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12일 월요일

[범용기 제6권] (1623) 인간과 그리스도

[범용기 제6권] (1623) 인간과 그리스도[누가복음 15:1-10]

예수가 왜 세상에 왔느냐 하면, 잃어진 인간을 찾아 “인간”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왔다고 할 것입니다. 당신은 왜 크리스찬이 됐느냐 한다면 예수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 크리스찬이 됐노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크리스찬이란 것은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말이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자나 그 밖에 무슨 “주의자”라는 인간들의 눈에는 “주의”란 것이 먼저 보이고 인간은 그 주의를 위한 수단이나 도구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탐욕적 자본주의자들 눈에는 재산이 무엇보다도 앞서 보입니다. 인간은 경제수단이나 재산목록으로 밖에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외가 아주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만, 그 구조 자체가 그렇게 돼 있단 말입니다. “개인자유”를 선행시키는 점에서는 “인간”우선주의인 것 같지만, 경제공황 때의 업주와 고용인 관계를 본다면 고용인은 업주의 재산처럼 처리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복지사회 기구의 “홍로점설”입니다.

정치적 권력욕에 눈이 뒤집힌 독재자의 눈에는 인간이 독재집권자의 “종”이거나 “번견”(Watch Dog)이거나 살찌워 잡아먹을 가축이거나로 보이는 모양입니다. 빛깔이 붉든 희든 독재자의 형태는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결국의 통산에 나타나는 대답은 “인간상실”입니다. “상실”이라지만, 그들에게서 인간 의식이 “제로”가 됐다는 말은 아닙니다. 인간대접을 못 받는다고 그게 그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느껴지는 것도 아닙니다. 상실되어도 “상실된 인간”이고 가축이나 종으로 취급돼도 가축이나 종 “같이” 다루어지는 “인간”임에는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고 스스로 선언했습니다. 잃어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안타까움도 말했습니다. “인간”이면서 “인간노릇” 못하는 인간들을 인간답게 살도록 하여 했습니다.

예수가 만나는 인간들, 예수를 따라다니는 인간들은 상실된 인간 군상이었습니다. 질병에 시들고, 가난에 시달리고, 못먹어 굶주리고, 권력에 눌리고, 교권에 묶이고, 사회적으로 천대받고, 외국인에게 짓밟히고, 소망도 긍지도 없이 “죽지 못해 사는” 인간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인간노릇 못하는 인간 아닌 인간들이었습니다. 나라는 로마제국에 빼앗기고 성전은 친로마판인 부유층 사두개파 사람들에게 주물리고, 회당은 까다롭기만 한 율법주의자,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주어져 있었습니다. 이런 집권층에서 버림받은 “대중”은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고 입에 풀칠할 것도 없는데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고 “죄인”이라 “정죄” 받고, 할 수 없어 로마 정부의 하급관리라도 취직하면 이방인과 어울려 사는 부정(不淨)한 인간이라고 절교를 당하게 됩니다. 질병 중에서도 나병(Leprosy)에라도 걸리면, 그는 부정을 탄다고 자기 가정에서 쫓겨나고, 어느 음침한 동굴 속에서 밤 새우고 먹을 것, 입을 것 없으니 거리에서 거지 노릇할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살이 다 썩어 빠질 때까지 죽지 못해 사는 인간들이었습니다.

농토가 변변치 못한 중앙고원 지대에서 소위 농민으로 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몇 사람 대지주 밑에서 소작인으로 지내는 빈농들이었습니다. 통털어 말해서 상실된 인간이고 밟혀 사는 “잡초”들이었습니다.

예수는 이런 민중 속에 들어갔습니다. 우선 그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자각을 불붙여 줬습니다. 그리고 그 불꽃에 풀무바람을 불어 넣었습니다.

병든 자, 병신, 불구자의 무리를 성한 몸으로 고쳐주었습니다. 그 때에는 또 그 고장에는 의사도, 의약품도 병원도 없는 현실이었기에 예수 자신이 응급치료자로 나설 밖에 없었고 그것이 인간회복의 중요한 역할이기도 했습니다. 병자의 눈에는 가슴을 떡 벌리고 자신만만하게 거리를 뚜벅뚜벅 걸어가는 건강한 인간이 한없이 부럽게 보였을 것입니다. “나도 몸만 성하면 사람노릇 할텐데…!”

예수는 말씀으로, 손으로 그들의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그걸 흔히들 “기적”이라고 합니다. “기적”이란 말은 “그럴 수 없는데 그렇게 됐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하는 경탄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예수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일이고 이상할 것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의 신적(神的)이랄 수 있는 숭고한 인격과 치열한 정신력과 불화산 같은 “인간애”에는 창조의 능력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우주창조의 Co-Worker였다고 요한복음 기자는 말합니다(요한 1:2,3). 그의 불 붙는 인간 사랑은 이 무연중생(無緣衆生)의 질고를 그저 보고 지낼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네 질병을 대신 지고 네 몸을 성하게 하련다”, “내가 그렇게 해주리라고, 또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믿느냐?”, “믿습니다!”, “그럼 네 믿는 대로 되리라!” - 환자는 그 순간 질병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럼 가라, 하나님께 감사하고 아무 딴 인간들에게도 선전하지 말아라!” 합니다. 그러나 “증거”가 그대로 “선전”이 됩니다. 감추어지지 않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지방에는 나환자가 무던히 많았습니다. 전염률이 제멋대로 상승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천형병(天刑病), 즉 하나님께 저주받은 인간을 찾아온 운명의 불치병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만큼 예수는 그들을 더욱 사랑하고 아꼈습니다. 그는 그들의 문들어진 상처, 진물과 고름더덕 위에 손을 얹고 만지며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호소했습니다. 당장에 깨끗해집니다.

이것은 사랑의 선물이요, “기적”이 아닙니다.

예수는 율법주의적으로 서민층을 괴롭히는 율법주의 바리새파 사람들을 “회칠할 무덤”, “독사의 종류”라고 매섭게 꾸짖었습니다. 딱지 붙은 “위선자”라고 했습니다. 율법의 전문가로 자처하는 바리새인 자신들도 지키지 못하면서 율법에 무식한 일반 민중에게는 “파계자”로 정죄를 서슴지 않는 그들의 거짓 율법주의를 질타했습니다. 바리새인 그들은 속에 썩은 또는 썩는 시체를 신주 같이 모셔 놓고, 겉은 하얀 횟가루로 분장한 “무덤”이라고 선언했습니다(마태 23장).

예수는 위에서 언급한 “타락자”, “죄인”, “천민”, “기민”, “민족반역자” 등등을 찾아, 그들의 상담자가 되고 그들의 친구가 되고, 그들과 음식을 나누고, 그들의 잔치에 참여하고, 그들 가정에 머물고 했습니다. 예수는 그들에게 종교적, 사회적, 민족적으로 붙여진 소외의 “표딱지”를 근본에서 무시해 버리고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그들, 원형적인 “인간”으로서의 그들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동족에게는 “너희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했습니다. 예수는 그들 모두를 치켜 올립니다. “머리를 번쩍들고 씩씩하게 살아라” 합니다.

“배고픈데 어떻게 머리가 번쩍 들립니까?” 하고 군중은 말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아마도 광야에서 4천명, 5천명, 3천명 군중을 먹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식물이나 보통 “동물”이 아니고 하느님 형상으로서의 영적, 도덕적 존재라면 “떡”으로만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떡과 함께 하느님의 말씀을 먹고 그걸 소화시켜야 살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는 그 몸을 속죄제물로 바치고, 그 몸을 제자들에게 뜯어주며 “이것은 내 몸이다(살이다), 이것을 먹어라” 했을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의 인간격은 존엄했습니다. 하느님의 형상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조건 아래 있든지 간에 “인간”은 존엄한 존재였습니다. 온 땅을 주고도 엇바꿀 수 없이 존엄하다고 했습니다. 본체적으로 “하느님 아들”인 그리스도였지만, 그는 자신을 “사람의 아들”(人子)이라고 즐겨 자청했습니다. 그것이 “메시야” 칭호로도 쓰일 수 있겠습니다만, 참 인간, 타락 이전의 원형적인 “인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물론 구원사적인 입장에서 하는 말입니다만.

각 개인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모독하는 것은 하느님의 형상을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하느님 형상인 개인들은 사회적으로 “하느님 나라” 건설의 역군으로 나서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추구하라”고 했습니다. 크리스찬의 사회관심은 크리스찬의 “본직”입니다. 이것은 신자 모두가 목사나 신부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신자의 생활 윤리가 그런 목표를 지향한 삶이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입니다. 실지로 소금치고 빛을 비칠 고장은 “세상”입니다. 하느님이 독생자를 제물로 내주기까지 사랑한 것도 “세상”입니다(요한 3:16).

여기서 “세상”이란 것은 “인간”이 있는 모든 “고장”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인간이 상실되어 갑니다. 잃어진 양이 됩니다. 선한 목자는 “99마리 양”을 “우리”에 두고 한 마리의 잃어진 양을 찾아 산과 들을 해맵니다. 서구 여러 소위 “기독교 국가”에서는 이 비유가 해당됩니다. 호적부와 교적부가 같이 작성되는 경우니 만큼 “우리”(교회)안에 안정된 교인이 99%고 잃어진 인간인 교인이 1%일 수가 있겠습니다. 목자가 그 한 마리 잃은 양 때문에 그렇게 고생한다는 것은 이해타산이 안맞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찾아 안고 돌아왔을 때, 소 잡고 양 잡고 이웃을 다 모아 잔치를 벌인다는 것은 더욱 요령 없는 낭비일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 있어서는 제도적으로 모든 인간이 “상실상태”에 굴러내리고 있답니다. 비록 기독교국가로서의 역사를 자랑한다 하더라도 그 나름대로 상실인간인 한두 마리 양이 남아 있을 뿐인지도 모릅니다. 설사, 우리 안에 가득가득 찬다 하더라도 “간이 숙박소” 정도로 이용하는 인간들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이 땅에 온다면, “믿는 사람을 만날 수 있겠느냐?”가 문제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주역(Keyman)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이 하기에 달린 것입니다.

기독자가 “교회”라는 “성채”에 농성하는 대신에 상실된 인간들을 되찾기 위해 “세상”에 두루 퍼져 선교하고 봉사하고, 역사갱신과 새 역사 창조에 “십자군” 적인 정열을 쏟는다면 우리의 “운명”은 “사명”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런 무리와 함께 인간 되찾기에 총사령관 노릇을 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출정”(出征)입니다. 죽음을 각오한 전투입니다. 보호구역인 교회당도 반드시 제공되리라는 약속이 없습니다. 교회당 대신에 “감옥”이 주어질지 모릅니다.

예수도 처음에는 안식일마다 유대교회당에서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회당인”으로서는 너무 컸습니다. 그는 회당에서 “입국불허”의 딱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거리에 나갔습니다. 이 우주는 “내 아버지 집”입니다. 길 바닥에든, 호수가든, 빈들이든, 어느 사가집 뜨락이든, 세리의 세관 ‘홀’이든, 창기의 안방이든, 어디든 “죄인”과 “민중”이 있는 고장이면 거기가 그의 “성소”였습니다. 거기서 가르치고, 거기서 병고치고, 거기서 밤 새우고, 거기서 쉬기도 했습니다. 거기서 인간구원의 복음을 전파하고 거기서 하느님 나라 도래를 선포했습니다.

기독자의 생활도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상실된 인간들을 찾아 그들과 몸으로 하나되어 고난을 나누고 그들 “손”에 예수 “이미지”르 심어 그들의 눈을 열어 주고 그들로 그들의 문제를 발굴하게 하고, 그들로 양심대로 정의대로 발언하게 하고, 모든 선한 운동에 참여하게 하고 무엇보다도 이웃 사랑에 일체감을 갖게 하는 – 그래서 그들을 하느님의 형상의 인간으로 회복되게 하는 그것이 기독자의 부름받은 본직이 아니겠습니까? 말하자면 크리스찬은 그리스도의 “제자직”에 충실해야 할 것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한국교회 전통적 선교방안은 아닙니다.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가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아들 낳고, 딸 낳고 정직하니 장사 잘되고 돈 많으니 사회에서 대접받고, 아들 딸 공부시켜 학박사 되게 하고, 좀처럼 못가보는 외국 “선진국”에도 동네 드나들 듯 다녀오고 그러니 꿩 먹고 알 먹긴데 왜 예수 믿기를 주저한단 말이요!” - 이런 무당종교식의 선교가 기독교일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인간” 구원이란 이런 따위 기복사상일 수는 없겠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내게 절하면 천하를 주마!”하던 악령의 유혹일 것입니다. 이것은 타락한 자본주의 형태일 것 같기도 합니다.

인간, 특히 불행하고 억울한 인간들을 “인간” 되게 하고 잘못된 공동사회를 하느님 나라 모습으로 재건하고 이 “왕업”(王業)에 출전병사같이 용약전진하는 그것이 기독자의 본업이오, 보람있는 착한 “스츄어드”의 영광일 것입니다.

1975년
시카고 제일 감리교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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