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6일 화요일

[범용기 제6권] (1611) “義”를 심어 다시 산다

[범용기 제6권] (1611) “義”를 심어 다시 산다(마태 6:33)

‘부활’은 ‘죽는다’는 것을 선행조건으로 합니다. 죽지 않은 사람에게 부활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희랍신화에 Prometius는 인간을 위해서 불을 도둑질하다가 최고신 Zeus에게 들켜서 큰 바위에 비끄러 매여 그 간을 독수리가 파먹게 하는 벌을 받았답니다. 그런데 파먹으면 그만큼 또 간이 자라서 계속 독수리에게 간을 뜯기는 괴로움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 끝장 안나는 괴로움보다 끝맺는 죽음을 그는 얼마나 원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죽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부활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말씀에 있는 ‘지옥상’인 것입니다.

“파먹는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것이 지옥의 얼굴일 것입니다.

해결 없는 영속적인 고통입니다.

죽는다는 것도 각양각색입니다.

앓아 죽는다, 교통사고로 죽는다, 술먹고 주먹질하다 맞아 죽는다, 도둑질 하다 잡혀 죽는다 등등은 ‘인간’으로서의 죽음이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너무 가혹한 윤리적 비판을 가하는 교조적인 Moralist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무언가 가치 있는 죽음, 만인의 진정한 행복을 위한 죽음, 인간이 참으로 인간되게 하기 위한 죽음, 인격적 결단에 의한 선택에서의 죽음, 자기보전과 자기존엄이 양립할 수 없을 경우에 후자를 택한 결과로서의 죽음 등등은 인간다운 죽음일 것이며, 그런 죽음은 결코 매몰되지 않고, 그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했습니다. “나라와 의” -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나라격’이요 하느님의 의는 인간이 사모할 수 있는 최고의 의일 것입니다.

인간의 나라, 인간의 의보다도 더 높은 나라와 의를 일상생활의 제일의적인 목표로 삼고 살라는 것입니다.

“나라와 의”는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됩니다. “나라”는 “의”를 행할 때에만 ‘나라’ 노릇을 합니다. 의는 나라의 면류관입니다.

근대 서구문명에서는 ‘나라와 의’ 보다도 ‘나라와 이익’을 불가분의 관계로 생각합니다. 국가 행위를 국가의 이해 관계에서만 결정하려 합니다. 그것은 국가 성격의 타락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현대 국가에서는 자기 국가의 이익을 증대시키고 그것을 수호할 권력(Power)만 있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념도 도의도 이해관계 앞에서는 발언권이 없습니다. 이런 것이 소위 현대 선진 국가들의 얼굴이 아닌가 싶습니다.

소위 후진국 또는 개발도상에 있는 나라들도 같은 차의 뒷꽁무니에 편승하여 이해관계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못 가진 나라가 가진 나라와 이익 경쟁을 하여 이길 수는 없으니까 가진 나라의 신세지려고 빌붙습니다.

신세를 지면 저절로 비굴해집니다. 빚지고 당당할 수는 없습니다.

강대국들 끼리서는 “누가 더 크냐?”의 힘비기기가 벌어집니다. 그렇다고 당장 맞붙어 싸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힘의 균형’에서 그때 그때의 평준선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그 균형이 깨어질지, 언제 그 이해관계가 상상될지 예측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나라와 나라들이 모두 잘 되려면 이익과 권력보다도 ‘義’와 ‘仁’을 선행시켜야 합니다. 그 나라를 ‘의’로 성격화해야 한단 말입니다.

약한 나라도 약한 대로 의로운 정부와 국민이 되고 강한 나라는 강한대로 국제적인 의의 실현에 이바지해야 하겠습니다.

의가 무어냐고 따지겠지요.

‘브룬너’는 종래의 정의대로 “Every man his due”라고 했습니다. 모두가 억울함 없이 산다면 의가 다스려지는 나라라 하겠습니다. 최대 다수가 최대 행복을 누리면서 산다면 그 나라는 의롭다 할 수 있겠습니다.

요새, 한국민이 갈구하는 ‘의’는 개인자유와 사회정의라 하겠습니다.

일제 36년 동안 한국민은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사모하듯 자유를 갈망했습니다. 한국 사람에게는 정치적 자유는 물론이고 경제적 자유, 문화와 언론과 교육의 자유도 거부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올려보고 싶던 태극기는 꿈에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무릎 위에서 재롱부리며 배운 우리말은 소학교 선생 앞에서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나도 학교에 가게 됐다고 깡충깡충 뛰며 집을 나가던 어린이가 저녁이면 시무룩해 돌아옵니다. 선생님이 들어와 뭐라고 말하는지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해서 온종일 울고만 싶었노라고 눈물이 글썽해집니다. 사랑스러운 애기가 제 말을 잃은 슬픔을 그 부모가 눈물 없이 들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오! 하느님이여, 언제까지니이까?” 하고 안타까와한 때도 있었습니다만, 10년 20년 지내는 동안에 그런대로 심리적, 생리적인 마비상태가 생겨서 그저 그런 것은 그런 것이지 하고 거의 감각마저 잃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해방이다” 하는 소식이 퍼졌습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날이 왔던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이 어마어마한 사건이 3천만 우리 민족 앞에 선포되었습니다. 거리는 시민들로 메꿔지고 “만세” 소리가 격랑같이 천지를 뒤흔듭니다.

한국 사람치고 미친 듯 기뻐 날뛰지 않은 사람은 아무 데도 없었습니다.

친일파라던 사람들도 체면 없이 기뻐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겁을 먹고 골방에 숨습니다. 그들은, 일본 사람이 다 된 줄 믿었던 친일파 조선인까지도 그렇게 기뻐 날뛰는 것을 보고 “아, 우리가 속았구나!”하고 탄식합니다. “제발 우리를 알몸으로라도 죽잖고 고향에 돌아가게 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이 자유는 연합국이 전후 국제관계 조정책의 하나로 전패국인 일본에 가한 항복조항의 일환에서 실시된 것이었습니다만, 우리 신앙인의 심경에 부딪친 감격은 거기에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생활 50년의 끝날, 갑자기 페르시아의 Darius가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키고, 포로된 모든 이민족에게 자유 해방을 선포했을 때, 이스라엘의 예언자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느님이 말씀하신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에 외쳐 알리라.
“그 고역의 때가 끝났다.
그 죄악이 용서됐다”고.
기쁜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하느님께서 친히 다스린다 하라.
그는 목자같이 양 무리를 먹이신다.
어린 양은 팔로 안고
어미 암양을 쓰다듬어 이끄신다.
누가 감히 -
하느님과 의논해 가지고
이런 일을 있게 하겠느냐? …
- 이사야 40:1-20

뼘으로 하늘을 재었느냐?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느냐
저울로 산들을 달아 보았느냐
하느님 앞에서
열방은 -
통의 한 방울 물,
저울의 작은 티끌,
섬들은 -
떠오르는 먼지로다.

한국기독교인들에게 느껴진 8ㆍ15 해방은 바로 이런 종교적 신앙적 감격이었습니다. 나는 이것이 어린애 같이 유치한 주관이라고 웃어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역사의 사실만을 보고 그 배후에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을 볼 줄 모르는 인간에게 미래를 맡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구약 다니엘서에 나타나는 기사를 보기로 합시다.

바벨론 대제국의 전성기에 권력을 취하고 지위에 교만한 제왕 벨사살의 궁궐 안 향연이 한결 무르익었을 때 그 화사한 궁전 벽에 난데 없는 손가락이 나타났습니다. 그 손가락은 이상한 글짜를 씁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그 뜻은 -
“계산됐다.
계산됐다.
부족하다.
나뉘운다.”

라고 합니다.

무시무시한 얘깁니다. 이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분의 계산하는 손가락이 무서운 줄 모르는 인간에게 나라를 맡긴다는 것은 진실로 위험한 일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자유를 얻었습니다. 자유는 우리에게 주어져서 우리가 받은 자유였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요 민족의 기적이었습니다. “이제 네 나라를 일본인에게서 송두리째 찾아서 너희에게 송두리째 맡긴다. 잘해봐라! ……” 하는 것이 8ㆍ15의 하느님 처사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치에 졸렬해서 여러 가지 과오를 범한다 하더라도 ‘이’ 주어진 하늘의 선물인 ‘자유’만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첫 대통령 이승만이 독재하려다 넘어졌습니다. 민주당 정권은 첫 솜씨라 “본때 있게” 일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자유만은 존중했습니다. “과잉자유”라는 평도 있었습니다만,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졌더라면 정돈되고 질서가 잡혔을 것입니다.

그런데 난데 없는, 일본군벌의 망령에 잡힌, 군인들이 적군을 격멸하는 본새로 불효공격을 감행하여 정부와 국민을 포로로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민족인 바벨론에 포로돼 갔지만 우리는 제 나라에서 제 나라 정부에 포로가 됐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개인적으로 인간권이 박탈되고 사회적으로 불의와 부정이 밀림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독재정권과 부패세력이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 이름은 ‘독재부정’입니다.

이것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민주주의적 자유운동이 앞서야 할 것은 물론입니다. 질식하기 전에 숨통을 열어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이것 자체가 의로운 운동입니다만, 특별한 관심으로, 불의와 패역의 사회 속에 ‘정의’를 심어야 하겠습니다. 바른 말을 한다는 것은 ‘의’의 표현입니다. 불의가 ‘체제악’으로 굳어진 ‘토양’에 의를 심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에 죽는’, ‘목숨’을 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부패부정한 나라라 하더라도 하늘과 땅에는 정기가 감돕니다. 역사는 역시 정의편입니다.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라……” 먼저 의를 구하면 일상생활에 필요한 필수품은 하느님이 주신다는 말입니다.

의인의 죽음은, 나라에 의가 서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악’과 불의의 손에 죽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손가락”이 집권자가 지은 적금을 계산합니다. 그리고 심판합니다.

하느님의 의를 매몰시킬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때가 이르면 반드시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의인의 죽음은 자살이 아닙니다. 의를 외치다가 악한 권력자에게 죽여지는 죽음입니다. 그 죽음은 역사에 묻혔다가 “제3일”에 다시 살아납니다. 부활한 그에게까지 손댈 수 있는 권력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희는 육신을 죽이되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작년 부활절 서울 남산에서 열렸던 각 교파 합동 부활절 찬양예배 때에 “민주주의는 부활한다…”는 삐라가 치솟는 아침해에 휘날린 것을 계기고 오늘까지 민주와 자유를 향한 우리 민족의 생명은 날마다 자라고 퍼지고 힘차게 도전합니다.

이 자유는 정의의 자유입니다.

자유 안에 의가 있습니다. 의 안에 자유가 있습니다.

“자유하면서 바르게 잘 사는 나라”를 이룩하려는 운동을 매장할 권력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에서 봅니다. 의에 심어 다시 사는 역사를 창조합니다. 그래서 우리 미래 역사의 처음 익은 열매가 됩시다.

1974년 5월 N.Y.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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