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26일 화요일

[1152] 장공칼럼 - 3.1 야화(夜話) : 3월은 “3.1”의 달

[1152] 장공칼럼

3.1 야화(夜話)
3월은 “3.1”의 달

3월의 영광은 3.1에서 불탄다.

1919년의 3.1독립선언

1976년의 3.1구국선언

그리고 금년 해외동포들의 3.1절 총연합 운동과 행진. 금년이 58주년이라지만 3.1정신은 늙지 않고 다시 젊어 진군한다.

3.1정신은 연합한다

1919년의 3.1운동에서 가장 놀라운 깃발은 연합-연합군의 연합전선이었다. 천도교 기독교 불교가 연합군으로 편성됐다. 남자, 여자, 노인, 장년, 학생, 소년 모두가 연합된 대열을 달렸다. 유흥계의 기생, 유녀, 요리사와 소사 모두가 비밀연락 통신부대였다. 떡장수의 떡광주리 속에 독립선언서가 잉태된다. 거지 발싸게가 독립선언의 용암(熔岩)을 밟고 띈다. 총사령관도 직속장교도 없다. 있다 해도 모르게 있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연합, 이렇게 늠름한 총진군, 그리고 이렇게 영웅적인 전투가 치밀어 펴졌다는 놀라운 사실 - 이것은 민족생명의 분출이었다.

가시밭 길을 간다

일제(日帝)의 뱃속에 경련이 인다. 데라우찌(寺內)총독은 몸이 뒤틀린다.

때마침 고종황제 인산(因山)날이라, 전국 유생이 상복입고 거리에 운다. 서울은 白衣人의 바다다. 거리는 그 해일(海溢)이다. “데라우찌”도 눈이 뒤집혀 떨었다. 폭력 대 비폭력 – 총, 창, 칼, 그리고 일인들의 죽창, 소방대 물총, 일경들의 말발굽 - 쏘고 때리고 밟고 짓이긴다. 흰옷에 피는 돋보여 , 5백년 옛도읍 피거리로 움직인다. 그래도 “대한독립만세” 산울림은 해소(海嘯)가 되어 세계 만방에 메아리친다.

새 총독 “사이또오”(濟藤實)는 같은 군인이라도 해군이어서 “인간”시야가 넓은 것 같다고 한다. 그럴지 모른다.

남대문역에서 강우규의 폭탄이 터진다. 그것은 한민족의 폭발하는 분노다.

그는 폭력에서 문화에도 통치의 방향을 돌렸단다. 그렇다고 주둔일군이 얌전해질 리는 없다. 일본에 문화가 있었다면 백제, 신라, 고구려 이주민들의 문화일 것이란다. 일본 황실도 한민족이란다. 물론 “토종” - 즉 본토족이 있었을 것이다. 남만(南蠻)이라는 남양토인, 북쪽에서의 아이누족, 그리고 원시 동양족이 섞여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 이전의 인간이 인간에게 역사의식이 있을 리 없다. 문자(文字)가 없었으니 기록도 없다. 기원후 4세기초부터 가락(駕洛), 백제, 신라, 고구려 등 문화민족이 집단으로 건너갔다. 영국의 청교도가 바다건너 북미 신대륙을 발견한 때와 비슷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일본이주란 딴나라에 이민간 것이 아니라, 새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잡초와 수목의 바다인 관동평야를 갈아 엎고 강물을 끌어 논을 만든다. 누에 길러 비단을 찬다. 삼 섬어 베를 짠다. 모시를 길러 모시를 짠다. 도자기 굽고 글자를 가르치고 정치 기구를 마련하고 스스로 통치 계급이 된다. 그리고 죽으면 산더미같은 고분 속에 눕는다. 그래서 소위 4-8세기의 고분시대가 땅속 문화의 전당(殿堂)을 세웠다. 일본의 소위 대화개신(大和改新)이라는 7세기의 정치개혁, 그리고 나라(奈良時代), 평안(平安時代) 등등을 거쳐 19세기의 에도(江戶)시대에 이르기까지 신라의 화랑도, 고구려의 무사도는 “대화혼”(大和魂)으로 육성됐다. 한반도의 삼국문화는 일본에 건너가 색다른 “일본문화”로 조성된다. 유럽문화가 미국에서 미국문화로 번영했듯이 한국민족문화가 일본에 분가(分家)해서 이제는 일본이라는 빛깔의 품종으로 성숙했다. 영국과 미국이 딴나라된 것처럼 한국과 일본도 딴나라가 됐다.

일본은 의리를 지켜야 했다

동양문명이 과학 기술학시대에서 서양에 뒤떨어졌을 때 , 일본은 한국보다 반세기 앞질러 그것을 받아 들였다.

유럽문명이 미대륙에, 그리고 태평양을 건너 일본에 전해질 때 일본은 그것을 재빨리 받아 기쓰고 따랐다. 아직도 “모방”의 선을 넘었달 수 없겠지만, 흉내내는 재간도 무시 못하는 것이다. 반세기 앞서 본따 놓고 보니 동양에서는 “선진”이다. 신식무기를 손에 잡고 보니 강도질이 제격이다. 왜적(倭敵), 왜구의 본성이 치민다. 그런데 한국은 밤중이다. 잠자는 틈에 강탈하자! 한국을 뺏으면 만주를 먹는다. 만주를 먹으면 중국을 때린다. 칼냄새 피냄새에 일본은 미쳤다. 경쟁자인 중국과 러샤를 밀어 제치고 한국을 먹었다. “문화”가 아니라 “폭력”이다. “정의”가 아니라 “침략”이다.

한국의 “새벽잠”에서 먼저 깬 김옥균은 일본의 앙큼한 속셈을 선의로만 대했다. “일본은 동양의 영국으로, 한국은 동양의 불란서로”란 꿈을 김옥균은 일본 위정자들에게 속삭였단다. 그러나 그의 혁명은 일본의 배신으로 좌절됐다. 동학 전봉준의 영웅적인 농민전쟁도 일본군의 대거개업으로 실패됐다. 일본이 한국을 위한다는 건 어느 경우에도 믿기 어렵다. 얕은 교만이 그들의 배를 부르게 했다.

“사이또오”(濟藤) 총독의 문화정치도 잠깐의 사탕발림, 총독이 갈릴 때마다 일본 군국주의는 더 심해진다. 결국에는 “조선”이란 존재를 온전히 지워버리자고 들었다.

“민족”이란 집단의식을 뿌리뽑기 위해서는 조선역사란 것을 지워버려야 했다. 최석주 목사가 일본 도꼬에서 학생교회 목사로 있을 때, “조선민족”이란 단어와 “조선역사”의 어떤 설화를 주일학교에서 한 일이 있다는 혐의로 잡혀 서대문 감옥에 무작정 투옥됐다. 작정 없는 미결수로였다. 최석주 동경시절에 아오야마(靑山學院) 신학에 다니던 전성천이 최석주 교회에 출석했었다는 사실 때문에 잡혔다. “최석주”가 조선역사 얘기하는 걸 들었다고만 하라는 것이었다. 증언을 날조하려는 것이다. 전성천은 아직도 학생기질이라 꿋꿋했다. “들은 일이 없소”로 일관이다. 비행기 태우기, 물먹이기 짓밟기, 주리틀기 - 몇번 실신했는지 모른다. 깨나면 또 “그렇게 써라, 지장찍어라” 한다. 종시 버렸지만 고문은 그의 기백을 멍들게 했을 것이다. 마감에는 서장이 불러들여 잘먹이고 편히 쉬게 하고 조용조용 같은 요구를 했단다. 전성천은 “하라오 깃데모” … “배를 가르는 한이 있더라도 안한 일을 했달 수는 없소” 했단다. 서장의 말 - “이놈은 중학교부터 일본에서 배워서 일본기질이 박혔으니 어쩔 수 없는 놈이다. 내보내라!”하더라는 것이다. “조센진”(조선사람 천대말)은 “모가지 날아나도…”란 맹세는 하지만 “배를 갈라도…”란 말은 안쓰는데 이놈은 일본인처럼 “셋뿌꾸”(切腹)란 말을 뱉은걸 보아 그 일본기질을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다. 그 후에 최석주도 이어 나오게 됐다.

이런 삽화(揷話)에서 우리는 “내선일체”(內鮮一體)니 “황국신민화”(皇國信民化)니 하는 일본의 대한(對韓)정책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잔학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어를 없애고 일어로 통일하기 위해 조선어 학자들을 투옥하고 지긋지긋한 고문을 시작했다. 민족개조에 현념(懸念)한다는 혐의로 수양동우회(국내 흥사단)회원들을 잡아 넣었다. 성결교회에서는 박현명 목사를 위시하여 본부의 간부들이 총검거 투옥됐다. 그 이유는 “예수가 만왕의 왕으로 천하 만국에 군림한다고 가르쳤다는 것이었다. 이건 일본천황의 특권을 예수에게 돌린 것으로서 비국민, 국가 반역적인 범죄에 해당한다는 그들의 견해 때문이었다.

한국어 사용금지, 한국어 출판물 금지, 전국민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 창씨개명(創氏改名), 즉 성명을 일본식으로 고쳐 호적에 등록할 것 등등, 주먹다짐의 “일본화”에 눈이 뒤집혔다.

말하자면 한국을 일본창자 속에서 소화시켜 일본의 피가 되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이 1919년 3.1운동 이후 26년간의 민족수난의 역사다.

3.1의 씨는 싹텄다

그 동안에 두번째 세계전쟁이 세계를 뒤집었다. 전쟁은 역사의 폭풍우랄까, 마구 뒤집고 허물고 태우고 뭉갠다. 그러나 언짢고 추악한 오물더미, 쓰레기 더미를 씻어가는 청소도 된다. 제2차대전은 독재 대 민주의 싸움이었다. 일본도 물론 히틀러의 독일, 무쏘리니의 이태리와 함께 독재진영에 편들었다. 그러나 5년후 1945년, 승리는 자유민주진영의 것으로 낙착되었다. 일본은 미국의 원자탄 세례를 받고 맥아더에게 무조건 항복을 했다. 한반도는 일본영토에서 분리되어, 자주독립국가로 될 것이 약속되었다.

3.1 에 심은 씨가 싹텄다. 3.1독립운동 백만의 번제물에 하나님이 응답하셨다. 미군정이 실시됐지만, 국민은 경계하지 않았다. 그러나 38선으로 남북이 절단된 데는 어리둥절했다. 그래도 “이남에는 자유가 있다”고 이북 동포가 빈손들고 38의 사선을 넘는다. 백만단위의 민족이동이다.

우리는 3천 2백년전 해방된 이스라엘 부족앞에 홍해와 사막이 도전했던 사실을 상기한다. 그러나 이북에도 이남에도 “모세”가 없는 “민중”이었다.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해외독립운동 원로들에 대한 기대는 컸다. 그러나 세분이 합할 것 같으면서 합해질 수 없는 것이 현실인 것 같았다.

광야기(廣野記)

여운형, 김구, 송진우, 장덕수 등등이 암살됐다. 거물급 애국자들의 피가 조국에 저주를 심는다.

6.25 김일성의 남침은 “남북통일”보다도 “공산침략”을 남한의 마음에 파묻었다.

이 6.25 전쟁을 계기로 38선은 만리장성보다 더 높게, 더 굳게 자리 잡혔다. 초강대국인 소련과 미국은 북과 남에 자신들의 완충지대를 설정했다. 한반도는 그들의 바둑판이 됐다.

일본은 미국의 “애첩”(愛妾) 되어 한국에 유흥의 별장을 짓는다. P라는 충성된 “뚜장이”가 조선 “총독”으로 등용된다.

나라는 도루묵이다. “박총독”이라는 대사(大蛇)가 두가닥 혀를 남실거리며 국민의 몸을 칭칭 감았다. 빠지려고 뒤틀면 그만큼 더 죄인다. 이 뱀은 “돈”이라는 심연(深淵)속에 몸을 잠근다.

민족도 독립도 도덕도 이성도 모두가 맘몬신(錢神)에게 포로됐다. 미국돈, 일본돈에 나라는 온통 침수됐다. 그 물속에서 왕초뱀 새끼뱀이 덩어리로 딩군다. 독충(毒虫)이 번영한다. “곡식”은 썩는다.

심연에의 도전

수문(水門)을 부수고 이 심연(深淵)의 불을 뽑자. 그러면 뱀들이 국민 앞에 나체로 드러날 것이다. 화염방사기가 그들을 처리하리라.

그리고서 그 저수지의 맑고 푸른 새 물을 가득 채워 만경평야에 줄줄이 대어주자 권력과 재력의 선용을 말함이다.

이런 꿈에 부풀은 젊은이, 학생, 교수, 성직자들이 앞장서서 “특공대”가 된다. 특공대는 소수다. 그리고 전선에서 죽는다. 후속부대 없는 특공대가 어디 있을까? 또 그 배후에는 여단, 사단의 병력이 포진하는 법이다. 공중폭격대도 있고 멀지감치서의 원호포격도 있어야 한다. 해상에서의 지원사격도 필요하다.

해외의 민주인사는 일선의 특공대가 아니다. 되고 싶어도 공간이 막아선다.

여단, 사단 병력은 국내의 민주국민들이다. 당장 눈앞에 공동전선이 있다. 후속부대도 거기에서 나가고 최후의 총공격도 그들이 할 것이다.

그러면 해외에서는 강건너 화재보듯 구경만 해도 좋단 말인가? 결코 아니다. 해외에서는 원거리 지원포격을 맡아야 한다. 정보교환과 자금조달도 해야 한다.

그것까지 마다할 수는 없다. 세계 어디에 있던, 오천년 역사와 수억만 동족의 핏줄이 자기 실존의 촛점에서 불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실존을 탈출하거나 속여낼 수는 없다. 그래서 일제시대에도 해외 독립운동이 계속 됐고, 잘하든 못하든 해외 한인사회치고 그 운동이 전혀 없었거나 그 운동에 전혀 무관심한 데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결국 큰 테두리에서 본다면 한 공동전선이요, 국내국외는 어느 정도의 업무분담이랄 수 있겠다. 그러나 일제시대에는 일제의 국내 경찰망이 너무 치밀했기 때문에 실제 독립운동은 해외에서 수행되었다. 특히 3.1운동 이후에 그러했다. 물론 1919년의 국내 3.1운동이 그 진원지었다는 것을 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박대사(大蛇)의 정체

그는 경북 상주 빈농의 아들로서 보통학교 졸업후, 대구사범 - 그리고 만주군관학교, 일본 시관학교를 나오고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서약하고서 일본육군 소위로 임관됐다 한다. 대구사범이라면 일제국수주의 교육으로 이름난 고장이다. 만주 군관학교는 흔히 실전연습으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서지 않을 수 없는 고장이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전입학하려면 일본인 이상을 일본화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그런데 그는 “조센징”으로서 이 겹겹의 좁은 문을 통과했다. 그것이 그의 교육경력이었다면 그가 “민족”, “민주”, “자유”, “독립” 등등의 단어에 친숙할 기회는 거의 없이 성숙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1) 일본에 대한 복종의식 - (2) 이유불문의 “명령과 복종”이란 군대윤리 (3) 어떤 방법으로든지 이기면 된다는 전쟁윤리 (4) 힘(暴力)의 신화(神話) (5) 인간을 힘으로 환산하는 습성 등등이 그의 심층에 침전됐으리라는 판정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그 권력의욕이 민족, 민주, 자유, 인간화 등등의 사회윤리에서 유리된 것인 경우 모든 “힘”이 자기집권욕이라는 한점에 집결 응고(凝固)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일인 독재가 되고”의 극한선에 몰리게 된다. 지금 그는 그 선에 접근하고 있다.

국민은 어떠냐?

구데타 초기에는 어리벙벙 했었다. 구악을 일소하고 … 응급수술을 한다는 통에 그런가 했었다. 2년만 이러고서 군인 본연의 자세로 돌아간다고 했다. 또 그런가 했다. 대통령으로 입후보해서 그 동안에 못다한 약속을 이루겠다니, 또 그런가 했다. 2선밖에 못하는 헌법에 손얹어 서약하고서 3선에 나서겠으니 헌법을 3선에 맞도록 고치겠다니 “그 때에는 이건 진짜 독재 선언이구나!” 해서 범국민적인 반대가 일어났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그렇게 애길 하는데 한번쯤 더 시켜 보자꾸나, 누가 하면 별 수 있나?” 하는 시민들이 대부분이었다. 3선하고 물러날 사람이면 구태여 헌법을 고쳐서까지 3선에 나설 리는 없는 것이다. 그건 영구집권을 노린 것임이 환한 노릇이다. 그런데도 국민은 선량해서 그를 믿었던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3선 개헌안이 국회에서 통과될 수 없음을 알고 주일날 오밤중에 이효상 바지저고리 “국회의장”을 시켜 제 3별관에서 몰래 개헌안 통과라고 딱 두들기게 하고 신문기자에게 발표, “대통령” 싸인 등등의 “곱새치기”를 연출했다. 국회에 그 안이 나오면 부결시키려고 농성하던 국회의원들은 닭 쫓던 개가 울타리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다. 그는 국민을 우롱하고 나라를 절도했다.

3선 헌법에 따라, 여당의 박정희, 야당의 김대중이 각기 단일후보로 나와 맞섰다. 김대중이 아무리 더 많은 표를 받았다 해도 그가 대통령 될 가망은 없는 것이었다. 안되면 또 “쿠데타”로 국권을 강도질한다는 전략이 “박”에게는 기정사실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민주수호에 꾸준히 싸운 것은 후세 역사에 증언이라도 남기기 위해서였다.

3선 첫해에 그는 사립학교령으로 학원의 자유를 박탈하고 언론규제법으로 언론의 자유를 마비시키고 교회지도자들에게는 “친공”, “용공” 등등의 거짓 꼬리표를 붙여 사찰, 연행, 투옥 등등을 감행함으로 종교탄압을 실시했다. 이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는 월남사태를 계기로 김일성 남침을 선전 (宣傳) 하며 “비상사태”라는 구실로 자기 독재권을 합리화했다. 그리고서 그에 준한 “유신헌법”을 자작 발표하고 계엄령 아래서 소위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그건 총을 가슴에 대고 싸인시키는 강도의 수법 그대로였다. 유신헌법에는 사태가 긴급하다고 “대통령”이 인정할 때에는 모든 법을 초월하여 “대통령”이 삼권을 독점 운영한다는 “긴급조치령”이 있다. 그것은 “대통령”이 “국회”에 “통고”하면 그 순간부터 효력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계엄령과 같은 것인데 계엄령인 경우에는 권력이 계엄사령관에게 장악된다는 점에서 군대의 “또 하나의 구테타”를 두려워한 까닭이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계엄령이면서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을 겸하게 되므로 “일인독재”권력을 강화하는 일석이조(一石二鳥)를 노린 것이란 말이다.

국민은 국민주권에 속하는 모든 자유를 고스란히 “정권강도”에게 빼앗기고 명실공히 그의 종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자유”를 말하는 기독교회가 소수 자유투사들 편에 서지 않고 국권을 강도질한 도당 편에 서서 그의 시녀가 된다는 것은 우리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구역질하실 노릇이 아니겠는가 싶다.

민주구국선언

1976년 3월 1일 한국 민주인사들은 그 철통같은 독재사찰망을 뚫고 명동 카톨릭 성당에서 민주 구국선언을 발표했다.

1919년 3.1독립선언 57주년 되는 시점에서였다. (별첨 다큐벤트 참조)

그것은 1919년 3.1독립선언 당시와 지금의 역사적 사태가 일맥 상통하는 데가 있기 때문이었다.

(1) 1919년 3.1운동은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주 자유 민주의 민족국가를 회복하려는 운동이었다. 일본은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정치적으로 독재하고 경제적으로 겸병(兼倂)하여 한국의 존재를 말살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선 일본통치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거족적 운동이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났던 것이다.

1976년 3월 1 일 구국선언도 정도의 차는 있을지 몰라도 같은 방향의 같은 목표를 선언한 것이다.

한국이 독립국가라 하지만, 현재의 박정희 정권은 국민과의 언약(covenant) 없이 국가주권을 가로챈 “도당”이라는 의미에서 국민주권에 의한 민주국가를 세운다는 것이요, 박정희는 일본 장교로서 지금도 일본에 추종하여 각양 추태를 연출하는, “조선총독”이란 별명까지 붙은 인물이므로 일본에서의 독립이 아니라, 일본에의 영합을 추진하는 반(反) 3.1정신적 존재라는 것이 사실이니 정치에서 퇴진하라는 것이다. “나치”독일에 협력하여 히틀러의 장교로 있었던 자가 독일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것과 같다.

박정희는 일본으로부터 무절제한 외자를 도입하여 산업을 부흥시켰다는 허울 좋은 선전을 계속한다. 그러나 결국 경제적으로 한국경제를 일본에 예속시키고 한국을 일본의 경제 식민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한일간의 경제적 “유착”(癒着)은 정치적으로도 한일 유착 상태를 조장했다. 그러는 동안에 중간상인들을 통하여 소수 권력자의 부정축재, 사회적 부정부패, 그리고 도덕과 가치관의 붕괴, 민족 사기의 저하와 민족정기의 오염, 공포분위기 가운데서의 민족성 위축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민족적 국가적 손실을 초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일인독재 권력 강화와 유지에만 급급한다.

그래서 1976년 3.1구국선언에서 국민은 그에게 퇴진을 선언한 것이다. 일본에 유착된 독재가 박정희의 퇴진 없는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이란 유명무실할 뿐 아니라, 3.1.의 정신에의 모독이며 따라서 3.1에 희생된 백만 선배가 지하에서 통곡할 것이기 때문이다.

해외의 구국운동

1919년 3.1.운동도 국외에서 계속 활발했다. 여러가지 파벌이 있었지만, 그것 때문에 독립운동 자체가 붕괴 좌절되지는 않았다. 얼마 안되는 이민교포들이 품팔이 생활속에서도 주머니를 털어 이 운동에 바쳤다. 상해에 임시정부가 서고 미국에 외교사절이 주재하고 불란서 영국 등에 외교를 폈다. 정치 현실에서 얼마나 성과를 거두었는가는 별문제로 하고, 3.1.의 혼이 해외에서 살아 싸우고 있었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마찬가지로 1976년 3월 1일 구국운동도 해외에서 그 전개가 활발했다. 3월 8일에 일본에서 뉴욕에로 3.1구국선언문이 전달됐다. 3월 10일에 와싱톤에서 실제로 외교운동이 벌어졌다. “뉴욕 타임스”와 “워싱톤 포스트” 등과 “로산젤리스 타임스”, 그밖에 거의 모든 언론기관이 일제히 보도와 논평을 실고 “반독재 민주”의 지원에 가세했다. 특히 윤보선 전대통령을 건드리고 김대중 야당 대통령후보를 검속한 것과 목사 신부들의 양심을 유린한 것들이 모두 미국 비위에 거슬렸던 것이다. 하원의 프레이저 의원, 상원의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 등이 3.1구국선언 지지 성명을 냈고 프레이저 의원은 국회에서 연설, 3.1구국 선언서가 국회 의사록에 실렸다. 와싱톤, 뉴욕, 필라델피아, 로스엔젤레스, 시카고, 센트 루이스 등지를 중심으로 각지방 한인 민주 단체들이 각기 그 지역에서 궐기했다. 특히 뉴욕, 필라델피아 그룹은 멀리 와싱톤에 대거 왕래하며 적극 지원했다.

1년을 지낸 1977년 1월에는 자가비판과 검토, 새로운 전략수립 등등을 위하여 1월 14-15일 전북미주 민주인사 원로들이 로스안젤레스에 모여 회담했다.

연합전선 형성

1977년 1월 14-15일 이틀 동안 전북미주 한인민주단체 대표 또는 개인으로서의 민주인사들이 모여 전북미주 연합전선을 형성했다. 이것을 또 하나의 조직체를, 집위에 집짓는 식으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고 “운동”을 연합, 신속, 활발하게 하기 위한 연락과 조정(coordinate)을 위한 단체라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말하자면 각지방의 민주단체들의 자주 자치를 충분히 인정하면서 전국적인 연합된 “운동”을 필요로 할 경우에는 그 연합된 이름으로 같이 참여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회장, 서기, 회계 등등의 직제가 없으며 그 안에 권력구조를 갖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자체 내의 Power Struggle도 없게 된다. 다만 같이 “운동”을 한다는 것 뿐이다. 이것은 소위 “지하”운동에서 “점”을 중시한다는 말과 비슷하다. 그 이름을 “한국민주화 연합운동”(북미)이라고 했고 영어로는 “United Movement for Democracy in Korea”라고 했다. (별지 성명서 참조)

북미주를 네 구역으로 나누어서 거기에 각기 두 사람씩 조정위원을 내고 그들이 중앙조정위원회 구실을 한다. 그 지역은

동부 - 와싱톤 디씨, 뉴욕, 필라델피아, 보스톤, 아틀란타
서부 – 로스안젤레스, 산프란시스코, 몽테리
중부 – 시카고, 센트 루이스, 데트로이트, 달라스.
카나다 – 토론토, 몬트리얼, 뱅쿠바.

사무처는 중앙사무국을 뉴욕 “교회 본부”안에 두고 교회본부 안에서 일하는 한국분들 그룹에서 뉴스, 콤멘트 지방 및 본국과의 연락 등등 실무를 맡는다.

North America Coalition본부와 밀접한 연대를 갖는다.

첫 사업으로 3.1구국선언 일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히 거행하기로 했다. 그밖에 상세한 회의 내용은 비공개로 한다.

여기서 우리는 1919년 3.1.운동정신 중 가장 놀라왔던 “연합”이 1977년 3.1절을 앞두고 해외에서 재현된 것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와싱톤에서의 첫 연합운동

North America Coalition 총무인 김상호 박사가 이번 행사의 총 Director로 되어 아래와 같은 다각적인 시위와 행사를 진행시켰다.

예정된 프로그램에 다소 변경이 있었지만, 그 본래의 목표는 예정대로 달성되었다.

예정된 순서를 보면

1977년 2월 25일(금) 저녁부터 단식. (자유참석) 그 목적은 본국 동지들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 특히 옥중의 동지들과 다소라도 고통을 나눈다는 것. 그리고 이런 연대의식이 우리의 해외운동에 감격을 더해줄 수 있으리라는 것.

1977년 2월 26일(토)

종일단식은 자유로.

오후 3시에 전북미주로부터의 내참자는 라파옛 공원에 집합하여 박정권 타도 시위행진 중 일본대사관에 항의했다. 그 요항은,

[1] 김대중 납치에 협력한 것
[2] 남한을 경제식민지화한 것
[3] 박정희 독재정권과의 정치적 경제적 유착상태를 강화하는 것 등이었다.

오후 7시에 박정희의 밀사(?)로 북미주를 순회중이라는 심중이 짙은 한경직 목사가 이곳 황재경 목사 교회에서 특별집회를 오늘밤부터 시작한다기에 그와 면담할 겸 그의 집회에 동참하려고 그 교회당에 갔었으나 황목사가 미리 경관을 불러 교회당을 포위, 우리의 입장을 금지했기 때문에 여의치 못했다.

오후 7시에 김대식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 부인회 초대의 연회가 있었고 이어서 U.M. 전반에 대한 비판과 제언 등이 있은 후 전원이 백악관까지 촛불 행진을 했다.

1977년 2월 28일(월)

North America Coalition의 추진위원회가 오전 9시부터 모였다.

workshop도 가졌다. UM에서는 참가자를 두 구룹으로 나누어 한 구룹은 오전 9시에 Donald Fraiser 하원의원을 방문하여 감사와 격려의 멧시지를 전하기로 하고 또 한 구룹은 오후 3시 30분에 국무성 동아세아 안보담당관을 방문하여 질의 문답하기로 했다. 밴스 국무장관의 도꼬발언을 중심으로 여러가지 질의 문답이 있었으나 비공개 약속하에서 된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약한다.

3월 1일(화)

기자회견이 있을 것이었으나 모두 분망한 업무 때문에 다시 모일 수 없어 집행부에 맡기고 흩어졌다.

이리하여 1919년 3.1. 운동정신은 지금도 “자주”(일본에의 유착반대), “민주”(박정희 독재에 반대), “민족”(자주민주주의 민족적 통일국가 회복)의 기치를 들고 해외에서 싸우고 있다. 3.1의 투시는 전진한다. (선언서 별지 참조)

(1977년 3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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