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18일 수요일

[장공의 삶] 5장 : 고난의 땅에 오다(1933-1938) - 북간도 용정 은진중학교에서 청년교육에 힘쓰다

[장공의 삶] 5장 : 고난의 땅에 오다(1933-1938)

북간도 용정 은진중학교에서 청년교육에 힘쓰다

북간도는 우리 민족 고대시대의 나라인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가 섰던 곳이다. 그래서 이 지역에 사는 이주 한인들은 한민족의 고토(故土)로 인식해 왔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있는 곳이다. 이곳에 한일합방 이후 우리 민족이 새 민족공동체를 세웠다. 또한 무장독립 전쟁을 준비하는 곳이기도 했다. 더불어 교육 구국운동, 사회 결사운동 등을 일으킨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기독교 민족운동이 이동휘, 신민회의 파송을 받은 정재면,115) 캐나다 선교부의 구례선(Robert Grierson), 스콧(William Scott), 박걸(A. H. Barker) 선교사들이 활동하며 복음을 전했다. 이들의 복음은 민족 구원, 사회 구원의 복음이었다.116) 특히 박걸 목사는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로서 처음 간도에 왔다. 그는 1913년 용정에 왔고 명동뿐 아니라 전 간도의 기독교인과 처음으로 접촉한 캐나다인이었다.117)

북간도 명동촌은 ‘나라를 독립시킨다’는 의미의 명동(明東, 동쪽을 밝힌다)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기독교를 수용했고, 기독교를 바탕으로 민족독립운동을 일으켰다. 명동촌에는 명동교회, 명동학교가 세워졌다.118) 명동교회와 명동학교는 민족해방을 위해 기도하며 일제에 저항한 중심세력이었다. 북간도 전역에는 복음화의 불길이 솟아올랐다. 100여 곳의 교회와 학교가 들어섰다. 1910년대는 명동촌, 명동교회, 명동학교가 독립전쟁 기지의 역할을 했으며, 독립전쟁을 수행할 사관생도를 배출해내는 사관양성소의 역할도 했다. 1920년, 1930년대에 이르러 명동교회와 명동학교의 기독교 민족주의 정신은 용정으로 옮겨졌다.119)

캐나다 선교부는 이곳 바로 북간도 용정에 은진중학교, 명신여학교, 제창병원, 용정 중앙교회, 용정 동산교회를 세우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용정은 일제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중심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였다. 북간도 명동촌과 용정은 항일운동의 진원지였다. 또한 민족해방을 꿈꾸고 희망하던 원천이었다.120)

1920년 2월 4일 ‘하나님의 은혜로 진리를 배운다’는 뜻으로 은진이라는 교명으로 학교가 세워졌다. 1913년 박걸 등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들이 용정에 와서 전개했던 선교활동의 영향이었다. 캐나다 선교부는 명신 여학교 등을 설립하며 용정 지역 한인사회에 뿌리를 내리고자 했다. 이러한 선교와 자선사업이 바탕이 되어 마침내 1920년 은진중학교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개교 초기 은진중학교는 찾아온 학생들로 인해 성황을 이루었다. 화룡, 연길, 왕청 등지의 장로교 교회에서 설립한 소학교에서 졸업 한 졸업생과 ‘간도 대참사’로 인해 폐교가 된 명동, 정동, 북일 등 학교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던 것이다. 또한 소련 연해주에서도 수많은 학생들이 유학을 왔다.121)

후일 은진중학교 출신들은 한국 기독교계 진보주의 세력으로 70년대 인권운동, 반체제 민주화운동에 주역이 된다. 은진중학교는 야학, 문맹퇴치반을 이용하여 농촌의 아동, 농민, 부녀자들에게 문화와 지식을 전달했다. 1920년대는 일제와 지주에 의한 농민의 피폐, 착취가 자행되고 있었다. 이에 지식인, 학생, 농민,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혁명으로 일제를 물리치고 민족해방을 쟁취하고자 노력했다.122)

이러한 노력으로 교육운동을 이야기할 수 있다. 학교의 정규 교육과정 보다는 비정규적인 군중집회, 구호, 선전, 선동, 강연회, 토론회 등 사회교육이 더욱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이 시기의 항일 민족 교육운동은 혁명의 현장에서 민족민주 혁명, 반제반봉건 투쟁을 감당할 인간형을 양성하는 데 집중되었다. 일제의 탄압이 더욱 극심해졌지만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버리지 않고 민족 자체의 힘과 노력으로 은진중학교를 중심으로 한 사립학교와 야학 등 민중교육기관을 신속히 발전시켰다.123)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 은진중학교는 이 시기 한인사회의 중등교육에 대한 열망을 해소시켜 주었다.124) 숭인상업학교를 그만두고 몇 달이 지나자, 숭실전문학교 교장 마우리 박사가 김재준을 찾아왔다. 김재준을 추천하기 위해서였다. 김재준은 바로 북간도 용정의 은진중학교에 교유, 즉 교목 겸 성경교사로 부임했다.

“은진은 기독교적인 사립학교로서의 엄숙한 역사적 사명을 자각해야 할 판이었다. 교인을 얻으려는 전도기관으로서의 학교가 아니라 다가오는 역사의 격랑에 대결하여 새 세계 새 인류의 지도자 될 창조적 소수를 길러내는 학원으로 조형되어야 한다고 나는 다짐했다.”125)

당시의 기독교계 학교들은 전도기관으로서의 학교였다. 그러나 김재준은 이 나라 이 민족의 미래를 짊어지고 갈 ‘새 세계, 새 인류의 지도자가 될 창조적 소수를 길러내는 학원’이 되어야 한다는 목표의식이 뚜렷했다. 김재준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은진중학교에 갔다.

북간도 지역 3・1 운동의 발원지인 용정에서 김재준은 야학교, 주일학교, 교회에서 가르치며 예배를 인도했다. 은진중학교에 재직중이던 1937년 3월 김재준은 만주의 동만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는다. 은진중학교에서 김재준의 별명은 천지(天地)였다.126) 수업시간 강의를 할 때면 항상 준비해 간 노트와 교실 천장만을 번갈아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김재준에게 어느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동료 교사들도 김재준의 인품과 인격을 높이 평가했으며 존경을 표했다. 김재준의 인격은 그 스스로 정한 열 가지 생활의 좌우명을 통해 훈련되었다.127)

나의 좌우명 : 바로 살려는 노력
1)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2) 대인관계에서 의리와 약속을 지킨다.
3) 최저 생활비 이외에는 소유하지 않는다.
4) 버린 물건, 버려진 인간에게서 쓸모를 찾느다.
5) 그리스도의 교훈을 기준으로 ‘예’와 ‘아니오’를 똑똑하게 말한다. 그 다음에 생기는 일은 하나님께 맡긴다.
6) 평생 학도로 산다.
7) 시작한 일은 좀처럼 중단하지 않는다.
8) 사건 처리에는 반드시 건설적, 민주적 질서를 밟는다.
9) 산하(山河)와 모든 생명을 존중하여 다룬다.
10) 모든 피조물을 사랑으로 배려한다.

김재준의 높은 인품과 인격은 바로 이 좌우명을 통해 부단히 갈고 닦은 결과인 것을 알 수 있다. 김재준의 유교 선비적 자기 수련의 자세와 성 프란체스코의 청빈사상, 예언자 정신과 작은 자를 배려하려는 성서의 긍휼히 여기는 마음, 예수님 계명에 순명하려는 실천적 제자직 의식, 자연과 생명 존중 사상 등을 살펴볼 수 있다.128)

김재준이 은진중학교에 재직중일 때 학교의 교장은 캐나다에서 온 평신도 선교사 부르스(G. F. Bruce)였다. 또한 은진중학교의 출신들로는 강원용, 김영규, 전은진, 안병무, 김기주, 신영희 등의 학생들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김재준의 제자들이며, 평생을 함께했다. 김재준은 학생들의 성품이나 교우관계 등을 세밀히 파악했다.

“학생회 총회가 열렸다. 그때 강원용 군이 2학년생이었고 김영규, 전은진 등이 3학년에 있었다. 그런데 2학년의 강원용이 전체 학생회를 영도하고 있었다. 종교부장도 그가 겸임했다. 각 학교 연합웅변대회에 나가면 언제나 1등상을 타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지도력이 있다고 점찍었다. 머리도 비상해서 시험에는 언제나 최우등이다. 은진학교 종교부에서 강원용, 김영규, 전은진 셋이 한몸같이 활약했다. 김영규가 제일 연장자고 최고학년이어서 어른 구실을 한다. 전은진은 그야말로 숨은 보배여서 안에서 남 몰래 일을 꾸미고 섬긴다. 강원용은 앞장서는 행동파다. 안병무도 같은 2학년이었지만 강원용 그룹에는 들지 않았다. 그는 독자적으로 더 멀리 조양촌이란 한국인 마을에서 주일학교를 하고 있었다.”129)

김재준은 은진중학교에 있으면서 많은 제자들을 훌륭히 길러냈다. 훗날 김재준의 자유정신, 진보적 비판정신, 사회참여적 사회윤리정신 등을 물려받은 그의 제자들은 에큐메니컬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1960년대 이후 한국 진보적 기독교 운동의 핵심적 역할을 감당하는 인물들이 김재준의 제자였다. 특히 사회참여적 윤리운동에 있어서 더욱 그렇다.

김재준의 지도와 영향을 받은 제자들은 도시산업 선교운동, 도시빈민 선교, 민중신학운동, 민주주의 인권운동, 통일운동에 있어서 항상 중심에 서 있었다. 이들은 모두 진보적 사상가, 신학자, 목회자로서 그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는 자들이었다. 안병무는 후일 김재준에 대해서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는 나에게 정중 한 존대어를 쓰며 두서없는 나의 말에 연거푸 동의하는 것이다. 대학에서 거듭 쫓겨나고 감옥에도 끌려갔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내가 쓴 잡문들을 여럿 기억하여 하찮은 한 제자가 몸둘 바를 모르게 했다.”130)

장준하, 안병무, 문동환, 문익환 이외에도 나중에 종로서적을 경영한 장하린, 캐나다에서 존경받는 목사가 된 이상철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었다.131) 문동환은 김재준을 회고하면서 “은진중학교 2학 년에 다닐 때 나는 평생의 스승인 김재준 목사님을 처음 만났다.”132)라고 자신의 『문동환 자서전』에서 기록했다. 김재준은 자신의 제자들이 스승과 진실한 관계를 맺길 원했다.

“극소수라도 진정한 의미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고 교문을 나서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들은 진실로 행복하고 아름다운 인연의 사람들이라 생각된다.”133)

김재준은 ‘제자’를 길러냈다. 그리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사람’으로서 삶을 살았다. 교육자란 제자들에게 내일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고 그들의 마음속에 뜨거운 열정을 불어넣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비전을 보여줘야 한다. 은진중학교에서의 절대적 시간은 3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김재준의 제자들에게 보여준 상대적 시간은 무한했다. 제자들의 마음속에 뜨거운 열정과 희망의 비전을 무한하게 심어주었던 것이다.

[각주]

[115] 정대위, 『하늘에는 총총한 별들이』(서울: 청맥, 1993), 27-29.
[116] 서굉일, “연변의 용정 및 명동촌 등 기장 역사 유적지 답사”,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회보>(2001/3).
[117] 문재린, 김신묵,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서울: 삼인, 2006), 110.
[118] 위의 책, 402.
[119] 서굉일, “일제하 만주 북간도의 민족교육”, 「중등우리교육」(1990/9, 통권 제7호), 128.
[120] 전광하 편저, 『세월속의 룡정』(연변인민출판사, 2000), 1.
[121] 한생철, “26년의 풍운 변화-은진중학교”, 『연변문서자료』 제6집, 연변정협문서자료위원회, 1998, 45-47.
[122] 서굉일, “일제하 만주 북간도의 민족교육”, 129.
[123] 위의 책, 130.
[124] 서굉일, “일제하 만주 북간도의 민족교육”, 135.
[125] “영국덕이”, 『전집』, 제13권, 154.
[126] 문동환, 『문동환 자서전』(서울: 삼인, 1996), 140.
[127] 김재준, “나의 좌우명”, 「샘터」(서울: 샘터, 1985/12).
[128] 김경재, 『김재준 평전』(서울: 삼인, 2001), 61.
[129] “학생회와 강원용”, “종교부 3인조와 용강동 주일학교”, 『전집』, 제13권, 156-157.
[130] 안병무, “현대를 호흡하는 젊은 사상가”, 장공 김재준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회, 『장공 이야기』(오산: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1, 346.
[131] 김경재, 『김재준 평전』(서울: 삼인, 2001), 60 ; 문동환, 『문동환 자서전』(서울: 삼인, 1996), 139.
[132] 문동환, 위의 책, 139.
[133] 김재준, “스승과 제자”, 「새가정」(새가정사, 1970/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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