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8일 화요일

[0204] 총회에 보내는 말씀 - 1950년 3월

총회에 보내는 말씀


「십자군」1950년 3월

나는 본지 속간 제1호에서 우리 교회의 진로에 대하여 간단하나마 언급한 바 있었다. 이제 나는 우리 총회의 개회를 앞두고 몇 가지 더 진언하는 것이 나의 의무임을 느끼어 아래와 같이 써 보내는 바이다.

(1) “정통신학”에의 과신

우리나라 장로교회 안에는 정통이라고 하면 덮어놓고 안심하는 일부 지도자와 다수의 순진한 신도가 있다. 그러나 “정통주의신학”이란 것은 그리 신임할 것이 못될 뿐 아니라 도리어 복음의 본질에 역행하는 바리새적 율법주의에 타락하는 위험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에 있어서의 소위 “정통주의신학”이란 것은 교회의 자라는 속 생명에 보조를 같이 하지 못한 신학으로서 마치 경화된 외피와 같이 탈락될 운명에 있는 것이다.

반석 위에 지은 대건물인줄로만 생각하여 온 “정통신학”이란 사실은 모래 위에 선 것이었다는 점은 지극 간단하게 입증되고 만다. 정통신학의 성립은 이러하다. 즉, 성경은 신교회에 있어서 최고 최종의 권위다. 이 성경은 문자 그대로 절대무오다. 그런데 이 성경기록은 문자적으로 정돈하여 체계화한 것이 정통신학이다. 그러므로 정통신학은 절대무오다.

그리고 교회에 있어 최고 권위를 보유한다. 하는 주장이다.

그런데 성서문자문오설이란 것은 성경 사실 자체가 이를 부인하고 있다.

다음으로 설사 이 성경 자체는 무오하다 셈 치고라도 이 성경기록을 해석하며 그것을 정돈하여 체계화하여 소위 “정통신학”을 수립한 주체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정통신학이 절대무오를 주장하려면 성경자체가 절대무오일뿐 아니라, 그 신학자의 성경해석이 절대무오하며 그의 정리태도와 方法(방법)이 절대무오하며 그의 구성한 논리체계가 절대무오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인간이 적어도 그 직분에 있어서는 절대무오한 인간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 신교회내에 이런 “법왕”이 과연 몇분이나 있는지 알 수 없다.

혹 말하기를 성경을 해석 또는 정돈할 때에 비판적 태도를 취하지 말고 성경에 쓰여져 있는 문자 그대로를 기계적으로 정돈만 한다면 인간적 과오가 섞이지 않을 것이 아니냐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므로 과연 성경의 진의를 파악할 수 있는가? 문자보다도 정신, 나타난 말보다도 저자의 본의를 옳게 이해하여야 성경을 옳게 이는 것이다. 그리고 시대적인 진리와 영속한 진리, 각 시대상의 반영과 하나님의 말씀, “말씀”의 형식과 내용 등을 명철하게 분간하는 능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든다면 성경의 쓰여진 문자와 형식에 충실하기는 바리새인 이상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을 몰랐으며 때의 표적도 몰랐고 하나님의 그 시대에 나타내신 뜻도 몰랐었다. 그리하여 자기들의 전통적 지위를 보전하려는 권세욕 때문에 예언자를 몰라보고 하나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치명적인 범죄행위를 감행하였던 것이다.

계시의 형식과 내용을 분간한다는 것도 상식적인 진리다. 우리가 짧은 기간을 살면서 사람을 가르치는데 있어서도 애기에게는 “돌맹이가 말하고 호랑이 담배먹고”하는 등 동화형식으로 가르친다. 그리고 소학교, 중학교, 대학교 각각 다른 형식을 취한다. 애기 때에 동화양식으로 가르친 기록을 문자 그대로 믿노라고 해서 “돌맹이가 말했다”고 했으니 그 때에는 돌맹이가 말했을 게라, 그렇게 믿지 않는 사람은 “이단”이다. 하고 야단을 한다면 퍽이나 우스울 것이다. 그러난 정식이야 동화든, 강의든 간에 그 속에 품겨 있는 교훈, 동화가 그 형식을 “통하여” 아이들에게 심어 주려고 한 그 진리를 파악하여 오늘에도 그것을 살리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 형식을 통하여 그 정신, 내용을 붙잡은 사람이기 때문에 비로소 옳게 안 사람일 것이다. 성경이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성경의 기사를 비판없이 기계적으로 정돈한다고 옳은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더 어리석은 결론을 가져오고 말것이다.

그러므로 소위 “정통주의자”가 자기를 절대화할 아무 근거도 없는 것이다. 도리어 자기 교만을 조장하여 분란을 일으키는 것밖에 다른 아무 소득도 없을 것이다.

* * *

원래, “정통”이란 말처럼 애매한 말은 없다. 카톨릭은 자기네만이 “정통”이라고 하고 “동방교회”는 이름부터 “정통교회”라고 해서 자기네만이 정통이라고 주장하고, 신교의 각파도 역연하여 각파가 다 자기네가 “정통”이라고 주장한다. 보편적으로 통용될 “정통”을 보증할 권위의 소재가 무엇인가? 박형용 박사는 “성경”이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어느 교파든지 간에 자기네만이 “정통”이라고 주장할 때 성경에 근거하지 않고 주장한 자가 어디 있는가? 다 성경에 근거한 것임을 주장하는 “정통”임에도 불구하고 제 각기 그 내용이 다르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어느 교파나 다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오늘날까지 존속해 오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우리 총회로서는 좀더 흉금을 넓혀서 세계교회의 동향을 겸손하게 살펴 이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여 그 본류에 보조를 함께 할 것 뿐이요 낡은 부대와 같은 “정통신학” 체계 속에 폭발하려는 새 술을 가두어 두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진정한 “정통”이라는 것은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그 맘에 뫼심으로 그의 심정을 가장 잘 이해하여 그의 마음을 마음으로 하고 그의 사랑을 체현하려는 일편단심에 살고 죽는 사람일 것이요 어떤 관념을 신화한 신학체계나 운위하는 자가 아닐 것이다. 정통신학은 순수한 그리스도교가 헬라 시장에 중독된 첫 산물이었다.

(2) 신조의 견지와 신앙 양심의 자유

신조는 신자의 공통된 신앙고백으로 교회의 연합과 화평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신자의 양심을 외부적으로 심판 속박하기 위하여 설정된 “율법”이 아니다. 그 반면에 양심의 자유란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감동하심이 신자의 심령에 임한때 그것을 인위적으로 거부하는 불경건을 막기 위하여 있는 것이요 그리스도교의 근본 사실과 신앙의 법칙을 전연 무시하는 무법주의적이요 방종적인 자유를 용인하려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지금까지에 “정통주의”신학자들은 신조를 신앙고백적인 입장에서 신앙 대상적인 입장에 올려 뫼시고 거기에 불변의 객관적 권위를 부여하여 그것으로 심판과 제재의 무기를 삼는 과오를 범하였다. 그리하여 신조를 옹호한다는 의미에서 도덕의 규범과 양심의 자유를 유린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데까지 이르렀다. 그 반면 극단의 자유주의자(우리나라에는 해당자가 없지만)는 주인의 자유를 너무 과신하는 나마지 신조의 지위를 전연 무시하는 폐단이 있었다.

이 둘의 관계는 원심력과 구심력의 관계와 같아서 둘이 반대되는 데를 지향하면서도 우리 신앙에 긴장성을 주어 건전한 자리를 지속하게 하는 것이다. 미국북장로교회가 전폭적 분열의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건전한 발전을 보게 된 것은 교회지도에 있어서 이 원리를 옳게 살린 까닭이다. 이 점에 있어서 “오번학인서”(Aubun Affirmation)의 공적이 컸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우리 교회에서도 가장 근본되는 신조를 될 수 있는대로 단순화하여 그것으로 경계선을 삼고 그 안에서 성경해석의 방법이나 그 근본교리를 설명하는 학술 등에는 각자에게 학적, 신앙적 양심의 자유를 허여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 아들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내 구주로 믿고 그를 사랑하며 그의 뜻을 따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려는 자면 성도의 교제에 참여할 형제 자매로 규정지어서 잘못이 없을 것이다.

이 근본적인 것만 같으면 그 이하의 상이한 점에 있어서는 서로 호의로 이론과 의견을 교환하여 서로 보충하여 나갈 것이요 결코 “적”으로 치부하여 배격과 섬멸을 선동, 획책할 것이 아니다.

이번 총회원과 선교사들에게 만일 이 지혜와 아량만 있다면 지금까지의 교회를 덮고 있던 암운은 일소되고 명랑한 가운데 주의 복음이 빛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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