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11일 목요일

[범용기 제5권] (71) 北美留記(북미유기) 第8年(제8년) 1981 – 허우성 선생의 편지

[범용기 제5권] (71) 北美留記(북미유기) 第8年(제8년) 1981 – 허우성 선생의 편지

2월 5일(목) - 음력 설날이다. 서울이 허우성 선생으로부터 서신이 왔다.

허우성 선생은 함경북도 경흥군 노서면 출신으로 애기 때에 중국에 건너가 대학까지 중국에서 공부했고 중국 문화에는 ‘지식’만이 아니라, 몸으로 말하는 ‘중국통’이다. 그는 중국 공산화에 실망하고 단신으로 산해관 만주를 걸어 본국에 돌아왔다. 여행 중에 줄곧 ‘중국인’ 행세를 했단다. 아무리 까다로운 중국인 조사관도 그의 중국어와 중국 문장 이해에서 그를 중국인 이외의 다른 나라 사람으로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다.

그러나 그가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대하여 우리 국내인과 다른 아무 티도 발견할 수 없다. 그는 대한일보 논설위원으로 중국 부문을 담당하고 있었다. 나이는 조금 아래지만 지금은 역시 노쇄 징조를 보인다. “동향지인”(同鄕之人)이라 나와는 흉허물 없이 사귄 친구의 한 분이다.

공산당에 대한 그의 ‘불신’은 철저하다. ‘긴장완화’에 대하여 그는 당초부터 일소에 부치는 것이었다. 소련으로 준비시간을 벌게하는 것뿐이라고 했다. 이런 점에서는 이승만이나 솔제니친과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는 내가 몸이 약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이번 편지에서 “독사 100마리”쯤 고와 먹으라고 권한다.

1981년 1월 11일(일) - 2:00 PM의 예배모임이 끝났다. 새해 인사교환 시간에 LA의 이석재 장로와 시카고의 이성돈 장로 부부 등 옛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노도윤 장로님이 이분들을 Korea House에 초대하여 환영 오찬을 나누며 환담의 때를 마련했다. 나도 자리를 같이했다.

9:00 PM에 이상철 목사는 British Air Line으로 영국 London에 직행한다. 식구들과 함께 나도 공항까지 나가 전송했다. 교회가 허락해 준 안식년의 일부를 연구와 독서의 기회로 쓰기 위해서였다.

1월 29일(목) - N.Y. 한승인 장로로부터 그의 저서 “島山(도산) 安昌浩(안창호) 선생” 한 권 기증해 왔다. “도산 전기”로서는 가장 신빙할만한 역작이다.

1월 31일(토) - 제주도출신 우리 졸업생 조원길이 나 만나러 토론토에 왔다고 전화한다.

2월 10일(화) - 미국 하원에서 인권백서가 나왔는데 소련과 남한이 최악의 나라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영삼 토론토 민건회장으로부터 온 전화다.

“인권”을 선거의 깃발로 들고 선거전에서 카아터 미국 대통령은 그 첫 화살을 소련에 쐈다. ‘명중’ 시키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런 화살쯤에 당황하기에는 상대방이 너무 힘세지 않았었을까. ‘독수리’가 곰을 채갈 수 있을까.

아닌게 아니라, 소련은 끄떡도 안했다. “카아터야 네 나라 걱정이나 해라. 건방지다.…”

“네 나라와 네 나라 산하에 있는 숱한 나라들의 ‘인권’은 보장되 있느냐?” 말하자면 이런 식의 반응이었다. 일본에서도 인권 문제 같은 것은 현실성 없는 꿈 얘기라고 뇌까린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어느 정도 기대를 걸고 카아터의 선거를 돕기도 했다.

카아터 대통령은 ‘우방’이라는 일본을 방문했다. 그는 일본 체류 중에 한국은 자기의 인권정책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공언했다.

권력주의 정치 밑에서의 정의와 신의를 기대하는 자체가 쑥스럽달까?

2월 11일(수) - 집이 조용하다. “獨處空房寂如寺”(독처공방적여사)라고 스스로 읊어본다.

신년 휘호 몇 폭을 써 봤다. 박재훈 박사, 혜원, 수유리의 관용 등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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