지고 있는 것인데, 과거의 기록으로서 절대 정확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어디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역사적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종교가 영원을 운위한다면 역사를 초월해야 할 것인데, 그것이 때를 따라 변전하는 역사에 속한 것이라면 함께 유전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그리스도와 역사의 관계를 그렇게까지 평면적으로 이해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리스도가 역사 안에 오신 것은 사실이나 역사에서 난 이는 아닌 것과 같이 그리스도교와 역사의 관계도 그러하다. 그리스도교가 역사적인 종교라고 하지만 역사 자체 안에서 발생학적으로 전개된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역사 이상의 것이 역사 안에 들어와서 또 하나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기록이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역사란 미국 역사와 중국 역사가 별개로 전개된 것과 같은 의미에서가 아니라, 동일한 역사적 사건에 영적·윤리적 차원이 내려와 꽂혀서 종말론적인 새것이 전개됨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믿는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주권자로 계신다. 그가 알파와 오메가, 즉 처음과 나중이시다. 구약성서 맨 처음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한 구절에서 시작하여 신약성서 마감의 “오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한 종말적 완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하나의 목적을 향한 경륜을 가지고 계신다. 창조, 인간의 타락, 구원, 새 창조의 완성은 하나의 ‘드라마’로 연출되고 있다. 자연과 역사는 그 배경과 무대라고 하겠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 스테이지에서의 주연자이시고 기타의 인간은 배우거나 관중일 것이다. 어느 것이든 간에 그 드라마에 다 함께 동참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스토리’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일반 역사에 있어서도 그 주가 되신다. 가이사의 권세가 지상을 지배하고, 그리스도는 언제나 십자가를 진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다.

“나라들이 모반하고 백성들이 헛되이 음모함은 어찐 일인고? 땅의 군왕들이 나서며 제후들이 공모하여 주와 그 기름부은 자를 대적하도다.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시며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그리고 그는 노여움으로 말씀하시며, 격노로 그들을 놀래시리로다. 그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시 2:1~6)

요한복음 첫 머리에 “태초에 말씀이 있으니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시며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가 그리스도신데)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다. 바르트는 이 요한복음 서론에서 전역사(前歷史, Urgeschichte)의 포인트를 발견하고 이것은 역사적ㆍ과학적 개념이 아니라, 신학적ㆍ교리학적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이것은 ‘템포렐’ 이전의 것이어서 ‘영원’을 의미한다. 그 ‘영원자’가 성육하여 역사 안에 들어온 이가 그리스도시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와 같은 사건은 아무 준비 없이 된 돌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 그리고 그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일관된 경륜에서 이루어진 ‘성역사(聖歷史)’, 예언적, 종말론적 의미에서의 Absolute Time Scheme, Heilsgeschichte가 역사 안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며 그리스도의 출현에서 그 클라이맥스를 보게 된 것이었다. 이것은 자연적인 것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신앙으로만 파악될 수 있는 영역이다.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도 이런 의미에서의 증언이었다.

우리는 이상에서 역사는 자유하는 인간만의 무대라는 이해에서 인간 자신이 인간을 인간화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인간 자신의 본성, 즉 인간성이 본래 자유하지 못하기 때문임을 암시하였다. 그는 타락한 존재여서 범죄성의 종이 되어 있으며, 죽음의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조자인 유한한 인간으로서 운명에 항거할 수 없는 것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할지라도 그 종국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자유가 망동이 되고 진보가 서클이 됨을 탄식했다. 그러면 이런 역사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 결국 모든 것을 의심하고 모든 데에 상대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별로 따지지 않고 낙관하거나 따져 보고서는 절망하거나의 두 가지 인간들이 그럭저럭 살아가는 무대가 되었다. 근본적인 재검토가 요청되었다. 그래서 근년에 와서는 자연에서 역사로 그 주 논제가 바뀌는 데까지 이르렀다.

도대체 피조자가 창조주 구실을 하려는 데 그 근본 병통이 있다. 우주와 인생의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을 제외하고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모든데서 소위 ‘절화문명(折花文明)’이 되고 마는 것이다. 역사가 그대로 하나님의 계시인 것은 아니지만, 역사 안에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다. 그것은 성서 기록에서 발견된다. 이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려는 그이로서의 경륜을 가지고 계시다. 그것이 하나의 드라마와 같이 일반 역사 안에서 연출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난 타락한 인간의 존재 자체에 관심을 가지시고 그것부터 변혁시키는 프로를 진행시켰다.

하나하나의 인간이 우선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그 근본에서 돌이켜야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영의 사람으로 새로 지음받아 인간성의 거듭남을 입어야 한다. 그리고 그는 역사 안에서 ‘가루 서 말에 품겨진 얼마의 누룩’이 그 가루 전부를 발효시키는 듯이 일반 역사를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변질시켜 가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옵소서.”,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는 기도는 이런 의미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복음의 전달과 무조건 앞서 베푸는 거룩한 사랑, 아가페의 실천으로 인하여 성령의 역사 안에서 되는 것으로 약속되어 있다.

크리스찬은 역사에서 도피하지도 않고 역사에 몰입하지도 않는다. 그는 영으로 다시 난 인간으로 역사 이상인 하늘나라에 속하면서 역사 안에 있어, 역사를 그 하늘나라, 즉 구원사의 전형에 의하여 조성해 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전 인류가 형제자매로서 서로 사랑으로 화육되어 가는 거룩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크리스찬이 지향하는 역사의 목표다.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의 속량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것과 같이 역사도 그러하다. 역사 안에 있으면 자동적인 진화에 의하여 결국은 저절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도 아니요, 역사가 구원을 가능케 하는 본체인 것도 아니다. 역사는 오히려 개인보다도 도덕면에 있어서 뒤떨어져 있다고 니버는 지적하였다.

크리스찬의 구원은 역사의 피안에 있다. 역사는 시간에서의 사건이므로 영원일 수는 없다. 역사는 종국이 있다. 그러나 그 종말은 반드시 파괴적인 스텝이 아니라, 영원에의 완성이다. 크리스찬이 일반 역사를 그대로 천국화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속량받은 인간으로서 속량사회를 건설해 나가노라면 어느 정도, 하나님의 거룩한 가정이 지상에도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역사 안에서의 이러한 수고는 반드시 궁극의 성취에 그 의미를 더할 수 있다. 역사가 끝끝내 “하나님과 그 기름부은 자”를 반역할 때 치명적인 심판이 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연법의 운행과 같이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역사의 궤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하여 역사에는 예측하지 못한 결과가 오는 것이다. ‘망할 세상’이라고 팔짱 끼고 앉아,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은 그리스도의 심정에 온전히 배치되는 것이다. 최대의 선이 불가능한 때 비교급의 선에라도 용감해야 한다. 그러노라면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그의 좋으신 뜻대로 섭리해 주실 것이다. 여기서 인간으로서의 불가능이 하나님의 전능 아래서 해소됨을 본다.

역사는 반드시 변증법적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유물론적 변증법이 적용될 정도로 기계적인 것이 아니다. 역사에는 자유하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가 언제든지 있다.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고 계시록에 씌어 있다. 카이로스는 ‘때가 차매……’ 라는 일정한 시간을 말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찬’ 때는 당장 우리 앞에 순간순간 제공되는 것이다.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한 바울은 그의 앞에 간단없이 육박해 오는 하나님의 기회를 포착하기에 그가 얼마나 바빴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역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일러지는 것이 예언이요, 역사 안에 ‘말씀’이 육신을 이루어 들어오신 것이 그리스도시다. 이 말씀을 기점으로 하여 역사의 시작을 보고 말씀의 진전 과정에서 역사의 과정을 비판하고 말씀의 지향하는 종점에서 역사의 궁극을 찾는다. 이리하여 역사 이상의 것이 역사 안에 들어와 역사를 심판하고 역사를 속량하고 종당에는 그것을 완성하는 ‘여호와의 날’이 없다면 역사의 흥망성쇠는 무의미한 반복이요, 권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심이라고 틸리히는 말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인간 역사는 심판을 받고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그 종국이 명백해졌다. 그리스도는 시간의 중심에 서서 과거와 미래를 주장하시는 시간의 주라고 한다. 이런 수직선적인 다른 차원이 역사 안에 들어오지 않는 한, 역사는 타락한 인간들의 죄악의 시궁창에서 몸부림치는 난무로 화한다. 될 것 같으면서도 안 되는 것이 유토피아다. 이 불가능을 기도하는 인간 역사 가운데 하나님은 고요히 그의 구속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계신다. 크리스찬은 이 ‘하나님 나라’의 역군으로 소집된 사람들이다. 이것을 증언하면서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심경의 소유자다.

우리나라는 4000년 역사를 가졌다고 자랑한다. 유구하다는 것만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 학교 동리에 30대째 산다는 집이 외로이 서 있다. 그 집주인은 몇 천 평의 뙈기밭을 갈며 오막살이에 기거하면서도 그 30대째라는 긍지로 좀처럼 이사를 가려 들지 않는다. 30대라면 아마도 신라 말이나 고려 초부터 여기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몇 천 년 간 밭에 오막살이 그리고 고루할 정도의 자만심이 그 유산일 뿐이다. 평면적인 역사의 흐름에 입체적인 무엇이 돌입하여 종말과 신생을 함께 경험하는 무슨 사건이 있기 전에는 이 30대를 한 곳에서 살았다는 한 빈농이 그대로 우리 4000년사의 상징이 될 우려가 농후하다.

우리가 얼른 생각하기에는 거리의 선거 연설, 국회의 변론, 행정부의 지시와 명령, 군대의 강함 등등에서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그것은 지나가게 마련인 것이어서 결국 이야깃거리를 남기고 가버리는 바람 같으나, 이름 없는 하나의 하나님의 사자가 고요히, 그러나 하늘의 환상을 품고 빈민촌, 가난한 농민들, 노동자 사회, 또는 학교의 교단, 병원의 진찰실, 교회의 강단, 또는 아프리카의 밀림 등에서 함께 기도하고 사랑으로 융합하여 하나님의 구속사회를 세워 나간다면, 우리는 거기에서 우리의 역사가 하늘의 영으로 영원에 통하여 성장하는 실존이 되어짐을 느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하고 바울은 말하였다. “적은 무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아버지께서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는 것이 그의 기뻐하시는 뜻이니라.” 하고 그리스도는 적은 무리에게 격려의 말씀을 남기셨다.

크리스찬에게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라는 말씀을 부탁하셨다. 우리는 우리나라 역사에 책임이 있다. 그것은 ‘템포래저’한 평면적인 의미에서보다도 입체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과 화목한 역사를 만드는, 말씀의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전 세계적으로 또한 이 역사에 대하여 같은 책임을 수행해야 한다고 믿는다.

댓글 1개:

  1. 크리스찬은 어떤 역사의식을 갖고 있어야 하는가?
    장공의 글 중에 다음과 같은 글이 마음에 남는다.

    =-=-=-=-=-=-=-=

    어떤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하여 역사에는 예측하지 못한 결과가 오는 것이다. ‘망할 세상’이라고 팔짱 끼고 앉아,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은 그리스도의 심정에 온전히 배치되는 것이다. 최대의 선이 불가능한 때 비교급의 선에라도 용감해야 한다. 그러노라면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그의 좋으신 뜻대로 섭리해 주실 것이다. 여기서 인간으로서의 불가능이 하나님의 전능 아래서 해소됨을 본다.

    =-=-=-=-=-=-=-=

    어차피 최대의 선은 인간의 역사에서의 선택에서 존재하기 힘들다. 선거에서 100% 지지를 받고 지도자가 되는 사람은... 독재국가에서나 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오늘날 선거의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내가 선호하는 후보(내가 생각하기에 최대의 선)가 경선에서 탈락되었기 때문에 차라리 상대방 후보를 찍겠다는 주장이 심심찮게 제기된다. 그것이 지금까지 자신들이 주장했던 '정의'를 위해 소신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현실 타협은 아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역사라는 현장 속에서 이런 상황이 발생했을때...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책을 선택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된다. 만약 최선이 아니기에 차악을 선택하는 경우는... 그나마 지금까지 나름대로 만들어온 역사적 발전의 가능성을 뿌리부터 흔들어 놓는 경우가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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