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29일 월요일

[범용기 제6권] (1603) 산 자를 찾는 인간

[범용기 제6권] (1603) 산 자를 찾는 인간

예수를 우리는 ‘구세주’라고 합니다. 인간을 구원해 주신, 지금도 구원하시는 주님이란 말입니다. ‘구원’이란 것은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사업입니다.

인간이 ‘인간’답지 못하게 된 상황을 그 근본적, Fundamental한 점에서 보면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인간의 범죄성입니다. 인간에게 범죄성이 없다면 세상은 벌써 ‘낙원’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참 인간은 죄악을 범하는 죄인, 악인일 수가 없습니다.

둘째로 인간의 사망성입니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완전히 파멸 당한다는 것입니다. 원래는 하느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입니다. 죽게끔 지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죽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영’이십니다. 하느님의 형상도 영적 존재일 것입니다. ‘영’은 죽지 않습니다. ‘영체’는 시간공간에 제약받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정상태’가 아니라, 변태입니다. 인간이 자기가 사랑하는 자녀나 애인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죽음은 ugly한 것입니다. 시체를 아무리 미화해도 거기에는 인간의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두가지 근본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인간을 구원했습니다.

첫째로 그는 십자가의 죽음으로서 천하만민의 죄와 죄벌의 죄과와 죄성을 속량했습니다. 그래서 ‘죄’가 인간을 ‘정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인간의 죄 대신에 하느님의 의가 인간을 Dominate하게 했습니다.

둘째로 부활에서 사망을 이겼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인간의 Property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부활절이니까 후자에 대해서 얘기하기로 하겠습니다.

“인간은 나서 자라서 살려고 일하다가 죽는다. 이것이 인간 실태다.”

“내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있다.
내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없다.
이것만은 진실이다.
길손이여,
먹고 마시고 즐겨라.
그리고 이리로 와라.”

이런 글이 적힌 로마인의 비석이 땅 속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동양에도 이런 ‘애조’를 띤 문학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아.
영웅 호걸이 몇몇이며
재자 가인이 몇몇이냐?
우리도 한번 죽어
지금은 분토되어……”

하는 우리의 민속가요도 같은 내용입니다.

“일년마다 일년봄은 있어도,
백년에 백세인은 없느니,
그대, 꽃 앞에서
몇 번이나 취했던고
만냥던져 술 사고
가난 걱정 말게나.”

一年始有一年春
百歲會無百歲人
能向花前幾回醉
十千活酒莫辭貧

이것은 기원 8세기 중국시인의 석별시랍니다.

“백년 동안에 백살 먹은 인간은 없더라.” 지금은 백살 넘어 사는 분도 혹간 있다고 들었습니다. 옛날 위생이 제대로 안된 삶에서는 평균연령이 무던히 낮았던 것이 사실이겠습니다. 이런 죽음의 애조(哀調)는 세계적입니다. 인생의 마감은 ‘죽음’이란 Period입니다. 그것을 돌파한 인간도 없고 돌파할 인간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이란 말과 ‘Mortal’이란 말은 동의어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 나사렛 예수는 적에게 살해를 당하고 관헌에게 시체검사를 받고 무덤에 뉘였고 바위로 무덤문을 막고 그것을 관헌 입회하에 인봉하고 로마 병정으로 지키게 했는데도 제3일에 무덤이 열리고 다시 살아 제자들에게 나타나고 40일을 제자들과 같이 지내고 제자들 보는 가운데서 승천하였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Mythology가 아닙니다. 제자들도 믿어지지 않아서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안믿을 수 없게 됐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제자들을 비롯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천년동안 억억만 신도들이 죽음으로 증거한 Reality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과학만능의 시대에서도 부활절은 전 세계의 명절로 이렇게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에게 있어서 죽음은 삶의 영원한 불꽃이었습니다. 무덤은 그의 삶을 묻어버리는 토굴이 아니라, 그의 더 큰 삶에의 관문이었습니다. 그 길은 Highway를 신나게 달리다가 천길 만길 벼랑에 굴러 떨어지는 편한 길이 아니라, 생명의 좁은 문으로 향한 험한 길이었습니다.

예수에게 있어서는, 인간은 살다가 죽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 살도록 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자기만 살겠다고 하느님도 이웃도 자연도 아랑곳없이 제 욕심만 부리면 살려다가 죽는 것이고 인간이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정의와 나 이외의 모든 인간들을 위하여 나는 죽어도 좋다고 결단하고 목숨을 모험하면 그는 죽어도 사는 것이며 오히려 죽어서 사는 것이라는 말씀이겠습니다.

성서에서는 ‘죽음’을 다만 육체 Physical Body가 분해되는 현상만이라고 가르치지는 않았습니다.

적어도 ‘인간’의 죽음을 인간과 하느님 관계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 ‘아담’에게 죽음이 선고된 것은 그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왜곡시키고 단절시켰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죄와 죽음을 인과(因果) 관계로 풀이했습니다. 바울은 율법학자였기 때문에 율법의 줄거리를 더듬은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범죄성은 그대로니 인간은 죄 짓기 마련인데, 인간은 무엇이 ‘죄’인 것도 모르고 죄를 짓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에게는 유태인에게서처럼 율법 조문이 없는 대신에 양심이 있어서 선과 악을 분간하고 선만 행하라는 명령을 듣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태인에게는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율법은 무엇하는 것입니까?

율법은 인간에게 죄가 무엇인 것을 알려주고 알려준 대로 못하는 인간을 죄인이라고 선언합니다. 죄인은 거룩한 하느님 앞에 서지 못합니다. 서면 심판을 받습니다. 심판은 죽음의 선고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인간에게 있어서 사형 선고자가 됩니다. 인간을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야고보도 말했습니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

말하자면 인간이 하느님과 이웃을 이반하고 자기 욕심만 부릴 때 그 인간은 “죄를 잉태”한 것이고 그 죄가 세상에 태어나서 자라면, 결국 자기 혼자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도 죽고 만다는 것이겠습니다.

인간의 삶과 죽음은, 그러므로, 인간관계, 도덕과 신앙관계, 하느님 관계에서 규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 죄가 용서를 받고 의인으로 선포된 때, 죽음의 권세는 인간에게 덮쳐오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하느님이 의롭다고 선포한 인간을 누가 감히 정죄하겠는가? 그리스도가 다시 사셔서 하느님 우편에 앉아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하시는데 누가 능히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겠는가? 환란이냐? 곤고냐, 박해냐, 굶주림이냐, 헐벗음이냐, 위험이냐, 칼이냐?”

“우리는 종일 당신을 위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는 도살당한 양과 같이 천대를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이나 삶이나 천사나 주관자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권세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그 밖의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앞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 없으리라 기고만장의 인간입니다. 죽음을 이긴 개선장군의 입성입니다.

초대교회 300년 동안, 크리스천은 무서운 박해 속을 살았습니다. 로마의 땅 위에는 발붙일 흙이 없어 땅 아래 백척 밑을 두더쥐처럼 파고들어 그 땅굴 속에 뼈를 묻으며 주님 재림과 부활의 새벽을 기다렸습니다. “지하의 로마가 지상의 로마보다 더 크다”는 것은 신앙인의 로마가 세속권력의 로마보다 크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들은 그 컴컴한 무덤이 터지고 로마의 일곱 언덕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이 태양같이 빛날 날을 믿고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것이 왜곡된 의미에서 실현되었다고는 합니다만, 어쨌든 콘스탄틴 대제와 데오도시우스 황제 등 크리스천 카이자들의 영단으로 그들은 ‘지하’의 로마에서 ‘지상’의 로마에로 치솟았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천 유럽’이 탄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낙원도 아니고 ‘유토피아’도 아니고 지상천국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오늘의 이만큼한 인간자유, 인간해방, 세계선교, 문화건설 등이 거기서부터 흘러 나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 부활하는 종교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그는 다시 살아서 갈릴리로 갔다.” 한 열린 무덤 앞 천사의 말은 인간에게서 죽음을 삶으로 대체시킨 순간에 하느님이 인간에게 선포한 영생의 Anunciation이었습니다. 인간은 죽음으로 ‘종지부’가 찍혀지는 존재가 아니고 하느님 형상으로, 하느님과 같이 영생하는 존재라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신 날이었습니다. 그가 ‘인간회복’의 처음 익은 열매가 되었고 우리도 그의 안에서 종말에는 그와 같이 될 것입니다.

이런 확신에서 우리는 바울과 함께 승리의 노래를 부릅니다.

“죽음아 네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부활하신 속죄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 앞에 감사합니다.…” (고린도전서 15:54-57)

1973년 4월 22일 오전 5시
부활절 새벽 예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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