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24일 금요일

[귀국이후] (13) [1720] 水原(수원)에서

[1720] 水原(수원)에서

1983년 11월 13일(일) - 수원교회 윤기석 목사가 一泊二日(일박이일) 집회를 청하기에 갔다. 尹牧使自身(윤목사 자신)이 차 갖고 와서 함께 그리로 갔는데 밤 집회에 얘기하라는 것이다. 새로 지은 예배당인데 약 4백명 정도의 수용능력일 것 같았다. 大學生(대학생)들도 얼마 와 있었다.

수원 農大(농대) 헌신규 박사가 식사를 차렸다. 玄博士도 老衰(노쇠)해서 은퇴中이나 夫人은 아직도 팔팔하다.

나는 “生命(생명)의 尊嚴(존엄)”에 대하여 말했다. “풍성한 생명”이란 제목이다.

후에야 알았지만 그 주일이 “生命文化創造”(생명문화창조)를 위한 “世界敎會 共通主日”이었다고 한다. 우연한 일치라 할까?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全能者(전능자)의 섭리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날 저녁에는 따로 靑年(청년) 집회를 열기로 하여 만반 준비를 다해놓고 강사인 문익환 목사를 기다리고 있는 판죽이었다. 그런데 위에서 言及(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 리건 대통령이 서울에 와 있는 관계로 일선민주운동 지도자들이 가택감금 되었고 문익환도 外出(외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분격한 학생들은 이튿날 가두데모에 나서서 5인이 연행되었다. 윤기석 목사 맏아들인 서울 의대생과 그 밖에 4, 5인이 연행된대로 돌아오지 않아서 윤 목사는 밤중까지 분주했고 결국 윤목사의 신병보장 다짐으로 풀려 나왔다.

당국에서는 어른 예배에 “空”이 내려가고 젊은이 학생 집회에 문익환이 간다니 무슨 선전 데모나 꾸미는 것이 아닌가 우려했던 모양이었다. 때가 나빴다 할까? 직무상 점수따기라 할까?

1983년 11월 14일(월) - 윤기석 목사의 안내로 思悼世子(사도세자)의 莊陵(장릉)에 참배하고 龍珠寺(용주사)에도 잠시 들렀다.

모두 한시쯤 돌아와서 김영규 長老의 초대로 盛饌(성찬)을 대접받고 慶姬(경희) 同乘(동승) 우이동 집에 왔다. 윤 목사와 경희는 한신 동기 동창인데 부부가 되어 힘을 모아 목회에 성의를 바친다. 人和(인화)에 더욱 유의해야 하겠다. 孟子(맹자)의 “天時不如地理 지理不如人和”란 金言(금언)을 남기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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