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19일 금요일

[범용기 제5권] (125) 동경에서 – 춤을 잃은 민족

[범용기 제5권] (125) 동경에서 – 춤을 잃은 민족

우리 민족에게도 춤은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있기는 하다. “강강수월래”니 “파계승의 고민을 춤추는 승무”니 농악 춤이니, 무당춤이니, 봉산 탈춤이니 하는 등등이 남아 있기는 하다.

유동식 박사의 “민족종교화 한국문화”란 저서에 의하면, 우리 민족에게는 축제풍습이 한 옛날부터 뿌리깊게 전승되었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동맹’(東盟), 부여의 ‘영고’(迎鼓), 동에의 ‘무천’(舞天), 한의 소도제(蘇塗祭) 등등이 있어서 축제날에는 전 부락민이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밤새도록 즐겼다고 한다. 고려조에 와서는 위에 열거한 여러 가지 축제를 한데 묶어 팔관회(八關會)를 만들고 불교의 관등(觀燈) 놀이까지 곁들여 종교적인 ‘카니발’을 즐겼다고 한다.

이조에와서는 유교가 국교 노릇을 하게 되면서 모두가 점잖은 선비로 자신을 분장(粉裝)하려 했다. 소년시절에 벌써 어른구실을 하려든다. ‘조로증’에 글린다. 아이들까지도 까불고 뛰고 재재거리고 뛰노는 자유를 잃었다.

은실 달빛, 잔잔한 광파(光波)에 싸여 흥겨운 군무(群舞)에 밤새우던 민중의 즐거움은 증발됐다. 그리고 일년에 두 번 대성전 ‘식전’ 때에 ‘국악단’의 아악연주가 억지로 남아있는 정도다. ‘아악’은 너무 ‘템포’가 느리고 기분이 유장하여, ‘서민’의 음악으로서는 맞을 것 같지 않다. 춤도 몸놀림이 너무 더디어서 답답증이 앞선다.

요컨대, 그것도 양반층의 구경에 국한된 연기였다. 양반 자신들은 ‘관객’의 선을 넘지 않는다. 그들이 춤이나 노래에 섞여 들지는 않는다.

가난하고 쪼들리고, 육중한 연자매틀에 끼어 터지고, 부서진 민중에게 무슨 춤이 있고 노래가 있겠느냐 할 수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우크라이나’ 농민들은 러시아인에게 농노같이 천대받고 농토가 다른 러시아 지주에게 팔리며는 그 농토에 덤으로 붙여 팔려가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인들은 ‘군무’를 춤추며 즐겼다. 캐나다에 옮겨와서도 그들은 대대손손 그들의 민속춤을 ‘전지전승’,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청교도들이 총 갖고 아프리카 대륙에 기어올라 야수사냥 하듯 흑인종을 무더기로 잡았다. 발목, 손목에 쇠고랑 채워 목선에 실어왓다. ‘보스톤’의 노예시장에서 경매했다. 흑인은 짐승이고 물건이고 재산이지 ‘인간’은 아니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미 대륙에서의 흑인들을 보라! 쾌활하고 농담 잘하고 체력은 세고 운동경기에 특재가 있고, 호콩 속에서 수백종의 특용품을 발견한 ‘죠오지ㆍ워싱턴’ 커버 같은 분도 났다. 천하무적의 권투선수도 났고, 슈퍼스타의 농구, 야구 선수들도 수두룩하다. 지금 젊은 세대의 매혹적인 춤과 노래도 주로 흑인족의 영역이라 하겠다.

환경이 우리에게 도전한다. 우리는 이에 응전한다. 응전태세가 우리의 운명을 만들어 낸다. 흑인족은 미국에서 용감하게 응전했다. 그 ‘응전’의 과실(果實)을 재투자하여 도전한다. ‘관계’에서 흑인시장도 나왔고 유엔 미국대사로도 뽑혔었다.

그들은 곤고 가운데서도 춤추고 노래하며 일한다. 그들은 결코 좌절되지 않는다. 자신들의 생존과 발전을 위하여 용감하게 지혜롭게 싸운다. 그들은 미국 역사에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는다. 적응하면서 항전한다.

아메리카 인디안족의 강경일변도와 ‘게토’ 사회 습속에는 동조하지 않는다. 그들은 춤추며 노래하며 즐겁게 유흥기분으로 싸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 한국 민중에게서 노래와 춤을 사그라지게 한 것은 유교 지도자들의 젊잖음 빼는 ‘근엄’(謹嚴) 습성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성 싶다.

우리는 노래와 춤을 되찾아야 되겠다. 기독교는 ‘노래’를 갖고 들어왔다. 그러나 ‘춤’은 ‘금단의 과일’이었다. 그런데 찬송의 노래에도 문제가 있다. 그 노래의 작사자 작곡자가 모두 서양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의 심금에는 자연스레 맞아들지 않는다.

필자는 8ㆍ15 해방 직후에 “기독교가 우리민족 종교로 되고, 찬송가가 우리 노래의 ‘뉴앙스’를 품겨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사실, 개편 찬송가에는 우리 교우들이 작사 작곡한 것이 적잖이 끼어있다.

성가 전공에 일생을 바친 나운영 박사, 박재훈 박사, 곽상수 박사, 박태준 박사, 장수철 박사 등 선각자의 공헌은 간과할 수 없겠다.

이제 개편 찬송가 중에서 우리 성가 전문가들이 작사 작곡한 것만을 뽑아보면 아래와 같다.

(1) 237장 : “어서 돌아오오”는 전영택 작사ㆍ박재훈 작곡의 것이고, (2) 27장 : “우리 예배를 받아주소서”는 김정준 작사ㆍ곽상수 작곡이고, (3) 55장 : “잠들기 전에”는 서정운 작사ㆍ곽상수 작곡이고, (4) 61장 : “주는 나의 목자”는 최봉춘 작사ㆍ장수철 작곡이고, (5) 86장 : “구주 예수 예수 나셨다”는 임성길 작사ㆍ장수철 작곡의 것이고, (6) 172장 “인생을 건지신 예수”는 마경일 작사ㆍ박태준 작곡의 것이고, (7) 212장 “교회의 노래”는 김재준 작사ㆍ이동훈 작곡이고, (8) 213장 “하나의 세계”는 홍현설 작사ㆍ안신영 작곡이고, (9) 321장 “외로운 배 한척”은 김활란 작사ㆍ이동훈 작곡이고, (10) 337장 “생명을 주는 길”은 반피득 작사ㆍ나운영 작곡이고, (11) 379장 “죽도록 충성하라”는 정용철 작사ㆍ이유선 작곡이고, (12) 387장 “부름 받은 몸”은 이호운 작사ㆍ이유선 작곡이고, (13) 401장 “믿는 자여 어지할꼬”는 석진영 작사ㆍ박재훈 작곡이고, (14) 402장 “일하러 가세”는 남궁억 작사ㆍ이동훈 작곡이고, (15) 461장 “주님의 은혜라”는 안신영 작사ㆍ김두완 작곡이고, (16) 463장 “참사랑하오리다”는 정용철 작사ㆍ곽상수 작곡이고, (17) 473장 “귀한 주의 사랑”은 박태준 작사ㆍ작곡한 것이고, (18) 482장 “주와 함께 살리라”는 이호운 작사ㆍ박태준 작곡이고, (19) 488장“하늘 가는 길”은 소안련 작사ㆍ안신영 작곡이고, (20) 533장 “어머니 날”은 주요한 작사ㆍ구두회 작곡이고, (21) 538장 “감사절 찬송”은 임옥인 작사ㆍ박태준 작곡이고, (22) 545장 “우리집”은 전영택 작사ㆍ구두회 작곡이고, (23) 546장 “주의 가정”은 문익환 작사ㆍ곽상수 작곡이고, (24) 565장 “부름받은 젊은이”는 반병섭 작사ㆍ이동훈 작곡이다.

한국인의 찬송가 작곡이 찬송가의 본류에서 이탈된 것은 아니지만, 역시 서양인의 작곡에서 느낄 수 없는 한국적인 ‘뉴앙스’가 있어서 정서의 Depth에 올린다. 그점은 나운영 박사의 작곡에서도 여실하게 느낄 수 있다. 그 싹을 키우자는 것이다.

이화대학 음악과 작곡 교수로 있던 조병옥 여사가 서독에 산다. 그 분은 새찬송가 작곡에 정진한다. 종종 서독 사람들 모임에서 발표하기도 한다. 듣고 난 서독 인사들 중에는 “그게 서양 곡조지 어디 너희 곡이냐”고 따지는 사람들이 적잖게 있다고 했다. 역시 서독인들은 한국 특유의 멋을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진짜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찬송의 노래가 많이 작사 작곡되야 하겠다.

‘성탄절’이 오면 의례 ‘헨델’의 ‘메시야’를 듣는다. 하늘 영광을 본다. 신자의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역시 ‘서구’적이다. 한국 기독자들도 역사 안에서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을 체험한다. 이제부터는 한국멋 섞인 ‘메시야’ 찬가가 한국에서부터 전 세계에 울려퍼질 ‘애넌시에이션’이 들려오는 것 같다.

춤은 어떤가? 교회당 안에서, 강단에서 어른들이 춤으로 예배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는 10여년 전부터 이것을 시도해 봤다. 그러나 ‘성역’을 모독한다는 ‘청교도’적 ‘극성’이 좀처럼 해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린이들의 ‘발레식’ 무용은 전부터도 문제 밖이었으니 지금도 그럴 것으로 짐작된다.

필자는 3ㆍ1운동 다음해에 서울 승동교회당에서 어린이들이 연출하는 ‘열세집’이라는 가극(?)을 본 일이 있다. 승동예배당은 초만원이었다. 때가 때니만큼, 어른들은 통곡하며 듣는다. 나라 없는 어린것들이 13도를 상징한 열세가닭의 채색줄을 제각기 한 줄씩 쥐고, 한 기둥에 얽혔다 풀렸다 하며 열세집을 노래할 때, 어른들 눈에서 눈물이 없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저 순진한 어린 것들이 비극을 가슴 깊이 안고 평생을 ‘망국민’으로 일인의 ‘불독’(투견)에게 물리고 일본 상인의 ‘거머리’에게 피를 빨려야 하겠으니, 통곡 통곡해도 시원치가 않았던 것이다. 누구의 웅변이 이 아이들의 발레극보다 더 감동적일 수 있겠는가?

이 ‘극’으로서의 연출은 ‘성당’인 승동교회당과 ‘성단’이라는 그 교회 ‘성소’에 던져진 ‘영광’이었고 결코 ‘모독’이 아니었다.

카톨릭의 ‘미사’도 상징적인 성극이요, 신교의 찬양대도 소리로서의 성극이다.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옛날의 우리 민족은 춤추는 민족이었다. 민중에게서 춤을 증발시킨 것은 노쇄증에 걸린 유교의 노쇄문화 때문이었다. 젊은 기독교에서마저 ‘조로증’에 걸릴 필요는 없겠다. 친교의 시간에 한때 원무(圓舞)로 사귄다면 잡됨없이 서로 가까워질 것이 아니겠는가?

한국에서의 목요기도회 그룹 사람들은 예배하고 증언하고, 모두 모두 손 잡고 평안을 나누고서 한참 춤춘다. 유학자들처럼 굳어진 얼굴이 아니다. 웃고 서로 놀리고 남녀 모두 형제자매가 되어 막힌데 없다. ‘난잡’ 속에 질서가 있다. 농담 속에 ‘메시지’가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기성교회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기관과 교회사업에 충성으로 봉사한다. 교회와 그룹이 그리스도의 정의로운 사랑으로 한 몸을 세운다. 제도적인 교회가 강제로 해산되도, 그룹은 누룩같이 남아 더 아름다운 하늘나라를 자래울 것이다. 그들에게는 좌절이 없다. 춤추며 노래하며 하늘나라를 땅에 세운다. 우리 민족 모두가 잃었던 노래와 춤을 되찾자!

댓글 1개:

  1. 장공 김재준 목사의 글을 읽다보면... 민주화 운동에 대한 염원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동시에... 한국의 기독교가 서양의 옷을 벗고 한국의 문화 속에서 ''토착화'되는 것을 바라는 글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

    우리의 노래와 춤을 되찾아서 우리의 정서를 제대로 담은 신앙고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조금은 낯설지만 그리 낯설지 않은 이름을 발견했다... 개편찬송가의 379장 “죽도록 충성하라”, 463장 “참사랑하오리다”를 작사한 '정용철 목사'다.

    정용철 목사는 오늘날의 21세기 찬송가에서 218장의 "네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 597장의 "이전에 주님을 내가 몰라"라는 찬송가 작사자로 알려져 있다.

    정용철 목사님은 우리 교단(한국기독교장로회)의 목사로 신암교회를 시무하셨고 해외에서 올해(!) 소천하셨다고 한다. 그분이 1918년생이시니 딱 100년을 사신 것이다. 그리고 기장이 새로 출발한 즈음에 교단의 굳은일을 맡아 하면서 기장을 기장답게 세우기 위해서 노력하셨다.

    올해가 '문익환, 장준하, 서남동, 박봉랑' 100주기라고 해서 다양한 행사를 교단에서 마련했었다.

    그런데 가끔은 그런 행사들을 보면서... 우리는 기존에 알려져 있는 분들만을 기념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1918년생으로 한신과 기장을 위해 헌신한 분들이 네 분 밖에 없는 것이 아니고... 더 많은 목회자들이 어려운 시절에 한신을 살리고 기장을 세우기 위해서 노력했었다는 사실까지 나아갔다면... 올해가 한신과 기장에는 더욱 풍성한 한해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문익환, 장준하, 서남동, 박봉랑' 100주기를 맞이해서... 그분들과 함께 학교를 다니고 기장을 지켰던 많은 목회자들을 발굴하고 함께 기념할 수 있는 세심한 배려가 좀 부족했다는 생각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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