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9일 금요일

[범용기 제6권] (1619) 한국민족과 한국교회

[범용기 제6권] (1619) 한국민족과 한국교회- 민족종교로서의 기독교 -

한국민족이 형성되기에는 적어도 5천년의 역사적 시련이 필요했습니다. 우랄ㆍ알타이 계로서 민족 이동이 한창일 때, 몽고에, 시베리아에, 만주에 퍼졌고 더러는 북구라파에까지 옮겨갔습니다.

“만주”의 부여족이 숙신, 말갈, 달단 등 비슷한 족속들을 통합하여 부여족의 전성시대를 가졌습니다.

국사학의 거두인 신채호 선생은 중국의 “은”나라 문화는 부여족의 중원 이동에서 창조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맹자”도 “은”은 동이족(東夷族)이고 주(周)는 서이족(西夷族)이라고 했습니다.

이 부여족이 “만주”에서 한반도로 이동하여 한국 또는 조선민족이 됐습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설화는 직접 동부여족의 혈맥에 잇닿아 있습니다. 신라는 남방민과의 인연이 더 농후하게 전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그렇다고 북방민족과 인연이 아주 없는 것은 물론 아니겠습니다.

한반도에 옮겨온 부여족은 3면이 바다여서 더 갈 데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예 그 자리에 정착했습니다. 단군신화는 아마도 그 정착의 시점에서 생겨난 전승일 것입니다. 그러나 부여족 중에서도 더 용감하고 모험적인 부대는 바다를 건너 일본 땅에 새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연원이야 어쨌든, 지금의 한국 또는 조선민족은 몽고족도, 한족도, 만주족도, 남방족도, 일본족도 아닌 “한국” 또는 “조선” 민족으로 고정되어 바꿔질 수 없는 한 “민족단위”로 정립됐습니다.

우리 민족 역사를 흔히 반만년 역사라고 합니다만, 훨씬 이전부터 뿌리를 내렸다고 생각됩니다.

한반도에서 전에는 “신석기” 시대 유물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만, 근년 함북 옹기항 “패총”을 파헤치는 가운데서 구석기 시대 유물도 나왔다고 합니다. 그때 거기서 악착같이 살아 남아, 아들 낳고 딸 낳고 불어나 퍼지고 싸우고 친해지고 뺏고 뺏기고 모여들도 흩어지고 하면서 마침내는 한국 또는 조선 민족으로 뭉쳐 나라를 세웠던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민족을 한 단위로 형성하기 위하여 그렇게도 오랜 세월을 경륜하고 준비하고 정립시킨 것이라면 뭔가 “우리 민족”에게 맡길 “민족적 사명”이 마련돼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택해서 종교적인 사명을 맡긴 것 같이 동양에서 한국 민족에게 뭔가 독특한 사명을 맡기려는 경륜이 계셨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이 “정치”일까요?

우리 민족에게 정치 관심은 많습니다. 그러나 실제 “정치” 운영에는 늘상 졸렬했습니다. 3국시대에도 세 나라가 서로 자기 중심의 “극”(極)을 달리지 말고 3국 연맹체로 뭉쳐 중국이나 일본에 대결할 때 정치적 구상을 품고 그 실현을 위하여 운동을 일으킨 정치인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중국의 소진, 장의 정도의 정치유세꾼도 있었던 것 같지 않습니다.

경제적으로 전 세계의 금융과 무역을 주름잡을 만한 자원도 없었고 그런 꿈을 실현하려는 폭 넓은 상인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군사적으로 세계정복의 꿈을 가진 군인도 없었고 “중원” 점령의 군사활동을 시도한 사례도 없었습니다. 만주족은 “중원”에 쳐들어가 “청”왕조를 세웠고 몽고족은 중국에서 “원”왕조를 세웠고, 소위 5호 16국의 춘추전국 시절에는 사면팔방의 각이한 민족들이 중원에 몰려들어 회오리바람을 일으켰지만, 그 패거리에 우리 민족이 끼어 들지는 않았고 시종 얌전하기만 했습니다.

이조 말에는 남이장군 같은 20대의 탁월한 군인이 있어 종성(種城)에 주둔하여 만주족의 한국침입을 막고 이겨 항복받고 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함경북도 조산만호로 “거란”족의 한반도 침입을 봉쇄한 일도 있었습니다만, 결국 그때 그것만으로 끝났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전남 완도의 어느 젊은 분이 탁월한 실업인으로 중국 무역에 민완을 휘둘러 중국 왕래의 해상권을 독점하다시피 한 일도 있었답니다만 애매하게 역적음모로 몰려 죽고 말았습니다.

“권좌”에 앉아 “놀고 먹는”, 발바닥에 먼지 한 알 묻혀보지 못한 “양반”네들의 “승기자압지”(勝己者壓之) 때문에 이순신도, 남이장군도, 완도의 무역상(장보고)도 억울하게 몰려 뜻을 못펴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민족이 실제 정치운영에 졸렬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문화와 종교면에서는 자랑거리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화면에서 세종대왕 때의 “한글” 창안의 자랑스러움을 빼 놓고 본다면 거의 전부가 대륙문화의 전달 또는 습득 정도였고 원초적인 창조는 아주 드물었습니다. 혹 창조적 발명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이륙점(離陸点)으로 해서 더욱 높고 넓고 크게 발전시키는 일은 못했던 것입니다.

발명, 또는 발견한 것은 그 개인의 비장(秘藏)품이거나 그 가문의 “가보”로서 좀처럼 세상에 나오지 못했던 것입니다. 가령 이순신의 “거북선”만해도 그 당대, 그 “난리” 동안만 허용됐었고 그것으로 끝났던 것입니다. 고리고리 보수적인 역사였습니다. 종교로 말한다면, 자랑거리가 훨씬 더 많다 하겠습니다. 우리 민족의 본래적인 종교는 “무교” 즉 “샤머니즘”이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도 이 무당종교 “멘텔리티”는 우리 민족 심리의 “심층에 끈덕지게 또 겹겹이 침전돼 있다”고 합니다. 특히 부녀자 계층에 더합니다. 그 후에 불교, 유교, 천주교, 기독교(개신교)등이 들어왔지만, 이 “무교”와의 습화(習化)에는 정도의 차는 있어도 예외는 없다고 합니다.

소위 “고등종교”라는 불교가 기원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2년 여름 6월에 秦王(진왕) 부견(符堅)이 보낸 중 “순도”(順道)에 의하여 고구려에 들어왔고 소수림왕 4년에 중 “아도”(阿道)가 와서 선교했고, 소수림왕 5년 봄 2월에 “초문사”(肖門寺)란 절이 세워졌고 이어서 “이불란사”를 세워 거기에 “아”를 주재시켰다고 합니다.

“신라”에는 법흥왕 15년, 이차돈의 순교와 백혈(白血) 기적을 계기로 불교가 수립되어 마침내는 불교국가가 되었습니다. 유명한 원효대사는 중국에도 인도에도 유학한 일이 없었지만, 스스로 “성불”하여 “대승기신론”이란 방대하고 독특한 학적 논문을 남겼다고 합니다. 많이 산질, 유실되고 일부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경주에는 지금도 불교 유적이 많습니다. 고도(古都)에 풍기는 낭만의 남은 향기가 “묵호자”가 피운 향로에서 지금도 향기롭습니다.

석굴암의 불상은 서장 돈황(敦幌)의 그것들 보다 규모는 몹시 작습니다만, 미술적인 정교는 월등하답니다.

“도교”(道敎)도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고려시대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도교”란 것은 “자연 안에서의 인간”을 응시하며 자연과 조화된 인간을 높이 평가하려는 철학인 것 같습니다. 그것이 중국에서 “전한”(前漢), “후한” 시절에 국교에 가까울 정도로 득세했었습니다만, 종당에는 윤리성의 박약 때문에 현세적 길흉화복을 점치는 “참서류”(讖書類)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한국에서도 그러했습니다. 시인의 “풍류”는 높은 경지에서 “도교”적이겠고, “풍수설”은 낮게 흐른 “하류”적 “도교”가 아닌가 싶습니다.

유교는 한국에도 삼국시대에 벌써 들어왔습니다만, “이조”에서 “국교” 행세를 하게 된 때에 권좌에 올랐습니다. 그것도 원래 중국에서의 “제전”을 기반으로 삼고 그 위에 인ㆍ의ㆍ예ㆍ지ㆍ신 등 윤리교훈을 짜 넣은 것이니만큼 그 본바탕은 “종교”였다고 하겠습니다. 공자의 “예”도 주로 제전적인 바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조”에서는 “주자학”이 유교의 전부인 것 같이 생각하여 유교의 다른 학파들은 얼씬도 못하게 했고 그것이 너무 “세속화”한 탓으로 종교적 영적인 요소가 증발되서 종교 활력소를 잃어버렸습니다. 말하자면 “샘터” 없는 “물웅덩이”가 된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조 유교에서도 퇴계, 율곡 등 세계적인 유학자를 배출함으로 우리 민족의 별빛이 영원토록 빛나게 했습니다.

근년에 한국산 신흥 종교들이 속출해서 동양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만연되고 있습니다만, 그것도 다른 나라, 다른 민족에게서 보기 드문 현상입니다. 여러 가지 심리적, 사회적 이유를 들 수 있겠습니다만, 그 심장부는 역시 한국 민족에게 innate한 “종교 지향성”이 크게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다른 종교 얘기는 이만큼 하고 이제는 기독교로 옮겨 봅시다.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온 것은 극히 최근에 속하는 이조 말기였습니다.

천주교가 철종 시대에 중국을 통하여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중국에 국사로 가는 사신들 일행에 끼어 북경으로 갔던 한국 학자들이 북경에서 카톨릭의 “제스윗” 신부들을 만나 “서양학”을 배우면서 천주교 교리문답 책을 읽게 되었고 그것도 西學의 하나로 알고 접근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카톨릭 교리책들과 서양 과학서적들을 될 수 있는대로 다양하게 또 다량으로 사 갖고 왔습니다. 천주교 서적을 읽는 가운데 그들은 “천주”를 믿게 됐습니다. 그러나 지도자, 전문적인 교역자가 없기 때문에 교회의 설립이나 조직은 할 수 없었고 자의로 교의를 해득하려 한 것 뿐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그들도 여전히 유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유교적 교훈을 실제생활, 특히 서민층 생활에 실천시키려는, 말하자면 “생활유교”의 주장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실학파”란 칭호가 붙게까지 됐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직접 간접으로 천주교에 영향됐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후에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여 본격적인 카톨릭 교회 터닦이가 시작됐습니다.

정약용, 정약종 등 실학파 학자들은 그 후에 모두 사형, 유형을 당하고, 한국신부 김대건 씨 시대에서 교회가 섰습니다만, 그도 순교했습니다.

필자가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한국 천주교가 첨부터 외국 선교사에 의하여 선교되고 정착된 것이 아니라, 한국 지식인 자신들이 스스로 연구하고 스스로의 목숨을 바쳐 죽음으로 씨를 뿌렸다는 그것입니다. 한국에서 순교한 한국인 신도들, 지식인들의 “피”가 한국 천주교의 “씨”가 되어 자라 오늘에 이르렀다는 사실입니다. 거듭거듭 밀려오는 박해와 순교의 역풍을 거슬러 싸웠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한국 천주교사는 한국에서의 선교 역사나 종교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 근세사 자체의 Dynamic한 구성 요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국 “푸로테스탄트” 교회는 대원군의 쇄국시대가 지난 다음에 들어왔기 때문에 정치집권자의 박해는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기로는 1885년 부활절 날에 미국 북장로회 호레스 언더우드와 미국 북감리교회 H.G. 아펜젤라가 인천항에 같은 날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보다 2년 전에(1993년) 의사인 알렌이 와서 황제의 궁의로 대감 벼슬도 했다고 합니다만, 그는 본격적인 복음 전파자는 아니었습니다. 터전 고르는 공사는 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아펜젤라나 언더우드가 입국하기 전에 한국의 지성인으로 개화운동에 뜻을 같이하는 이수정 씨가 일본 체류 중 일본의 내촌감삼이나 식촌(植村正之) 등 기독교 거물들과 친교를 갖고, 신약성경의 마가복음서를 한국말로 번역 출판했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라는 “이수정”이 번역한 복음서를 갖고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용익”도 “하느님 밖에는 한국과 한국민족을 구원할 분이 없다”면서 각방으로 선교의 터전을 닦아 두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으로 보아 개신교도 한국민족 자신이 주동적, 능동적으로 작업해서 그 빛의 들창을 열어 놓은 것이었습니다.

그보다 훨씬 전인 1880년 중국 만주 “목단”에 주재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매킨타이어와 존 로스가 한국인 서상륜 씨와 함께, 이미 간행된 중국어 성경을 대본으로, 한국말 성경 간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서상륜 씨는 그 선교사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면서 손수 한국말로 성경을 번역하기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 열매로 1882년에 심양 “문광서원”에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간행되었고, 1883년에 요한복음과 사도행전, 1884년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1887년에는 마침내 신약성서 전서가 간행되었답니다.

1882년 쯤에는 쇄국정책이 다소 완화되기 시작하였지만, 복음서가 본국에 들어오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었습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쪽복음”들을 유지에 싸서 압록강에 띄워 보내기도 했다 합니다. 어느 해변 모랫가에라도 닿으면 주워다 읽는 사람이 있을까 해서였답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도 한국기독교가 자력으로, 또 자의로 한국민족에게 전달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제1호인 황해도 송천교회는 서상륜 씨가 그 창설자였답니다.

갑신정변의 파국은 한국역사의 또 하나 “비극”이었습니다만, 이 하늘의 샘터를 막아낼 수는 없었습니다. 개화운동자들은 기독교적으로 친화돼 있었습니다. 독립협회 지성인들도 기독교와의 “일체감”을 맘 깊이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을사보호조약과 한일합방에의 항거, 해외에서의 독립운동, 3ㆍ1운동 이후의 국내 국외 독립전선, 해방 후의 정치인들, 사회운동가들 등등이 적어도 한때 기독교의 영향을 받지 않은 예가 별로 없었습니다.

다만, 한국교회 자체가 맨처음 1885년 이후 선교사 주도 하에 “보육원” 성격으로 육성되었고 대 사회, 대 국가, 대 민족 관계에서 직접 책임적인 입장을 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제 또는 각양 외세의 압력과 교회 자립의 열성과가 상호작용하여 필경에는 “교회주의”에 농성하게 되었다는 부끄러움을 자취했다는 것 뿐입니다.

그것이 한두 해가 아니라 50년의 긴 세월을 변함없이 그러했고 해방 후에도 그 조개껍질 속에서 탈출할 용기는 좀처럼 생기지 않을 것 같습니다.

3ㆍ1독립선언서에서 민족대표로 서명한 33인은 천도교와 기독교와 불교 대표들이어서 모두 종교인이었습니다. 그것은 적어도 기독교로서의 역사적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은 그야말로 풀에 꽃과 같아서 오늘 있다가 내일 시들어서 아궁이에 타 버리는(베드로전서 1:24) 하염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확고한 신학적인 뒷받침 없이 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학생과 청년들 부대는 용감했습니다.

그리고 서민층은 끈기 있었습니다.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 혈사”에 보면 그 때에도 역시 교회가 가장 많은 피해자였습니다. 일제의 살육정책에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투옥자 46948명, 소실된 교회수 47, 소실된 학교수 2, 소실된 민가수 715라고 집계돼 있습니다. 일제 당국에서 발표한 집계와 비슷합니다. 피해자의 대부분이 교회관계 인사들이었습니다. 105인 사건도 일제가 교회 지도자를 말살하려는 음모였습니다.

해방 후에 해외에서 들어온 독립운동자들과 “지사”들도 거의가 기독교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민족과 기독교를 “他山之石”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겠습니다. 이북에서 기독교를 완전 말살한 것은 자멸행위라 하겠습니다.

어쨌든, 기독교은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뺄 수 없는 민족정신의 활력소가 되어 있습니다.

지금 남한에서의 반독재 민주운동에 선봉으로 나선 학생들의 핵심분자도 기독학생이 대부분이고, 파면 교수들도 거의 전부가 “기독교 교수 협의회 회원”들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기독교가 우리 민족의 민족적 정신 속에 토착화 한 “유산”으로 돼 있지 않았다면 그런 일이 있을 수 없겠기 때문입니다.

남한을 여행하노라면 어느 치벽한 산골 농촌에도 반드시 오막살이 교회당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예배처소일 뿐 아니라, 회의실이고 상담소고 강연 장소고 오락실이고 교육관이고 친교실이기도 합니다. 성경 공부도 거기서 합니다. 이웃 만들기도 거기 모이는 데서 싹틉니다. 한 주일에 세 번씩 모인다는 것은 그만큼 하느님과 나와 내 가정과 내 이웃과 내 사회와 내 나라를 내 삶에 심는 것이 됩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이렇게 자주 모이는 규례가 흔치 않습니다.

지금 한국인 이민사회에서 보더라도 한국인 사회에는 반드시 교회가 서 있습니다. 토론토에도 한국인이 약 1만명 가량 있는데 교회가 다섯인가 됩니다. 교포 단체로서 “한인회”가 있습니다만, 교회에서처럼 알찬 봉사는 하기 어렵습니다.

유태인 사회에 유태교가 있고 회당, 즉 “시나고그”가 있는 것 같이 한국인 사회에는 기독교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종교적”으로 감수성이 강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왜 그렇게 “종교적”이 된 것일까? 지금은 고인이 된 지 오랩니다만, 일본의 유종열 교수는 이렇게 풀이했습니다.

“한국 민족이 강대국들 사이에 끼어서 언제나 ‘수난’하는 민족으로 지냈기 때문에 현세적인 데에는 안정을 느낄 수 없고, 늘상 영원을 동경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안심입명”(安心立命)을 더 많이 추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겠습니다. 그런 설명도 물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설명”의 한 부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역사 안에는 고난받고 천대받는 민족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종교적으로 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고난은 주로 외부 세력에서 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난에 대결하는 수난자의 주체적 판단과 대응태도에 의하여 그 의미와 가치가 결정됩니다. 다시 말해서 고난의 “도전”에 대한 수난자의 “응전” 태세 여하에서 그 가치가 산출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든다면 1) 고난 받을 때 이를 갈고 참으면서 “어디 보자! 내가 반드시 복수하고야 말리라……” 하는 보복주의, 2) 고난은 내 삶에 있어서 한 시련이니 이것을 잘 넘기면 다음에는 좋은 날이 오리라…… 하는 것, 말하자면 고난을 수난자 자신이 현세적 성공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낙관적 태도, 3) “생사화복이 모두 타고난 팔자니, 그런 대로 살다가 그런 대로 가는 거지, 그걸 크게 문제시할 것 없다……” 하는 운명론, 또는 좋게 말해서 “체념” 또는 “달관”하는 초월적 태도, 4) 고난은 도덕적으로 악에 대한 심판이므로 깨닫고 회개해야 할 “사랑의 채찍”이라는 도덕주의적 해석 등등이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견해들은 고난에 대한 소극적인 “수세”여서 결국은 “안일주의 입장에서 보는 고난관이겠고 고난은 본질적으로, 있어서도 안될 불행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은 닥쳐오니 그걸 어느 정도 합리화해 보자는 밤 본새라 하겠습니다. 특히 개인관계를 넘어서 전민족적인 고난이 닥치는 경우에는 더욱 애매 몽롱하게 됩니다. 침략하는 강대국은 ”의로운 나라“, 자랑스러운 나라로 변장해도 당연하게 인정받을 것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런 소극적 수동적인 고난 이해는 이 정도로 끝내고 본 줄거리인 한국 민족의 민족적 고난과 그 기독교적 의미라는 본 과제로 돌아가기로 합니다.

고난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역사적 민족적으로 이유 불명의 수난자로 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소극적 수동적인 견해를 박차고 적극적 건설적인 숭고한 의미를 천명하는 것이 크리스찬의 민족적 종교적 사명의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우선, 지정학적으로나 민족적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와 비슷한 수난 민족인 이스라엘 민족의 고난에 대한 응전태세를 들어 보기로 합시다.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한 점은 “고난”을, 선택받은 민족으로서의 “메시야”적 희망 실현 과정에서 가장 고귀한 정점적인 위치에 도달했다는 그것이겠습니다.

그리스도가 애독한 성경귀절이라고 느껴집니다만, 이사야 53장은 민족적 수난의 가장 숭고한 이해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수난은 “속량의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특히 포로 중의 이스라엘 민족은 “마른 땅에서 나오는 풀잎 같아서 모양도 풍채도 보잘 것 없고, 멸시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퇴박거리가 됐고, 곤고를 겪고 질고를 아는 인간,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우고 피해갈 만큼 멸시만 당하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습니다. ……”

그런데 실상은 하느님이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셔서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상하고 매맞고 죽은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 “민족적 수난”을 전 인류의 속죄 제전에의 희생으로 보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인간화”한 “인격”입니다. 그러므로 이 그리스도 전 6세기의 예언이 그리스도에게서 개별화(Individualize) 했고 인격화(Personalize) 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은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유태민족만 아니라 전 인류를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의 이상 왕국 건설자”로 출동시키려 한 것이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 땅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백성이 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요한 1:11).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그를 높이 들어 전 세계 인류의 구세주로 장립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는 한국에 찾아 왔습니다. 한국역사, 한국민족의 구원자로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그를 영접해야 합니다. “한국민족을 그리스도에게, 그리스도를 한국민족에게……” 라는 “슬로건”이 엘리야의 불수레처럼 달려야 하겠습니다.

나는 한국민족에게 종교 지향성이 강하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것은 물론 다른 민족에게는 종교성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한국에 맨 처음 나온 미국선교사들은 “한국인에게는 종교 지향성이 아주 없다”고 결론지었다고 합니다만, 그것은 “유교”가 국교 구실을 하는 현실에서 본 “수박 겉 핥기”에 지나지 않은 판단이 아니었을까 짐작됩니다.

나는 이상에서 기독교가 우리 민족의 민족종교로 수락되기를 희구했습니다.

그것은 한국 민족이 종교 안에서 민족적 사명을 발견하고, 종교들 중에서도 현재 역사 안에 살아 역사의 “다이나믹스”로 생명력을 발휘하는, 세계적 종교로 인정된, 기독교를 민족종교로 하여 그것을 한국역사와 한국현실에 토착화하고 의식화해야 하겠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세계적인 그리고 오고오는 세계역사 진전에 언제나 정신적 윤리적인 Spearhead가 돼 왔고 금후에도 그럴 것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민족종교로 정립한다는 것은 어떤 민족국가의 최고 집권자가 “칙령”으로 법화(法化)한 “국교”로 하라는 요망이 아닙니다. 정부에서는 종교신앙의 자유를 엄수하고, 교회의 내정이나 신자의 양심적 결단에 폭력 행위로 간섭하지만 않으면 된단 말입니다. 그와 동시에 기독교에서는 “영원”을 “시간” 안에 맞이하여 현실역사의 정황을 상대로 “예언자”적 증언을 외치고, 미래 역사의 창조에 “비전”을 제공하고 그 비전에 따라 교회와 사회에 책임적인 “사랑의 공동체” 건설에 앞장서는 Builder가 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서구 여러 나라와 달라서 그 신봉하는 종교가 기독교로 단일화한 것이 아니라, 각이한 복수형의 종교를 갖고 있습니다.

고신도(古神道), 불교, 유교, 천도교, 온갖 유사 종교 등등이 무던히 다채롭습니다.

기독교를 민족종교로 한다면 아마도 종교계에 내란이 폭발할 것입니다. 그러니만큼 기독교는 스스로 겸손하여 한국민족과 그 역사의 난국에서 이사야 53장에서와 같은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 번 열지 않는, … 입에 거짓을 담은 일도 없었지만 죄인들과 함께 처형당하고 불의한 자들과 함께 묻힌 자기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어 놓은……” 고난의 종을 따라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될 것은 하느님께 맡길 뿐입니다. 하느님이 다시 살려 높여 주시면 더 크고 더 많은 선한 봉사로 한국 민족역사에 이바지 할 것이고, 수난 과정에서 끝난다면 그것 만으로도 영광이라 감사하며 한국민족된 사명을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만민 속량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각기 너희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분부했습니다.

한국 기독자에게는 민족적 십자가도 있고 크리스챤이 져야 할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있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으로 사는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더 큰 생명,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한국 민족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족적 수난 없이 진정한, 그리고 영원한 민족적 부활도 없습니다.

한국민족의 수난은 한국민족의 영광입니다. 그리스도나 크리스챤에게서 십자가를 제외하면 “이빨 빠진 사자”가 됩니다. 덩치 크고 큰 소리 쳐도 싱겁게만 보입니다. 십자가는 “심볼”이나 “노리개”나 미술품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갖고 다니기에는 너무 무겁고 힘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내가 십자가를 갖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나를 갖는 것입니다. 내가 거기에 내 생명을 도박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 고난의 무덤에서 승리의 부활이 돌문을 헤치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민족적 사명도 이것을 선포하는 데서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지금도 한국은 수난자요 한국민족은 고난의 민족입니다.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38선이 그어졌습니다. 그리고 두 강대국 진영은 남과 북에 제각기 자기들 우표딱지를 붙여 놓았습니다. 남과 북의 정치 집권자는 그들 배후 권력에 붙어 돌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민족이 서로 반목하고 동족상잔까지 했습니다. 지금도 화해보다도 상극을 격동시키고 있습니다.

미국 국방장관은 김일성이 38선을 넘는 날에는 가차없이 원자탄을 퍼 붓는다고 공언했습니다.

새로 새로 만들어내는 고성능 원자탄을 약소민족 섬멸에서 “테스트” 해보려는 심산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무던히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입니다.

듣는 바에 의하면 박정희 정권과 결탁한 미국 국방부는 적어도 720개의 핵무기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누구를 Target으로 준비된 것입니까?

미국의 군사적 “라이벌”인 “소련”이라고 가정합시다. 그러나 소련을 건드리면 너 나 없이 둘다 망하고 전 인류가 사멸할 우려가 짙답니다. 그러니까 중간에 있는 약소국에 공갈치는 것일 수 있겠습니다.

박정희 씨는 일시 흐뭇해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민족의 파숫꾼”으로 자부하는 한국 기독자로서는 소름끼치는 “광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 기독자는 이런 위기에서 “NO”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NO”의 발언이 없으면 “YES”에 가산되고 “YES”자의 심판 자리에 같은 죄수로 동참하게 됩니다.

이것이 한국 기독자의 “위기”입니다.

양의 옷을 입은 이리 떼가 북에도 남에도 돌격대 같이 날뜁니다. 한국 기독자는 “양”을 위해 목숨 바치는 선한 목자에게 미래 한국의 민족상과 역사를 맡기고 그것을 위하여 선한 목자와 전선의 대열을 같이 하는 “십자가 군병”이 됩시다. 소수지만 이런 크리스챤 그룹이 한국에 있어 증언하고 데모하고 옥에 갇히고 더러는 사형 또는 무기로 감방에서 고난과 죽음을 영광으로 변질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국민족의 자랑이고 한국민족의 종교 지향성의 꽃이고 열매입니다.

그 빛이 만방에 새 아침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한국에 찾아와서 그들과 고난을 나누고 있습니다.

[1975. 10. 시카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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