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31일 목요일

[범용기 제6권] (1648) 후기

[범용기 제6권] (1648) 후기

“장공”은 전공이 “신학”이라는데, 신학도 하두 갈래가 많아서 종잡기가 어렵소이다. 신학의 무슨 학파에 속했소? 하고 묻습니다.

“정통파요? 신신학파요?” 하고 따지면서 총회 “뻐이스” 종교재판까지 몰고 간 일도 있었지요. 그러나 10년 논쟁기를 지낸지도 이제는 30년이 되어 갑니다. 그 동안에 한국교회는 외부로부터의 시련에 부대끼면서 자라났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제법 성숙(Mature)해졌습니다.

이제부터는 대동단결의 화해작업도 가능할 것 같이 보입니다.

본국의 신학자 중에 “장공신학”이라는 저작물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도 들려옵니다. “장공”이 글은 미상불 많이 쓰는 축에 들 것 같습니다만, 체계선 신학논문을 발표한 것이 거의 없습니다. Foot-Note를 준비할 만큼 학문적일 수도 없겠고, 그럴 집념도 없고 그것이 성미에도 맞지 않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그래도 글쓰는 것은 장공의 한 “도락”이어서, 쓰지 않으면 예레미야의 말마따나 “뼈 속에 숯불 피운 것” 같아서 견뎌낼 수가 없게 됩니다. 학문적인 것이 아닌 글이라면 “잡문”일 밖에 없겠고, “잡문”이란 어휘가 못 마땅하다면 “생활기록”이란 이름의 글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따위 글을 써가노라면, “장공”에게도 무슨 “신학”이 있는 것 같이 느끼어집니다.

그걸 무어라 부를까? “생활신학”이라 하자! 마치 “유교”의 실학파마냥, 기독교의 “실학파” 구실을 하면 어떨까.

그런데 “장공”은 “범용”한 인간입니다. 말하자면 어중이 떠중이의 하나입니다. 유교의 실학파 분들은 모두 놀라운 학자들인데 기독교의 실학파(?)란 “장공”은 문자 그대로 “범인”입니다. - 그래서 늘 멈칫하게 됩니다.

범용한 인간이지만, 어찌어찌 하다 보니 “목사”가 되고 신학교 교수가 되고, 학장도 되고 명예학장도 되고 총회장도 지내곤 했습니다. 그래서 설교도 하고 강연도 했습니다. 해외에 나와서도 비슷한 일들이 요청되었습니다. 이제는 나이 80고개 넘은 지도 3년이 다 되어갑니다. 이제부터는 벌려 놓은 것을 거둬들여 곳간 구석에 쌓아 둬야 할 판입니다. 冬藏(동장)의 계절입니다. “범용”한 사람의 범용한 기록이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는 볼품도 없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범용자 자신에게는 역시 버리기 아쉬운 제자식 같아서 애처로운 데가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범용자 자신의 해외에서의 그때 그때, 설화와 강연 또는 書齊餘錄(서제여록) 같은 것을 모아 “범용기” 제6권으로 펴내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자료가 너무 제한돼 있어서 가려운 데를 긁지 못하는 것이 유감입니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에 특별한 호의로 수고와 협력을 제공해주신 칠성인쇄소 이인용 사장님께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장공”의 건강을 성의껏 보살펴 있는 정성을 다 바쳐 돌보는 노처에게도 감사합니다.

[1983년 봄]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