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17일 화요일

[장공의 삶] 4장 : 배움의 길에 서다(1927-1932) - 자유주의의 한계를 보다

[장공의 삶] 4장 : 배움의 길에 서다(1927-1932)

자유주의의 한계를 보다

김재준은 송창근의 부름을 받고 일본으로 떠났다. 그러나 떠나는 내내 마음이 잡히지 않았다. “늙으신 부모님, 몸 약한 형님, 거기에 아내까지 갖다 맡기고, 인사도 안 여쭙고 바다 건너 뺑소니친다는 게 인자의 도리냐?”60) 그런 김재준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비전을 보여주셨다. 특별한 경험이었다. 김재준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하루는 꿈도 생시도 아닌 일종의 vision 상태에서 이상한 경험을 했다. 큰 호랑이가 내 뒤에서 앞발을 내 어깨에 걸고 나를 뒤로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그러자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다’ ‘네 떠나는 건 하나님 뜻이다!’ 그 순간 호랑이는 어디론가 물러가고 나는 깨어났다. …… 그 순간부터 내 마음은 장맛비 개듯 맑았다. 더 우물쭈물할 것도 없었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대로 간다는 신념이 생겼다.”61)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확신이 있었기에 김재준은 주머니에 5원 50전밖에 없어도 당당했다. 그는 동경역에 내리자 곧바로 청산학원 신학부 기숙사로 향했다. 송창근의 방문을 두들기고 들어갔다. 송창근은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찾아왔기 때문이다. 송창근은 김재준에게 당황한 기색을 내보이지 않고 밝은 표정으로 반겼다.

“어쨌든 잘 왔소! 뭐 되겠지, 기숙사 규칙은 아니지만 당분간 이 방에 같이 있고, 이부자리는 금년 봄에 졸업하고 귀국한 분이 두고 간 게 있으니 그걸 쓰고, 식사는 내 손님으로 기숙사 식당에서 먹고 그러면서 얼마 지내봅시다.”62)

김재준은 송창근의 배려로 임시거처는 마련했지만 학교 입학을 하지 못했다. 김재준은 송창근의 방에서 몇 주일을 보낸 후 송창근의 지인을 통해 고학생 합숙소인 근우관이라는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낫도(한국의 된장 비슷한 것)를 팔며 생활을 유지했다. 그것도 여의치 않아서 막노동을 시작했다. 그 일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구루마(리어카)를 한번 왕복한 후 냉수를 한 사발씩 마시곤 했다. 여름방학이 되자 송창근은 귀국 했다. 혼자가 된 그는 일본인 학우의 소개로 청산학원 교사 신축장에서 일을 하며 지냈다. 그렇게 여름방학 동안 청산학원의 공사장에서 일을 하며 학비를 모을 수 있었고 청강을 하며 수업에 참여했다.

김재준은 선교사들 집에서 일하고 가까운 교회에 가서 청소를 하며 생활을 유지해 나갔다. 자신도 힘들고 어렵게 생활을 했지만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절대 그냥 보낼 수 없었다. 추운 겨울 날 입기 위해서 간다(神田)에 있는 고물상에서 산 외투를 내복도 없이 떨고 있는 고학생에게 준 일도 있었다.

“싸디싼 외투 하나를 샀다. 훨씬 도움이 됐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어떤 인연으로 어느 고학생 숙소에 들렀다가 그가 내복도 없이 여름학생복 속에서 떨고 있는 걸 보고 내 외투를 벗어줬다. 그는 초면인 나를 놀란 낯으로 쳐다보다가 미안하다면서도 받아 입었다. 발길이 가볍고 춥지도 않다. 기분이 만점이다. 예수님이 축복하시나 보다 하며 혼자 기뻐했다.”63)

서울에서는 자신의 솜바지 저고리를 헐벗은 거지에게 주었던 적도 있었던 이러한 김재준의 모습은 성 프란체스코를 닮은 삶의 실천이었다. 김재준은 청산학원에 다니면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하였으나 목사가 될 생각은 없었다.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지만 목사가 되어서 교회에 충성하며 살려고 마음먹지는 않았다. 김재준이 꿈꾼 것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하에서 사람들을 일깨우는 것이었다. 이들을 일깨우고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김재준은 교육이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 했다.

“내 평생사업은 무엇인가? 내 ‘Life Work’이란 것도 나는 모른다. 신학에 들어온 것도 어쩔 수 없이 몰려서 그렇게 된 것이고 목사 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교회에 충성할 용의도 없었다. 일제하 조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어냐? 그래도 교육 밖에는 없다는 결론이다. 그게 비교적 자유로우면서도 후진들에게 뭔가 ‘혼’을 넣어 줄 접촉점이 된다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기독교사상과 신앙을 주축으로 한 유치원부터 소, 중고, 대학까지의 교육왕국을 세워 본다고 맘먹었다.”64)

김재준은 교육을 통해 민족혼을 되살릴 수 있다고 믿었다. 이를 위해 기독교 정신이 담긴 학교를 세워보겠다는 꿈을 꾸었다. 졸업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겨울, 김재준은 고국에 들렀다. 고국에 돌아와 상황을 살폈지만 너무나 황폐해져 가는 고향을 바라보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래서 그는 고향에서 교회를 순방하며 설교도 하고 강연도 했다. 민족혼을 되살리기 위해서였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김재준은 신학연구에 몰두했다. 1920년대 청산학원의 학구적 분위기는 엄청났다. 1920년대 중반에는 사회주의 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기도 했다. 심지어 신학생들 가운데도 공산주의를 노골적으로 선전하고 종교 무용론, 종교 아편론 등을 말하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대체로 들은 체 만 체하며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김재준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오히려 신학의 본격적 연구에 몰두했다. 이곳 청산에서 김재준은 진보적 신학사상들을 공부할 수 있었다.

“신학사상에 있어서는 그 당시 ‘뉴욕 유니온’ 그대로였던 것 같다. 신약 교수 마쯔모도는 뉴욕 유니온에서 신약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왔다. 구약교수 와다나베는 독일 튜빙겐 박사였다.”65)

김재준의 자유롭고 진보적인 신학관은 바로 이때부터 성립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김재준의 자서전에서 기록하고 있듯이 청산학원에서의 자유로움은 김재준의 핵심사상인 “자유정신”을 태동시켰다.

“나는 내 입장이 크리스찬이라는 것을 고칠 생각은 없었고, 사회 관심은 있지만 예수의 제자로서의 신앙적, 신학적 의무에서 출발하는 것이지 순수한 마르크스, 레닌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66)

김재준은 청산학원에서 성서의 고등비평이라는 성서비평을 배웠다. 고등비평은 성서의 역사적 비평과 문학적 비평을 말한다. 18세기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역사비평적 방법이 성서 연구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이 방법은 성서를 교회의 전통과 권위, 그리고 교리에서부터 해방시켜 준 다. 김재준은 신조 문자를 절대시하여 심판의 기준으로 삼는 것을 거부했다.67) 김재준은 역사비평학을 성서 연구의 한 방법론으로 도입하고 이 점을 강조했다.

“성서가 비판됨으로 말미암아 그 진리가 상실될 일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종래의 불순한 진의가 일소되고 그 본질적인 것이 더 뚜렷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종래에는 사이비적 신학자들의 자기가 추상해낸 교리를 옹호하기 위해 자기에게 편할 대로 성경을 왜곡 사용한 예가 많다. 그러나 문학적 역사적 비판의 글과 그런 불경건을 범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소위 우의적 해석이니 교리적 해석이니 하는 것 때문에 성서기자의 본의가 무시당하는 일도 없게 되었다.”68)

김재준은 성서의 역사비평을 통해 성서 안의 하나님 말씀의 자유를 확 보하려고 애썼다.69) 또한 “전통적인 결론이나 교리에 입각하여 성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성서 그 자체를 객관적으로 보고 거기서 발견된 사실에 준하여 교리를 재해석하거나 다시 만들어야 한다.”70)고 주장했다. 김재준의 역사비평의 수용은 하나님 계시의 중심을 더욱 분명하게 받아들이기 위한 시도였다.

역사비평의 수용은 당시 우리나라에 만연되어 있던 선교사 신학의 한계점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점이 되기도 했다. 선교사 신학의 한계점으로 근본주의적 성서 이해에 대한 부분을 말할 수 있다. 보수주의 신학의 계열에 섰던 선교사들은 하나같이 근본주의 교리71)에 입각한 성서 이해를 주장했다. 따라서 근본주의를 믿지 않거나 어긋나는 교리를 말할 경우 모두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선포했다. 이 교리를 담고 있는 것이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는 성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서 이해는 교리를 위한 전거로서만 이해될 수 있었다. 성서의 전체적인 문맥과 다양한 내용을 선교사들은 가르치지 않았다.72) 바로 이러한 선교사 신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한 가지 대안을 제시한 것이었다.

김재준은 한국 역사와 사회에 대한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고 있었고, 한국적 자생 교회에 대한 이해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러한 이해 위에 성서 역사비평을 받아들임으로써 성서가 본래 말하고자 하는 성서 본문의 원래의 뜻을 찾고자 노력했다. 김재준은 신학자들이 성서 본문의 원래의 뜻을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기 위한 부수적인 것으로 왜곡해서 성서를 사용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비평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성서 고등비평은 인간이 만들어낸 교리에 성서 자체의 진리를 끼워 맞추려고 하는 시도를 막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김재준의 이러한 시도는 성서를 교리보다 위에 놓기 위한 것이며, 성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것이며, 결론적으로는 성서에 대한 문학적, 역사적 비평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뜻했다. 김재준의 역사비평학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만물을 해방시키는 본래 성서가 말하고 있는 복음에 더욱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준 것이었다. 성서 고등비평을 받아들인 김재 준을 흔히 자유주의 신학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는 좀더 성서의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 신학의 자유, 학문의 자유, 신앙 양심의 자유를 외쳤다.

그는 청산학원에서 자유롭고 진보적인 신학을 접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가리켜 자유주의 신학자라고 부르기를 서슴지 않았지만 그것은 김재준의 신학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그는 자유주의의 한계를 명확히 분별한 당대 몇 안 되는 신학자였다. “자유주의 신학이 막다른 골목에 이마를 부딪힌 것 같은 느낌”73)을 발견한 성서학자로서 당연히 선택한 그의 청산학원 졸업논문은 「칼 바르트의 초월론」이었다.

김재준은 자유에 대해서 한마디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죄의식이나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인 인간의 내적 자유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의 자유를 포괄하는 인간의 외적인 자유도 포함한다.74)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체험한 인간은 이에 대한 응답으로 이 땅에서의 자유와 정의를 추구하며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러한 자유에 대한 김재준의 이해는 그의 삶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김재준은 가난과 물질에 자유했다. 불의에 맞서서 ‘예’와 ‘아니오’를 분명하게 대답했다. 독재정권에 항거하며 권력에 자유했다. 두려움 없이 자신의 신학적 노선을 분명히 밝히며 교권에 자유했다. 자유에 대한 김재준의 인식은 정치적, 경제적 억압에 무릎 꿇지 않는 초연함을 갖게 만들었다. 이것은 그의 신학과 신앙이 좀 더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김재준이 바라본 성서는 자유함의 복음이었다.75) 성서는 인간의 자유를 증언하고 있다. 구약과 신약 모두를 통해 인간의 자유를 선언했다고 보았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자유함을 얻었다. 인간에 대한 최후 속박인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였다. 이제는 이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문제였다. 김재준은 말한다. “돈을 많이 벌었다는 데서 값이 결정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번 돈을 어떤 데 쓰느냐’에서 그 돈과 그 돈 번 사람과의 값이 결정되는 것과 같다.”76) 그러면서 인간은 이웃을 위해서, 인간의 자유함을 위해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우리에게 온 자유를 가장 값비싸게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진정 우리의 자유를 높은 차원에까지 올리려면 ‘자유하는 봉사’, ‘나는 아무에게도 종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된다’ 하는 탁 트인 인간성으로서의 ‘자유’까지 가져야 할 것이다. 자유하면서 봉사하는 기쁨을 가진 자유인만이 참 자유인이라 생각된다.”77)

김재준은 성서 문자주의로부터 자유하길 바랐다. 후일에는 군사 독재 정권에서 자유하길 바랐다. 교회가 교회 안에만 속박되어 있는 상황에서 자유하길 바랐다.

[각주]

[60] “동경에로”, 『전집』, 제13권, 77.
[61] 위의 글, 77.
[62] 위의 글, 78.
[63] “겨울”, 『전집』, 제13권, 85.
[64] “무얼하나?”, 위의 책, 84.
[65] “청산의 학풍”, 위의 책, 93.
[66] “독서회”, 『전집』, 제13권, 91.
[67] 장공 김재준 목사 기념사업회, 황성규, “장공 김재준 목사의 삶과 사상 그리고 그의 영성”, 『장공 김재준의 신학세계』(오산: 한신대학교출판부, 2006), 22~23).
[68] “성서 비판의 의의와 결과”, 『전집』, 제2권, 65.
[69] 연규홍, 『역사를 살다』(오산:한신대학교출판부, 2012), 287.
[70] “성서 비판의 의의와 결과”, 『전집』, 제2권, 65.
[71] 근분주의 5대 교리는 그리스도의 처녀탄생, 그리스도의 완전 신성, 대속의 구원, 육체적인 부활, 육체적인 재림이다. 이 교리들은 모두 성서 문자주의에 입각한 교리이다.
[72] 주재용, 『한국 그리스도교 신학사』(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8), 97~99.
[73] “대전전후 신학사조의 변천”, 『전집』, 제1권, 375.
[74] 장공 김재준 목사 기념사업회, 천사무엘,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김재준’”, 『장공 김재준의 신학세계』(오산:한신대학교출판부, 2006), 45.
[75] 위의 책, 43.
[76] 천사무엘,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김재준’”, 『장공 김재준의 신학세계』, 226~227.
[77] “자유에의 헌사”, 『전집』, 제5권. 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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