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17일 수요일

[범용기 제5권] (104) 동경에서 – 퇴원하고 나서

[범용기 제5권] (104) 동경에서 – 퇴원하고 나서

1981년 6월 한달 – 퇴원하고 나서 나는 주로 누워 쉬고 있었다. 그러니까 별 기록할 것도 없다. 집필은 늘 했고 “제3일” 간행도 계속했다. 일이라면 그런 것 뿐이겠다.

고요한 고독 중에서 단상(短想)은 많이 얻었다.

6월 26일(금) - 서울 능곡에서 목회하던 한신동창 김수상 목사가 Toronto에 다니러 왔다가 내 방에 찾아왔다. 그도 백발이다. 은퇴목사란다.

김춘배, 우동철, 이주원 등과 함께 은퇴목사 구락부에 들어 명승지 탐승도 다니곤 한다는 것이다. 생활태도는 ‘여세추이’(與世推移)다.

6월 27일(토) - 12:30AM에 서울의 김용준 박사 동생인 김용옥 박사가 내방했다. 그는 중국철학 전공으로 고대 동양철학과를 마치고 대만대학에서 석사가 됐단다.

중국문화가 몸에 밴 진지한 학자다. 내 병상에 앉아 3시간 얘기했다. 사기(邪氣)없는 탈속선인(脫俗仙人) 같은 인상을 준다. 나와 통하는 데가 있어서 즐겁게 보람있는 ‘해후’라고 느꼈다.

이건 후일담이지만, 그는 82년 5월에 Harvard 대학에서 중국철학 전공으로 당당하게 박사학위를 땄다.

6월 29일(월) - “바람따라 구름같이”라는 방랑수필을 쓰기 시작했다.

7월 13일(월) - “제3일” 속간 제60호를 발송한다. 이것을 마감으로 당분간 휴간할 것을 선언했다.

그 대신에 ‘범용기’란 자전을 써 내기로 한다.

7월 14일(화) - 주재용 박사, 손승희 박사 두 분이 내방해서 이상철 목사 방문, 만찬을 같이 했다.

7월 15일(수) - Dr. R. Kim에서 재진(再診)했다. 아직도 ‘현상유지’ 정도인데 장기환자로 꾸준히 치료해야 한다. 부은 것이 내렸지만 그건 약기운 때문이고 병이 근치되어 그런 것이 아니라고 경고한다.

7월 16일(목) - 서금찬 목사가 문병와서 기도했다.

7월 19일(일) - 주재용 박사가 ‘맥길’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귀국한다. 여러 가지 소식을 전했다.

7월 20일(월) - 배가 언찮아서 저녁식사는 ‘단식’이다.

7월 24일(목) - OFB에서 매달 $416씩 생활비를 보조한다고 결정, 통고해 왔다. 5월분부터 소급해 준다고 한다. ‘캐나다’는 왕도(王道)의 나라라고 맘속 깊이서 축복했다.

By Law 권리니까 어느 개인의 은혜나 덕택이랄 수는 없겠지만 사무당국자의 의사가 사건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것이 더 Real하다. 이번에 내 사건 맡은 분은 될 수 있는대로 허락되게 하는 편이었다. 고마웠다.

7월 26일(일) - 서울 수유리 한국신학대학 병설국민학교 박병희 교장이 국민학교 교장 60명을 인솔하고 캐나다와 미국에 견학하러 왔다. 전화로 알리면서 수유리 집에서 보낸 편지를 여기 우편으로 보내왔다. 명은, 명혜 둘 다 그 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그 애들 성격고 학습 능력 등에 대하여 자세한 보고를 들었다.

나는 Weston 이 목사 집 2층에 누워 있다.

7월 27일(월) - 김보경 박사와 박미경 여사 내외분이 문병왔다. 김보경 박사는 심리학 전공이다. 심리요법 강의를 들었다. 투병에는 병을 누를 투병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7월 31일(금) - 이상철 목사가 LA UM 총회에 다녀왔다.

OFB에 가서 7월분 생활비 $416을 받아왔다.

8월 2일(일) - N.Y.의 서화숙 장로 부부가 문병왔다.

의사 주는 Menu대로 식사하며는 영양부족으로 병이 득세하는 경우가 많으니 먹고 싶은대로 먹으라면서 너털웃음이다.

8월 3일(월) - 인철ㆍ혜원이 새 집을 사 갖고 이사하는 날인데 가보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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