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16일 화요일

[범용기 제5권] (90) 동경에서 – 고송총

[범용기 제5권] (90) 동경에서 – 고송총

4월 10일22 – 우리는 야스가신사(春日神社)를 탐방했다.

원래 야스가란 지방은 나라현 고시군 명일향촌(明日香寸 奈良古市) 한구역인데 남쪽 석무대(石無台) 고분 부근에서부터북쪽 향구산(香久山) 밑까지 약 24km, 동쪽 산기슭에서부터 야마가시노오까까지 약 1km밖에 안되는 좁은 지역이지만 거기에 아스까(春日)의 궁궐들을 비롯하여 비조사(飛鳥寺), 천원사(川原寺), 귤사(橘寺), 大宮大寺) 등의 대찰이 건립되었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스까’는 서울 즉 경성이었다. 지금은 허허벌판의 농지지만 학자들은 그 당시의 도시계획을 재현하는데 열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달수 씨의 『일본안의 조선문화』 제3권 p. 210~262) 우리도 아스까신사에 가 봤지만 나지막한 언덕 위에 헤일수 없이 많은 석등룡(石登龍)이 경내를 메꾸었고 눈 띄이게 한국문화를 얘기할 기분은 나지 않았다. 우리는 여기서 가까운 ‘다까마쓰’ 고분으로 발길을 옮겼다.

도대체 이 지방은 고구려 ‘이래민’을 ‘왕국’이었다. 그리고 더 넓게 히노구마(檜隈) 지방 자체가 고구려의 분국처럼 되어 있었다 한다.

이 다까마스(高松) 고분은 최근에 발굴되어 고대 한일관계 역사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룬 흥분의 고장이다. 다시 말한다면 소화 47년 3월 강원고고(江原考古)학 연구소의 조사에 의하여 발견된 것이다.

‘무사시노’ 벌판에서도 ‘고려촌’에 가까워질수록 다발(茶田)과 뽕나무 밭이 넓은 광야를 독점(?)했다. 차나무(茶木)도 뽕나무도 교목류에 속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무 밑에서 쳐다보며 잎사귀를 따곤했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 생나무 울타리(이께가끼)처럼 위가 가지런하고 두껍게 평평하게 잘렸다. 여인들 선 키에 알맞은 높이다. 선대로 자연스레 잎을 딴다.

고송고분(高松古墳)의 구조를 보면 규모는 좀 작아도 한국에서 발굴된 왕릉(王陵)들과 꼭 같다. 위 석곽의 척수(尺數)가 당시의 일본자로서는 맞지 않지만 고려척(‘고려’는 ‘고구려’를 의미한다)으로 재면 높이 3천, 깊이 3척, 길이 8척으로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다. 지금은 ‘국보’로서, 원형을 항구하게 보존하기 위해 철문으로 입구를 밀폐하고 그 안에 습도, 온도 등을 원상대로 유지하는 자동조절기계를 설치해서 일반관객의 출입이 막혀버렸다. 그 대신에 벌판을 짓고 전국의 권위있는 화가들을 동원하여 원형 그대로의 구조에 원화 그대로의 벽화를 그려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입장은 유료고 안내자의 설명이 붙는다. 나는 그 설명이 방해되어 귀가 시끄럽다. 그저 고요히 고구려의 옛조상 솜씨를 맘에 자청(刺靑)이라도 해가고 싶었다. 한국서 발굴된 왕총들과 꼭 같다고 느꼈다. 묘실도 부내구조가 같다. 그림도 남벽에 주작(朱雀), 북벽에 현무(玄武), 동벽에 청룡(靑龍), 서벽에 백호(白虎)가 1천 3백년 지난 오늘에도 원색이 사그러지지 않고 그대로 있다. 동벽은 일상(日象)이고, 서벽은 月象)인데 동벽 서벽에 모두 그 모퉁이에 남자군상 네명, 여자군상(群像) 네명씩 합하여 16명이 그려있다. 남벽의 그림은 도굴 때문에 파손됐다. 입은 의상들이 모두 고구려 식이다. 무덤 천정에는 하늘의 28숙(宿) 성좌(星座)가 둥근 금박에 붉은 선(線)으로 고착되어 있다.

일본기(日本紀)라는 일본고대사(古代史) 772년(보구 3년)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고시(古市) 군내 17현(縣)은 모두가 한(韓)민족이어서 타성은 한두집 밖에 없다”고.

한민족 가운데서도 한(漢)씨 족, 오(吳)씨 족이 차지한 일종의 분봉국(分封國) 같이 되어 양잠, 누에실, 무늬비단, 염색기둘 등등을 가르쳤다. 유명한 니시겐(西織)도 그분들 유산이라고 한다. 여기서 오(吳) 씨를 일본음으로 ‘구레’라고 읽는다. ‘고구려’에서 ‘고’자를 뗀 것으로서 사실은 고구려 이래민의 한 족속이라고 한다. 관서지방에는 백제, 신라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이래(移來) 또는 이식(移植)되었는데 한(漢) 씨는 백제 8대성 가운데 드는 대성이다. 그들이 동산(銅山) 발굴, 도자기 굽기 등등의 ‘선생님’ 기술자가 됐다는 것은 다 아는 상식이다.

지금도 아라다야끼(有田暻燒) 고오라끼 야끼(高麗燒)라는 백자, 청자가 비싸게 팔리는 선물이다. 고구려 승(僧) 담징(曇徵)의 법륭사(法隆寺) 벽화는 유명한데, 그 절의 구조는 비조사와 마찬가지로, 근년에 발굴된 고구려의 청암리 폐사와 꼭 같다고 한다. 도대체 일본사원(寺院)들은 그들의 재정과 기술과 공사감독으로 된 것이란다.

‘도래인’을 빼놓고 일본문화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신사(神社)에는 그들의 씨족신(氏族神)이 많은데, 그것은 우리나라의 사당(祠堂) 또는 위패 모신 가묘(家廟)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대우’ 씨족의 신은 ‘신라명신상’(新羅明神像)인데 신라신사로 되었다. 이런 습속은 한국의 ‘샤마니즘’과의 습화(習化)랄 수도 있겠다.

그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족을 ‘가라’라고 불렀다. 보통 당(唐)을 ‘가라’라고 하는데 이건 ‘당나라’가 아니라 ‘조선’을 의미한다.

조선솔(松)을 ‘가라마쓰’란 것도 그 한 예가 된다고 할까?

관서(關西)에도 백수 흰수염신사란 것이 있는데 그 제신(祭神)은 사다루히꼬다. 일본 신호에 천손(天孫) ‘야마쓰미가미 天神’가 일본땅에 강림할 때에 사루다히꼬가 길을 인도했다고 한다. 김달수 씨에 의하면 그는 일본에 벼농사를 가르쳐준 선착 조선족의 하나라는 것이다. ‘사루다’는 한국말로 ‘쌀밭’이란 뜻이라고 한다. 그럴상 싶은 얘기다. 그러니까 한국 민족의 일본 도래는 고분시대보다 훨씬 이전인 ‘야요시대’(彌生時代) 초기였는데 ‘사루다히꼬’는 그 시대에 건너온 한족의 후예로서 ‘구니쓰미까미’(國神)로 도착한 한국민족이고 천손(天孫)이란 것이다. 한국 역사에서의 ‘3국시대’에 주로 백제, 신라에서 건너온 문화인들이라 하겠다. 그들 도래 조선족은 ‘아마쓰미가미 天神’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이미 토착해 사는 조선족이 새로 건너온 조선족을 맞이하여 길이 구실을 한 셈이겠다.

일본신화에서 ‘아마데라스오오미까미’(天照大神)는 한국에서 건너간 ‘맨’이었다는 얘기도 많이 유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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