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14일 월요일

[0258] 그리스도와 교회 - 1953년 4월

그리스도와 교회(엡 1:20~23, 2:2~22)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동안에는 교회가 없었고 교회를 세우지도 않았습니다. 교회를 세워야겠다고 말씀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때가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는, 말하자면 ‘시기상조’라는 이유도 있었겠습니다만, 그리스도 자신이 교회 이상인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는 진리를 설명하는, 체계선 철학을 쓰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 자신이 곧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곧 진리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성전을 건축하는 데 흥미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성전보다 더 큰 분이 그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이 자신이 산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이가 세상에 계실 동안만 유효한 것이었습니다. 신랑이 잔치자리에 있는 동안 금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신랑이 떠난 다음에는 저절로 경우가 달라집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다음 제자들은 몸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과 그리스도와의 사이에는 하늘과 땅의 간격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허전했습니다. 핍박까지 닥쳐옵니다.

그들은 또 하나의 새 질서가 생겨나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에도 물론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었고, 각 지방에는 회당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서는 제자들의 공허를 메꿀 수 없었습니다. 성전도 회당도 ‘조개껍데기’요, ‘빈 무덤’이었습니다. 아무 새 생명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위로부터의 새 약속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순절 날 그들은 하늘로부터의 성령 강림을 체험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영의 불이 붙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육의 사람에서 영의 사람으로 다시 났습니다. 이제 그들은 시몬, 요한 등 단순한 자연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변화된 자기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서로 간격 없이 친해졌습니다. 서로 섬기고 싶어 못 견디었습니다. 복음 증거에 열이 올랐습니다. 예배와 가르침이 즐거웠습니다. 각기 흩어져 자기 집에 가기가 싫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 덩어리로 뭉쳐 한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내 것, 네 것 없이 필요에 따라 소유를 나누어 씁니다.

이것은 무슨 법을 만들어 외부로부터 규제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무슨 구제기관이나 사회단체에 속하지도 않았습니다. 안에서 저절로 솟구쳐 나오는 사랑의 샘이 밖으로 넘쳐흐르는 새 생명의 당연한 열매였을 뿐입니다. 그것은 영의 자유, 사랑의 교류, 인격의 개방이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근본 모습입니다.

유월절을 계기로 예루살렘에 모여든 참배자, 순례자는 각양각색의 인간들이었습니다. 각 나라, 각 지방의 흩어진 유대인 또는 개종자들이었습니다. 사고방식으로나 습속으로나 문화 배경으로나 교양 정도로나 무던히 다채로운 무리들이었습니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성령강림에서 크리스찬으로 그 이름이 생명록에 기록됐다는 새 감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동생활의 캠프에 들었습니다. 3,000∼4,000명의 식사 제공만으로도 일은 고됩니다. 공정을 기하지만 불평이 없을 수 없습니다. 사도들은 너무 분주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가르칠 사이도 없었습니다. 기도하고 준비할 사이도 없게 되었습니다. 무언가 좀 더 능률적인 조직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직책을 나누어 맡자는 것이었습니다. 집사를 뽑아 생활 운영의 책임을 맡기고, 사도들은 말씀 증거에 전념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목사와 평교인이란 두 지체가 한 몸인 교회에 유기체적으로 연합된 첫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이 조직교회의 기본 모습입니다.

그때로부터 약 2000년, 교회의 근본 모습은 변한 바 없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몸이 갈기갈기 찢어질 수 없는 것과 같이 교회는 하나다. 교회는 사도 전승의 메시지를 이어받는다. 그 전승의 주류는 성경이다. (가톨릭에서는 교권을 더 중요시한다.) 교회는 보편적이다. 나라나 지방이나 민족이나 문화에 따라 본질적으로 딴 교회가 될 수는 없다. 교회는 거룩하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교회도 거룩하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장 중요한 행사는 예배다.” 대략 이런 것으로 교회는 발전, 성장한 것이었습니다.

70년, 예루살렘은 로마 군대에 의하여 완전 폐허가 되었습니다. 하루에 200만이 학살되었다고 합니다. 성전은 돌 하나 돌 위에 겹놓이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예언대로 재빨리 도망쳤습니다. 우선 소아시아 지방으로 피난했습니다. 성령의 불꽃은 피난 신자들과 함께 그들 동리에 점화되었습니다.

사도들도 더러는 순교하고 더러는 피난하였습니다. 그것은 피난을 위한 피난이라기보다도 선교를 위한 피난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 개종자인 고넬료에게 선교했습니다. 성과는 물론 놀라웠습니다. 이것이 이방인에게 선교한 첫 사건이었습니다. 집사 빌립은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전도하고 세례까지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에티오피아는 기독교 국가로 자처하고 있습니다.

사도 토마스는 인도에 선교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인도에 토마스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본격적인 세계 선교사는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는 제일급의 지성인이면서 전문적인 율법학자였습니다.

그는 로마령 길리기아 지방의 주수도인 다소 태생으로 헬라 문화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율법주의자로서는 흠잡을 데 없는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베냐민 지파의 후예요, 문장과 변론에 능숙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로마제국 판도 안을 세 번이나 돌았습니다. 자비 무전 전도 여행자였습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 소유자였습니다.

기독 신자는 전 세계에 편재하게 되었습니다. 주로 이방인 신자들입니다. 그의 편지는 그대로 성경이 되었습니다. 그는 땅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거룩한 정열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는 소아시아, 로마, 그때 땅끝이라던 스페인 할 것 없이 전 세계를 자기의 목회 교구로 얼싸안은 세계 교회 목회자였습니다.

기독교인은 세계적으로 늘어 무시하지 못할 존재가 되었습니다. 유대교인들이 시기합니다. 이방인들은 신을 석상, 목상 또는 그림으로 물체화하는 것이 전래의 습속인데, 기독교인은 그것을 우상숭배라 하여 금지했기 때문에 무신론자로 몰려 심한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로마 황제는 자기를 살아 있는 신이라 하여 자기에게 예배하라고 칙령으로 강제합니다. 거기 불응하면 ‘비국민’이란 죄목으로 사형에 처합니다. 비국민자는 국가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없다는 약점 때문에 재산은 약탈당합니다. 호소할 데도 없습니다. 숨으면 찾아내는 대로 사형입니다. 크리스찬은 스스로를 고백하고 순교를 자원합니다.

지하에서 기도하고 예배하고 친교하고 순교합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면 그에서 더 큰 사랑은 없다.”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로마의 카타콤은 그런 종류의 유적입니다. 이것은 땅속에 심어진 하늘의 씨앗이었습니다.

‘콘스탄틴’이라는 탁월한 정치가가 지방의 제후로 있었는데, 그는 유명한 전략가요 군사 지도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 지하의 기독교도가 무서운 잠재세력이란 것을 미리부터 간파하고 그 자신이 기독교 신자로 등록 했습니다. 그리하여 기독교인의 절대적인 지지 아래서 로마시를 수중에 넣었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날리며 로마의 가이사가 되었습니다. 지하의 크리스찬은 모두 지상에 올라왔습니다.

로마제국의 조직체를 본떠서 교회를 조직화했습니다. 법왕이 있고 추기경이 있고 주교가 있고 신부가 있습니다. 교회법전이 있습니다. 로마적인 교회가 국교로 됐습니다. 교직자는 일약 귀족이 되었습니다. 황제도 법왕 앞에 무릎 꿇고 면류관을 받습니다. 법왕이 인정하지 않으면 황제도 황제 노릇을 못합니다. 법왕은 교회 정치만이 아니라 국가 정치도 자신의 권력 안에 포함시켰습니다.

인간 구원은 사실상 법왕에게 쥐어져 있었다 하겠습니다. 법왕이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고, 법왕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인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교회 안에 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교회는 하나다. 그 하나인 교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다. 그러므로 로마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이것은 사도 전승이란 것을 신학화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셨다. 로마 교회의 첫 감독이 베드로였다. 베드로가 죽으면 그 열쇠는 다음 감독에게 전승된다. 그러므로 구원은 로마 교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천국 열쇠 얘기는 예수에 대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에서 기인된 기록인데, 로마 교회에서는 신앙고백보다도 교권 계승에 치중한 것이었습니다.

16세기에 신대륙의 발견과 상공 계급의 발전과 지방 제후들의 권력 분점과 북방민족의 침입과 농민 반란 등으로 로마 가톨릭의 권력도 약화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국가 권력의 강화에 따르는 민족국가 독립운동이 성공하면서 로마 교회 자체 안에도 내부 개혁, 말하자면 근대화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교황 요한 23세는 개신교와의 친교를 추진시켰습니다. 신교의 교회도 교회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신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말이겠습니다. 로마 교회에서는 WCC(세계교회협의회)에도 방청 사절을 보내어 진지하게 의견 교환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친교와 협력은 한국에서 첨단을 걸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학순 주교의 강력한 민주 한국 운동과 김수환 추기경의 폭넓은 행정 능력 등이 이에 공헌한 바 크다고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의 선교여행이 주로 그리스 지방이었기에 그 지방의 교회들 은 자기들의 정통성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후에 그리스 정통교회가 생겼고, 동로마제국의 세력 아래서 정권에 좀 더 유착됐다고 볼 수 있는 동부 정통교회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번창하였습니다. 그 종파가 러시아에 이식되어 러시아 정통교회로 되었습니다. 이 종파는 교회의 독자적인 발전보다도 호국 종교적인 성격이 농후했기 때문에 공산혁명의 성공(?)과 더불어 가혹한 핍박과 시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강대한 교회들이 일찍부터 피압박 계층의 대변자가 되고, 빈농과 노동자와 생활고에 시달리는 서민층의 진정한 봉사자로 그들의 곤고를 분담하였더라면 그 나 라들의 운명도 달라졌을 것이 아닐까 하고 아쉽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이 공산진영 안의 교회들이 지금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은 꺼지는 등불도 끄지 않고 상한 가지도 꺾지 않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덕택일 것뿐이겠습니다.

우리나라 북한에는 교회가 아주 없어졌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그 카타콤적 존재에 대하여는 하나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이북의 교회들이 6・25 동란을 전후하여 대거 남한에 옮겨왔다는 것도 지금의 이북교회 현황에 적잖은 인과관계를 남긴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 전 세계 교회들의 현상이 대략 이러하다고 본다면, 그 현실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입니까?

상술한 교회들의 역사, 교리, 조직, 의식, 생활양식 등이 똑같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그 교회들이 단순한 인간집단이라든지 사탄의 집회소라고 규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모두 “하나님의 성회여서 죄는 없느니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거듭나고 성화됐다 하더라도 인간은 역시 인간이어서 범죄성이 남아 있고, 세속적인 획득욕이 있고, 정욕의 환락을 원하는 데가 있습니다. 이런 인간들이 교회의 구성원들이니 그 교회가 완전한 성회 일 수는 없습니다. 죄를 지어도 죽는 데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이 은혜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거듭거듭 회개와 고백과 용서와 성령의 도우심을 기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영원한 대제사장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밤낮으로 대도(代禱)해 주십니다.

위에서 잠시 언급한 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우리 교인들은 그 몸에 연합한 지체들입니다. 몸이 죽으면 지체들은 따라서 죽습니다. 동시에 지체 없는 몸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1장 20~23절에서는 그리스도와 교회는 한 몸인데, 그리스도는 머리요, 우리는 지체들이라 했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는 일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있는 곳에 그리스도가 있다는 로마 교회나, 그리스도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는 개신교회나 결국은 같은 하나의 두 얼굴일 뿐입니다.

어쨌든 그리스도 없이는 교회가 없다는 초점은 일치돼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20~21절에는 교회를 한 건축물로 비유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간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고 했습니다.

이런 말씀은 모두 그리스도와 교회가 구분은 있으면서도 분리는 될 수 없는 ‘한 몸’이란 것을 표출하려는 노력이라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9장 1~9절에 사울(바울의 옛이름)은 스데반을 죽이고 그리스도인을 멸절시킨다는 사명을 갖고 다메섹으로 출정할 때, 그 사막지대에서 그리스도를 만났답니다. 그때 그리스도의 말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했습니다.

사울이 핍박하고 죽이고 한 것은 예루살렘의 신자인 이 사람 저 사람들이었고 예수 자신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자신을 신자 하나 하나와 온전히 일치시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방향에서 신자와 교회와 그리스도는 일치되어 있는 것입니다. 신자 한 사람이 괴로우면 신도 모두가 괴롭고, 교회가 전체적으로 괴롭고, 그리스도 자신이 괴로운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교회의 할 일은 그리스도의 유훈을 지켜 그의 일을 이 세상에서 계승, 진전시키는 그것이겠습니다.

그 유훈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하만방에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이웃이란 것은 나 이외의 모든 인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한다면 원수까지도 포함됩니다.

이웃 사랑은 사회 정의를 내포합니다. 불의한 사랑은 의와 사랑을 함께 더럽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교회는 이런 인격 하나하나의 안에 있습니다. 이런 사람 한둘이 모여도 거기에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조직체로서의 교회, 정연한 교리 체계에 터전을 잡은 교회, 각자의 민족 전통 위에 수립된 교회, 신비한 영험에서 그리스도의 신비체(mystical Body)를 쳐다보는 교회, 심지어는 난세에 속출하는 소위 유사 기독교 등에도 그리스도의 편향이 어디엔가 끼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왜곡된 그림자일 수는 물론 있겠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스스로 교만하여 자기들의 교권욕, 금전욕 등에 미혹하여 진정한 그리스도를 배우려 하지 않고 만나려고도 하지 않는 ‘게토’에서 탈출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셔야 합니다. 그가 모퉁잇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회원들은 ‘그’에게 봉사하고 그에게 일차적인 충성을 바쳐야 합니다. 그것이 당연한 예법입니다. 그는 인간 사랑을 위해 수난의 전선에 나갑니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일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의 고난에 동참하지 않으면 그의 영광에도 동참하지 못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1953년 4월)

댓글 1개:

  1. '독점욕'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독점욕'은... 예수는 우리 교단만 사랑해야 하고... 다른 교단은 예수님이 덜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발전합니다.

    예전에 가톨릭이 그랬고... 종교개혁 이후에 개신교회가 그래왔습니다. 특히나 교회는 '이단 심판'이라는 것 때문에... 그것을 교묘하게 활용해서... 상대방을 정죄하는 것 까지 발전합니다.

    단순히 어느 지점... 어느 라인에 서 있기 때문에 정통이라는 인식을 하지 말고... 나와 내가 속한 공동체가 예수의 삶과 십자가를 따르기 위해 노력하는 것 속에서 정통에 대한 인식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내걸고 활동하는 오늘날의 많은 교회들이나 종교단체들의 모습을 보면... 정말로 예수님이 이렇게 쪼잔한 존재였을까? 이런 생각도 드는 상황까지 발생합니다.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에 참모가 "주님이 우리편이 되어달라고 기도합시다" 했을때, 링컨이 "주님이 우리편이 되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우리가 주님의 편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라고 수정해 주었다는 일화가 갑자기 생각이 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주님을 우리편으로 끌어오려고만 노력한 것은 아닌지...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주님의 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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