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2일 화요일

[범용기 제5권] (19) 北美留記(북미유기) 第七年(제7년) 1980 – 이질 김석영 가고

[범용기 제5권] (19) 北美留記(북미유기) 第七年(제7년) 1980 – 이질 김석영 가고

80년 3월 31일(월) - 웨스턴 병원에 입원중인 석영(奭榮) 군이 위독하다는 전화가 왔다. 석영은 내 이질(姨姪)이다. 이모님(어머니의 언니)의 손자란 말이다.

차가운 비가 부실부실 내린다. 나는 곧 달려나가 버스ㆍ써브웨이로 병원에 갔다. 아직 의식은 있지만 눈도 못 뜨고, 말도 못하고, 담이 끓고 약도 못 쓴다.

두 아들 철(哲)과 윤(玧)과 두 며느리 마감 효성을 다한다. 조카며느리라기에는 너무 어른다운 석영의 부인은 석영의 깔끔한 성격과 예의바른 행동에 대한 회고담에 울먹인다. 그분은 동경여자대학 출신의 지성인이다.

석영은 옛날 같으면 ‘가문자랑’도 할만한 집안이다. 조부님대까지 3대 진사란다. 그러나 모두 관직에는 ‘운’이 없었던지 실지로 벼슬을 못했다.

같은 동네의 주씨(朱)네는 주참판, 즉 참판 벼슬까지 한 분이 있었다. 그러니만큼 석영의 가문에서는 벼슬욕망이 유난스레 돋보였다.

한말(韓末)에 회령출신으로서 ‘내장원’ 국장(局長)까지 지낸 오(吳)씨가 있었다. 보통 ‘오국장’으로 호칭했기 때문에 나는 그의 함자를 모른다. 물론 뵌 일도 없다. 그러나 ‘잘난’ 인물이었음에는 틀림없겠다. 석영의 고모, 그러니까 내게는 모계(母系)로서 사촌누님이 되는데, 그분은 오국장의 손부가 됐다. 남편되는 분이 ‘와세다’ 대학 재학중, 수영(水泳)하다가 목숨까지 물 속에 잠겨버린 비극을 안고 평생을 수절했다.

오국장 가문은 회령에서 충북 옥천(沃川)에로 이주했다. 그 누님의 말씨와 행동범절은 귀족적이다. 젊잖고 위신있고 정답고 고상했다. 온전히 환골탈태(換骨奪胎)한 귀부인이었다. 평생 혼자 지내다가 수년 전에 세상 떠났다고 들었다.

‘양자’라고 있기는 하다지만 ‘효도’는 없다고 들었다.

우리대까지도 성(姓)에 이름(名)이 따르는 것을 떳떳하게 여기지 않았다. 될수만 있다면 성에 관직이 따르도록 되고 싶어했다. 그래서 주참판이니, 지무산이니, 강부령이니, 김과장이니 한다. 강씨로서 부령군수를 했으면 ‘강부령’이고, 지씨로서 ‘무산군수’로 있었으면 ‘지무산’이 된다.

‘성’에 이름밖에 붙일 수 없는 사람은 어딘지 모르게 열등감을 지워버리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자(字)니, 호(號)니 하는 칭호를 별도로 만들어 이름(名)에 대응한다. 그런 환경이니 ‘벼슬’ 욕심이 안 날 수 없게 됐다.

얘기가 딴길로 산책했다. 다시 본고장으로 돌아가야 하겠다.

석영은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다. 몸부림친다. 일어나 앉아 내 손을 더듬는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우리의 작은 생명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의 날개 속에 감추어 있다. 한 인간의 ‘영’은 전 우주보다 귀하고 크가. 이제 험한 길, 좁은 문을 통과하면 빛나고 넓은 길이 열린다. 인생은 육체의 죽음에서 끝나지 않는다. 한번 죽음으로 ‘죽음’의 권세는 물러간다.

보라! 새 세계, 새 창조가,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같이 단장하고 기다린다.

그때 내가 이렇게 짜임새있는 ‘설교’를 해 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당황하여 목이 매였었다. 그러나 이미 혈액순환이 멈춰서 맥못추는 주사바늘 대신에 이런 생명의 말씀이라도 주어 보내고 싶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나는 잠시 자리를 떠서 낭하쪽에 앉았다. 몇붙도 안되어 세상을 떠났다고 전한다. ‘석영’은 두 아들, 특히 큰아들 ‘철’에게 신앙생활을 간곡히 권했던 모양이어서, 그후부터 ‘철’은 온 가족과 함께 교회생활에 충실하다.

‘철’은 생물학박사다. 토론토 시청에서 그 방면 기술부문을 담당하고 있다.

둘째 아들 ‘윤’과 그 부인도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자리에 취직해 있다. 온유한 성격이다. ‘석영’은 그 가문에 기독교신앙을 도입한 첫 사람이다.

‘철’과 ‘윤’은 제2세대다. 그들은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을 충실하게 간직한다.

4월 2일(수) - 5PM에 Eglington Ave. W.의 장의사에 가서 ‘석영’의 추도예배에 참석했다. 유재신 목사가 사회하고 이상철 목사가 설교했다. “나그네로 살다 갔다”란 제목이었다.

참석자가 약 200명이었고 은용과 경용도 왔다. 와싱톤에서 송승규가 일부러 올라와 참석했고 고인의 약력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선천이 만우 송창근과 ‘석영’과의 특별한 친분을 회상하며 ‘아버님’ 적으도 ‘숙부’를 영결하는 심정으로 생전의 내력을 엮었노라 한다.

4월 3일(목) - 7:30AM에 159 Eglington Ave. W.의 Bedford Funeral에서 고 김석영 선생 영결식이 거행된다.

이상철 목사와 같이 떠난 9AM에 도착했다. 나는 마감 축도를 드렸다. 조객이 만원이었고 묘지까지도 수십 명이 따랐다.

‘혜원’이 직장을 쉬고 영결식에 왔다. 나는 하관식에서 간단한 말씀과 기도를 마감선물로 드렸다. 그리고서는 ‘흙’이다. 나는 ‘철’과 ‘윤’에게 ‘비석’ 비용에 보태라고 50불을 부의금으로 수교(手交)했다.

시내 ‘한국관’에서 상가집 답례식사가 준비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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