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10일 화요일

[장공의 삶] 1장 : 문자에 눈을 뜨다(1901-1915년) - 1901년 함경도 경흥에서 태어나다

1901년 함경도 경흥에서 태어나다


김재준은 1901년 11월 6일(음력 9월 26일) 함경북도 경흥군 아오지읍 창동에서 태어났다.1) 김재준이 태어날 무렵은 조선왕조가 이미 기울어서 위태로운 시기였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 지배하려는 야욕을 품고 한일병합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김재준이 태어난 것이다.

김재준이 태어난 창꼴은 산맥이 사방으로 둘러싸여 어디를 보나 산의 능선이 하늘을 만지는 햇빛이 남아도는 동네였다. 이 분지 안에 여섯 부락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이었다. 이 마을 중 김재준이 자란 동네는 창동으로 흔히들 ‘창골’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 군량미를 비축하는 창고가 있던 마을이라는 뜻에서 ‘창골’이라 불렀던데 연유한다. 그 창고 옆에 집에 있어 동네 사람들은 김재준의 집을 ‘창골집’이라 불렀다. 김재준이 자랄 때에 이 창고는 없어지고 밭 한가운데 터만 남아 있었다.

김재준의 집은 노성 봉우리가 끝자락을 휘감이 돌아앉은 집으로 ‘명당’ 자리라고 했다. 집은 큰 기와집으로 침실이 넷, 부엌 칸, 집새칸(소먹이 써는 곳), 방앗간, 외양간 등이 한데 어우러진 건물이었다. 서재는 초가집으로 ‘봉계정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창골집 앞에는 깊은 샘물이 있고, 밭은 만 평 정도 됐다. 그 끝자락에는 절벽이 있고, 절벽 아래로 흰 돌, 푸른 돌이 깔린 맑은 시냇물이 흐른다. 뒷산 꼭대기에는 옛 성터가 있다. 가까이에는 두만강이 흐른다. 그리고 두만강을 건너면, 북간도, 연해주 등지로 갈 수 있다. 김재준의 집 앞에는 뿔 모양이 송진산이 있다. 서쪽에 경흥과 경원에는 탑향산이 있는데, 송진산과 비슷하나 뿔 모양은 없다.

“소낙비에 몸 씻는 맑은 푸르름, 흰 구름이 신부의 면사포처럼 살짝 가리운 산기슭, 그리고 구름 위에 처든 머리의 드높음 이런 것이 내 어릴 때 몸에 밴 과장 아닌 산의 신비였다.”2)

김재준은 어린 시절 자연이 주는 신비감이 몸에 배어서인지 자연을 무척 좋아했다. 김재준의 증조부는 김덕영이다. 그는 선조 대대로 살던 집을 떠나 상리로 이사 와서 주변 미개간지 약 3만평을 일궈서 집안을 일으켰다. 일약 대농(大農)축에 든 것이다. 당시에는 개간만 하면 자기 땅이 될 수 있었다. 집 근처 밭에는 오래된 고목이 있어서 무당이나 점쟁이들이 고사지내고 동네 사람들은 헝겊조각을 매달아 치성을 드렸다. 행여나 집안에 무슨 탈이라고 생길까 동네사람들은 고사지낼 때 말고는 그 근처도 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 근처는 유난히도 풀이 많았다. 3만 평을 혼자 개간할 정도로 배포가 큰 성격을 가진 증조부는 그런 미신 따위는 무시하고 그 풀을 베다가 소먹이로 썼다. 증조부는 흉년 든 해에 식량을 비축하여 집안 사람들을 돌보아 아사(餓死)를 면하기도 했다.

김재준의 할아버지는 김동욱이다. 풍채가 좋고 수구주의자였던 그는 큰아들의 개화운동을 못마땅해했다.

“벼슬이라도 하다가 때가 바뀌면 깨끗이 물러나 낙향할 것이지 ‘피발역복’(머리 깎고 양복 입은 것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하고 ‘양이’(서양뙤놈)를 따라야 한단 말이냐? 하셨다. 특히 ‘단발’을 싫어하셔서 ‘승혈만항’(중의 피가 거리에 찬다)이란 예언이 있느니라 하시며 노기를 띠기도 하셨다.”3)

김재준의 부친은 김호병이다. 형과는 달리 글을 하는 선비로서 한학에 조예가 깊고 유교 전통을 중시했다. 과거시험에 응시했지만 낙방했다. 당시에는 매관매직이 심한 때라 고을 원님 자리도 쉽지 않았다. 결국 함남 문천 원님 비서 일을 했다. 그러나 분가해서 낳은 첫아들이 몸이 아파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국운이 기울어지고 기강이 무너진 때 출세는 도리어 욕이라며 과거에 응시하지 않은 채 집안 일을 돌보았다. 그때부터 창골에 지내면서 풍월을 벗삼이 시도 쓰고, 사랑방에 서당을 차려놓고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시기도 했다.

김재준의 모친은 채성녀다. 경원군 용계면 함향동 평강 채동순의 셋째 딸이다. 함경북도 실학파 석학인 향곡선생의 직계 사대손으로 자랑스런 가문에서 태어났다. 모든 일에 예의와 법도가 몸에 배어 집안에 대소사를 치를 때 온유하면서도 위신 어린 어머니의 모습을 어린 김재준은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큰 인물이 되기를 바랐다.

“형수님이 상 차리실 때 나는 꼬마라고 작고 예쁜 놋주발에 밤을 담아 주곤 했었다. 어머니는 ‘큰 그릇에 담아줘라. 그래야 사람도 큰 구실을 한단다’ 하셨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부터 밥그릇만은 컸었다.”4)

그렇기에 어릴 적부터 김재준은 어머니로부터 바른 말과 행실을 배웠다. 입에서 쌍스러운 말이 나오면 어머니는 반드시 책망하고 고쳐주었다. 하루는 못된 장난을 치다가 어머니께 걸렸다. 김재준은 이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위신 어린 얼굴로 “그렇게 못된 장난하던 애가 후에 더 큰 인물이 됐다는 이야기도 있기는 하더라만” 하시면서 한숨과 함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후로 김재준은 어머니를 존경하게 됐다.

[각주]
[1] 천사무엘,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살림, 2003), 24.[2] 김재준, “창골집”, 『김재준전집』 제13권(한신대학출판부, 1992), 6. 이하 『전집』으로 표기한다.[3] “증조부님과 조부님”, 『전집』, 제13권, 9.[4] “아버님, 어머님”, 앞의 책,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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