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8일 목요일

[범용기 제3권] (159) 北美留記 第四年(1977) - 토론토에서 舊友 한경직을 만나서

[범용기 제3권] (159) 北美留記 第四年(1977) - 토론토에서 舊友 한경직을 만나서


3월 21일(월) - 그동안 한경직 목사가 토론토 한인장로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한다고 했다.

한목사와 나는 프린스톤에서 같이 2년을 지낸 동창친구다. 그래서 박희민 목사를 통하여 면회를 청했다. 집회 끝나는 대로 만난다고 약속됐다. 집회가 끝났는데도 소식이 없어 다시 물었더니 새벽같이 떠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떠나기 직전 호텔에서 조반을 같이 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합의되었다.

아침 8시에 그의 호텔에 갔다.

그는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옛 모습 그대로다. 나는 “뒤에서는 욕했는데 만나니 반갑구려!” 하며 진짜 반갑게 악수했다. 그도 그러했으리라고 믿는다.

나와 한경직, 이상철 그리고 박희민이 작은 식탁에 앉았다. 나는 다짜고짜로 물었다.

“한목사는 박정희와 단짝이 되어 그의 부탁으로 북미주를 순강한다는데?”

“천만에! 나는 육여사 장례식 때 한번 그를 만난 것 뿐이오. 그것도 처음에는 순 기독교식으로 거행한다기에 허락했었는데, 다음에는 불교, 유교, 기독교 종합예식이라고 해서 두 세 번 거절했었소. 그랬더니 문공부에서 일부러 사람이 와서 ‘아니, 목사님은 살인죄수 장례식도 두말없이 해 주면서 육여사 장례식에는 순서 하나 맡아달라는 것도 거부하십니까? 기독교가 국교로 되있지않는 한, 기독교만의 의식을 주장하기도 어렵지만 육여사가 경건한 불교신자였으니 어쩔 수 없지 않소. 그러나 한목사님에게 불교 프로에 끼어드시라는 건 아니고 기독교로서의 기도를 원하는 것뿐이 아니겠오?’ 그러니 내가 거절하 말이 없잖소! 거기서 잠깐 박대통령을 만난 것뿐이오” 한다.

“조찬기도회에서 한목사는 박정희를 모세 같은 민족지도자라고 극찬했다면서?

“내가 언제 그랬소? 그러나 대통령을 잘하라고 기도하지, 못되라고 기도할 수야 없지 않소!”

“영략교회의 성격은 어떤거요?”

“영락교회는 지금 매 주일날 낮예배에 약 3만명이 출석하는데 네 번에 나눠 집례하고. 거기에는 고위관리, 여러 은행총재들, 국책회사 사장족, 국회의원, 유정회분들…. 그 밖에도 소위 박정권 특권층은 거의가 영락교회 교인이오. 그러니 내가 거기서 어떤 설교를 할 수 있겠오?”

“알겠오! 한목사는 남 듣기 싫은 소리는 못하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지금 예언자적인 젊은 목사들이 바른 소리하고 감옥에 들어갔는데 그들을 위해 기도하거나 공석에서 그들 이름 하나 ‘멘슌’한 일이 없다고 들었는데 그게 목사의 심정이오?”

“하하! 내 이제 나가면 내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구상중이오.”

“한목사 할 일이란 대략 어떤거요?”

“나는 교회제일주의자란 말이오. 예수 믿고 교회에 나오라는 거요. 박정권은 이 일을 방해하지 않을뿐 아니라 도리어 지원하는 편이오. 군대 전도에서도 한번에 3천명식 믿게 된단 말이오. 어디서든지 예수 믿으려는 인구는 굉장히 늘었소. 그래서 나는 여생을 전도에 바쳐서 교회인구를 적어도 3천만명 정도로 늘여볼 작정이오. 그리하면 나라도 저절로 달라질거요. 그때에는 김목사(나를 가리키며) 말 들을 사람도 많아야겠지요. 지금 정치적으로 박정희를 건드리면 전도에 장해가 올거니까 삼가야 하겠고, 또 그가 ‘반공’을 국시로 한다는데는 나도 우리 교인들도 모두 찬성이오. 공산주의가 된다면 선교자유가 아주 없잖겠오?”

시간이 없어서 더 오래 얘기할 수가 없었다. 나는 “크리스찬”이 된다는 것과 “교회주의자”가 된다는 것과는 꼭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 참 크리스찬은 하느님의 의로 교회를 비판한다는 것, 신앙이란 것은 수(數)의 마술에 마취되지 않는 의로운 바탕을 소유해야 한다는 것, “교회주의”에서 “그리스도주의(?)”에로 방향을 다시 모색해야 한다는 것을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어서 미흡한대로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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