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29일 화요일

[범용기 제6권] (0643) 國史片影(국사편영) - 한국역사를 읽으면서

[범용기 제6권] (0643) 國史片影(국사편영)한국역사를 읽으면서

나는 국사를 전공한 일도 없고 국사에 대하여 아는 체할 자격도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에 흥미를 갖고 있다는 것 만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나이 7ㆍ8세 때, 서당에서 통감 제2권을 읽었습니다. “왕망”이 연나라로부터 남쪽으로 “제”나라를 친다(王莽自燕南攻齊)하는 첫 구절을 외웠습니다. 도대체 “왕망”이란 누구고, “연”나라는 어디 있는 나라고, “제”나라란 어디 있는 나라인지 알 까닭이 없었습니다. 앵무새처럼 나불나불 혀를 놀렸던 것 뿐입니다. 후에사 알았습니다만, 그것이 중국 역사였습니다.

개화 운동과 대한 독립사상이 봄 바람처럼 불어 왔습니다. 선친께서는 “통감” 대신에 “동국통감”인가를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한문으로 쓰여진 우리나라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양계초가 서문을 쓴 “월남망국사”란 책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모두 역사부문의 책들이었습니다. 그러노라니 어린 마음에 저절로 “역사”에 대한 흥미가 배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학”으로 꼬치꼬치 파고들 생각은 없었고 따라서 재료 수집 같은 데도 소홀했습니다. 3.1운동 다음 해에 나는 바로 20고개에 들어서는 젊은이로서 저도 모를 어떤 “힘”에 몰려 서울의 백부님 댁을 찾아갔습니다. 몇 달 후에 백부님은 안방 천정 속에서 3.1독립선언서 원본을 들춰내어 내게 손수 건네 주시면서 “잘 읽고 소중하게 건사해라” 하셨습니다. 읽기는 했습니다만 건사는 제대로 못해서 어디선가 분실하고 말았습니다.

이건 해방 직후 얘깁니다만, 나는 해방되기 5년 전에 상경하여 조선신학원에 봉직하고 있었습니다. 해방의 기쁜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의 환호는 가마솥 같은 서울의 도가니를 용광로로 만들었습니다. 나는 남대문역에서 정동 쪽으로 빠지는 골목 여가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어떤 서양신사가 느닷없이 손을 내밀어 축하의 인사를 했습니다. 그렇잖아도 국제연합에서 한국의 독립을 결정한 것이 한없이 고맙던 터이라, 나는 진심으로 고맙게 대했습니다. 그는 내게 문서 한 장을 내줍니다.

“이것은 김규식 선생이 국제회의에 제출했던 ‘한국독립 청원서’ 원본(?)입니다.”

나는 받았습니다. 외교문서다운 정중하고 Formal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디서 없어졌는지도 모르게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역사”를 “학”으로 다룰 자격은 없는 인간이란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나는 스스로 말해 봅니다. “내가 신학에 들어서지 않았더라면 역사 공부를 했을 것이다.”

80이 지난 오늘에도 생각은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역사의 사건 기술은 엄두도 못 내겠지만, 역사에서 “인간”을 본다는 것, 인간의 윤리가 역사의 사건에 “혼”이 된다는 것, 그리고 그 윤리적 결단과 생활이 그 역사를 빚어 낸다는 것 등등은 내게 한 “신념”이 되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역사를 유물론적으로만 본다던지 권력집단의 무대로만 생각한다는 것은 맹인들의 코끼리 만지는 식이어서 부분적이고 천박한 견해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주마간산” 격이지만 나는 한국민족의 한국역사를 훑어보면서 몇 가지 인상을 받았습니다.

(1) 우리 역사는 오랜 과거를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두만강 가를 따라 서수라, 굴포, 웅기 등지에서 발굴된 구석기 시대 유물들을 내 눈으로 본 일이 있습니다. 웅기 바닷가 모래밭 “폐총”을 파헤치노라면 무슨 산을 꼭대기에서부터 파내려가는 것 같아서 한정이 없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어지간히 깊은 데서 구석기 시대 유물이 나옵니다. 공유생활하던 마을 터전도 나온답니다. 구석기 시대라면 지질학적으로 홍적세 시대에 속한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만년 전에서 1만년 전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그 때부터 우리 고대 민족이 우리 판도 안에서 살았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내가 십육칠세 때 얘깁니다만 회령 동관진이며 영천면 같은 데는 석촉(돌활촉)이 너저분했었고 가담가담 매끈하게 간 돌칼, 돌도끼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신석기 시대 유물이라고 하더군요. 그 후에 구석기 시대 유물도 나왔답니다. 아마도 우리 고대 민족이 만주의 “요하” 근방에서부터 이동하여 더러는 흑룡강 쪽으로 옮겨 “달단”이 되고 더러는 두만강을 따라, 동해안까지 이르고, 더러는 만주에 머물고, 더러는 압록강을 건너 단군 왕조를 세우고…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쨌든 이만하면 오랜 나라임에는 틀림 없겠습니다. 단군 천년이라지만, 그 동안의 기록이 없으니 “역사”는 공백(Blank)으로 됐습니다. 개인으로나 사회로나 “기록”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내가 아이 때 들은 대로는 “단군”이 중국의 건설적인 성군인 “요” 임금과 동시대인이라고 했습니다(與堯倂立). “단군”이 천년을 살고서는 강화도 마니산에 제천단을 쌓고 거기서 산신이 됐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거기에 “제천단”이 있습니다. 단군과 무슨 인연이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단군” 다음에 기씨 조선이 천년을 계속했다고 들었습니다. “기자”는 “은”나라 마감임금 “주”와 숙질간이라고 하는데 폭군인 “주”가 “기자”의 충고를 일축하고 도리어 죽이려 하기 때문에 “서해”를 건너 “조선”에 왔다고 했습니다. “은”나라는 중국의 문화에 찬란한 꽃을 피운 왕조인데 그 시조는 “동이” 사람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부여족”이 중원의 산동반도에서부터 황하유역에 그 문화를 전파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은” 왕조의 폭군인 “주”의 살해를 피하여 “조선”에 왔다는 것은 “고향”에 온 것이나 다름 없는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어쨌든 “기자동래설”은 우리 나라 역사학계에서 거의 부정적인 결론으로 내리고 있다니까 이 정도에서 그치기로 합시다.

최남선 선생도 기자동래설은 부정하고 있습니다만 그 대신에 그는 “기씨 조선”이란 시대를 일컫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한국민족의 일원인 “기씨”가 단군왕조를 몰아내고 “기씨” 왕조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단군 왕조의 마감왕은 쫓겨서 강화도에 들어가 거기서 종말을 고했다는 것이겠습니다.

위만이라는 사람은 중국 북방의 “연”나라 사람인데, 秦(진) 왕조에 몰려 조선반도에 피난와서 남쪽에 자기 세력을 부식했다고 합니다. 통틀어 말해서 단군, 기씨, 위만 등등이 대륙문화의 “루트”가 되어 한국문화에 공헌함과 아울러 한국민족이란 큰 “해류”에 동화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때는 벌써 석기 시대를 지나 청동기 시대가 됐고 그 후 100년 지나서는 “철기문명”이 들어왔습니다. 따라서 한국민족의 문화도 중국에 못지 않게 진전했습니다.

“돌”이나 “청동” 보다도 “철”은 생산량이 많고, 생산비가 덜 들고 단단하기는 돌이나 청동에 비할 바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으로 무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까리’에 내가 천하를 먹어버리겠다”는 군사야심가들이 생겨납니다. 먹혀서는 안되겠다고 이 쪽에서도 단단히 맞섭니다. 그래서 서로 패권을 노리는 경쟁이 벌어집니다.

중국에서는 B.C. 770년쯤부터 소위 “춘추시대”가 시작됐습니다. 결국 “힘”이 말한다 하여 서로 군사력을 강화합니다. 그래서 전쟁을 밥먹듯 합니다. 430 B.C.쯤 부터는 “전국시대” 즉 서로 자부락치게 싸우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진 나라가 6국을 통일하게 됐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위만”은 “연”나라 사람이기에 “진”나라가 무섭기도 해서 한반도에 피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쌓는다, 몽고사막의 서쪽 변방까지 모조리 정복한다고 백성을 물샐틈 없이 징용해서 “민원”이 분화구 같이 폭발하게 됐습니다. 결국 두 대만에 망하고 그 대신 한나라가 천하를 차지했습니다. 그 창업주는 한 고조 “유방”이었습니다.

한나라 무제 유철은 걸출이었습니다. 그는 한반도를 정복하고 낙랑, 임둔, 현도, 진번의 네 고을로 만들어 통치했습니다. 만주까지 포함된 지역이었습니다.

이렇게 정복당한 우리 민족이 “잡아 잡수소” 하고 가만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각처에서 국권회복과 민족독립국가 건설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중에서 제일 거센 것이 “고구려”였습니다. 고구려는 “만주”라는 광대한 “오지”(Hinterland)를 갖고 있었습니다. 혹은 게릴라전, 혹은 당당한 부대전 등으로 한나라의 군사기지 통치거점들을 공격 섬멸하고 탈환하여 자신의 기지로 만들었습니다.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군사, 경제 거점인 “낙랑”(평양)은 고립되었습니다. 지금의 전라도, 경상도 지방인 삼한에까지는 더욱 손쓸 여유가 없었습니다.

57 B.C.에 “신라”가 나라를 세우고, 37 B.C.에 고구려가 독립국가로 되고, 18 B.C.에 백제가 나라를 세웠습니다. 물론 현대국가의 형태는 아니었습니다. 지방분권의 부족연맹체였고 아주 “민주적”이었습니다. 고구려는 313 A.D.에 “낙랑”을 함락시키므로 “실지”를 완전히 회복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는 이른바 “삼국시대”로 들어갔습니다.

고구려는 “요하” 유역에서 송화강, 흑룡강 쪽으로 발전하여 지금의 “연해주”까지를 포함한 광대한 국토를 차지하고 있었으니만큼, 제일급의 강대국이었습니다. 따라서 고구려의 경쟁상대는 중국이었습니다. 중국에서도 고구려를 무서워했습니다. 고구려가 건재한 한, 중국은 안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국력을 총동원해서라도 우선 고구려를 정복해야 한다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문제”가 고구려를 원정하다가 패해 달아났습니다. 을지문덕 장군에게 참패하여 전멸당하고 몇 명 밖에 살아 돌아간 인간이 없었다고 합니다.

수나라의 “문제”는 고구려 원정에 참패당한 후, 뒷수습을 해낼 수 없어서 망하고 대신 “당” 왕조가 중국을 차지하게 됐습니다. 말하자면 고구려가 중국 “수” 왕조를 뒤엎었다고 하겠습니다.

618 A.D.에 나라를 세운 당태종 이세민도 고구려를 무서워했습니다. 고구려를 꺾기 전에는 안심하고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645 A.D.에 전 국력을 기울여 요하 지역의 고구려 요새인 안시성을 포위했습니다.

그 당시 고구려에는 “연개소문”이라는 영웅이 총사령관으로 있어서, 실지로 중국을 석권할 배포를 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명장” 아래에는 비겁한 부하가 없는 법입니다.

“안시성주” 양만춘은 “당” 태종 “이세민”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당태종은 그 당시의 가능한 공성 기술을 총동원하였습니다만, 안시성은 끄떡도 안합니다. 이러다가 겨울이 오면 군량인 후속부대 수송로가 막히고 고스란히 굶어 죽고 얼어죽을 판이었기에 그는 속공속결책으로 진두지휘에 나섰다가 양만춘의 화살에 눈알이 꿰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는 분노와 원한을 품고 달아났습니다. 신라와 백제는 동남 해안에 잠입하여 무시로 약탈하는 “왜구”, 즉 일본 강도 집단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신라와 백제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는 일도 여러 번 했답니다. 그러니만큼 고구려가 남하정책을 강화하여 신라와 백제를 자기에게 예속시키려면 언제든지 해치울 수 있다고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를 무서워했습니다.

“우리도 대책을 강구해야 하겠다.”

대책이 무엇일까? 신라와 백제를 합하여 연합군을 편성하는 방향으로 밀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에 불교가 들어왔습니다. 고구려에는 372 A.D.에, 백제에는 384 A.D.에, 신라에는 법흥왕 때에 불교가 공인됐다니까(514-540) 훨씬 후에 들어왔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공인”이란 것은 불교가 국가종교로 인정됐다는 말이고 지하(Underground) 세력으로서의 불교는 훨씬 전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차별과 대립을 초탈한 세계 종교로서의 불교가 삼국간의 역사적 갈등을 어느 정도 완화했다는 것은 신라의 삼국통일에 적잖은 정신적 지주가 되었을 것입니다. 485 A.D.의 나제동맹도 어느 정고 그런 정신적 기반 위에서 싹튼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구려의 남침이 있을 경우에 신라와 백제가 공통 피해자로 된다는 역사 현실이 작용했을 것은 물론이겠습니다만, “신라”는 국력 기르기에 몰두했습니다. 512 A.D.에 “우산국”(지금의 울릉도)을 판도 안에 넣었습니다. 551 A.D.에는 경기도 파주지방, “한강” 유역에 진출했습니다. 562 A.D.에는 김수로 왕의 “가야국”을 삼켰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로 고구려의 남침을 막아내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습니다. 신라는 “김춘추”(후에 태종무열왕)를 고구려에 보냈습니다. 아마도 삼국동맹으로 외세에 대결하자는 큼직한 외교까지도 가슴에 품고 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현실로 본다면 백제의 마감 임금인 의자왕(641-660)은 극성스레 신라를 침공하는 것이었습니다. 서쪽의 대야성을 비롯하여 40여 성읍을 점령하고 전승기세로 신라에 육박해 왔습니다. 신라는 다급하여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어 신라를 도와 백제를 견제해 달라고 청원했습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로부터 신라가 빼앗은 마목현(지금의 문경)과 죽령을 우선 고구려에 반환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김춘추를 인질로 잡아 가두었답니다. 김춘추는 부하의 도움으로 용케 빠져나와 귀국했습니다만, 고구려를 자기 편에 넣을 가망은 없다고 단념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중국의 “당” 나라와 합세하여 고구려에 맞설 밖에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당” 나라는 여러 번 고구려 원정에서 패배한 치욕을 씻고 “대국”으로서의 면목이라도 회복해야 하겠다는 숙원을 풀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고구려에 있는 한, 고구려 원정은 승산 없는 “망동”이라고 생각하여 단독거사를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라”가 체면불고하고 당나라에 와서 같이 고구려를 치자고 애원하니 이에서 더 좋은 기회가 또 어디 있겠나 싶어 소정방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을 조직하고 고구려에 쳐들어 갔습니다. 주력부대는 소정방의 중국군대고 신라는 군량, 군수품 등의 공급과 수송을 책임진 “치중부대”로 썼다 합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신라군의 의기를 깎아 내리는 작전으로 일관했다는 것입니다. 군 “스파이” 책임은 신라가 맡았답니다.

원래 소정방의 속셈은 고구려를 먹고 돌아오는 길에 신라와 백제까지 먹어버리자는 심뽀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고구려 원정 중에 신라를 약세화화려는 고등 정책을 줄곧 써 왔던 것이랍니다. 그러나 고구려에 연개소문이 있는 동안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했었습니다.

몇 번 쳐들어 갔었지만 연개소문에게 패주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665 A.D.에 연개소문이 죽었습니다. 아들인 남생, 남건, 남산 3형제는 서로 아버지의 독재권력을 자기가 상속하려고 싸웠습니다. “내분”이 “내란”으로 번졌습니다.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다 하여 당나라는 고구려에 다시 쳐들어 갔습니다.

“총공격”입니다.

668 A.D.에 고구려는 망했습니다. 백제는 그 보다 8년 전에 망했습니다. 그래서 삼국시대는 끝났습니다.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고구려를 정복한 다음에 전패 멸망한 고구려의 영토와 문화재를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다시 말해서 “전리품”을 어떻게 나누어 갖느냐 하는 데 대하여 조약을 체결했답니다.

신라는 북으로 압록강 부근 청천강 상류지역과 동으로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하고 고구려의 중요국토였던 만주는 온전히 중국에 양도할 것이라는 조건을 소정방은 신라에 제시하여 동의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문화재는 모조리 몰수하여 서적이고 예술품이고 간에 군데군데 산처럼 쌓아 놓았답니다. 그것이 너무 엄청나게 많아서 중국의 문화재 보다도 더 많은 것 같이 보이니까 소정방은 아니꼽다고 몽땅 불을 질러 태워 버렸답니다. 그래서 지금도 고구려의 문화재는 낙랑고분의 벽화정도 밖에 남은 것이 없나봅니다.

우리는 고구려의 멸망을 통분하게 여깁니다. 연개소문이 조금 더 유연한 정치가였더라면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나제동맹”을 신라, 백제, 고구려의 3국동맹으로 발전시켰었더라면 하기도 합니다. 신라의 “연당멸고” 정책을 비난해 보기도 합니다. 역사는 현실이고 실리주의적이라지만, 타민족과 합세하여 동족을 멸하는 것은 후세에 전승될 민족의 영광이랄 수는 없겠습니다. 김유신 장군은 당초부터 그런 것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백제를 함락시키는 데 있어서도 “소정방”과 합작하여 군사행동을 개시하기로 협정돼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김유신 장군은 선수를 쳐서 백제와 서울인 “사비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그리고 황산현에서 백제의 명장인 계백 장군의 결사대와 최후항전을 감행했습니다. 계백 장군은 백제의 역사에서 영원히 빛나는 “기백”의 인물입니다.

그는 군도를 빼어 처자의 목을 자르고 결사대 5천명을 거느리고 김유신 장군의 대군과 황산벌에서 맞섰습니다. 신라군대는 교전할 때마다 집니다. 숱한 목숨이 땅에 떨어집니다. 마감에는 김유신 장군의 어린 아들(화랑)이 달려 나옵니다. 계백 장군은 어린 것을 기특히 여겼습니다.

계백 장군의 결사대는 “일당백”의 용사들이었습니다만 하나 죽고 둘 죽고 하면서 그 수가 줄어듭니다. 신라군은 김유신 장군이 아들을 선봉으로 내놓는 데 감격하여 사기가 충천했습니다. 그 많은 수가 모두 “결사대”가 됐습니다. “중과부족”으로 계백 장군은 부하 5천명의 마감 사람으로 전사했습니다.

그런데 나당연합군 총사령관인 소정방은 백제 정벌 때 자기와 협의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김유신을 의법처단한다고 서슬이 푸릅니다.

김유신은 “내가 잘못한 게 무어냐?”, “네가 그렇게 건방지게 군다면 나는 우선 당나라를 상대로 일대 결전을 벌여, 꺾어버린 다음에 백제를 멸하겠다…” 하고 위풍당당하게 질책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소정방의 신라에 대한 야심을 눌러버리려는 왕성한 사기를 보인 것이라 하겠습니다.

댓글 1개:

  1. 장공 김재준 목사는 역사에 매우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자서전인 '범용기'에서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 자신의 견해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캐나다라는 곳에서 역사적 자료도 많지 않은 상황에서 기억을 더듬으면서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역사적 사실 자체가 조금 틀리게 언급되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의 흐름 속에서 김재준 목사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는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나긴 역사 속에서 밟히면 다시 일어서고... 억압당하면 다시 일어나는 끈질긴 역사속의 민중들과 호흡을 같이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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