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8일 목요일

[범용기 제3권] (157) 北美留記 第四年(1977) - 와싱톤에(죄수복 차림의 데모)

[범용기 제3권] (157) 北美留記 第四年(1977) - 와싱톤에(죄수복 차림의 데모)


2월 26일(토) - 9시 45분 AM에 문재린 목사님과 둘이서 와싱톤으로 날았다.

10시 45분에 도착, 그 근방은 모두 관청건물이라 보통 식당이 없다. Calton Hotel 지하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둘이서 햄 앤엑, 토스트, 커리를 먹고 15불을 냈다.

백악관 앞 공원에서 모이기로 되있었는데 너무 일찍 왔었는지 문목사님과 나밖에 없었다. 조금 걱정이 되었다. 필라델피아의 김순경 박사가 혼자 나타난다. 반가왔다.

얼마 서성거리는 동안에 전세뻐스로 온 N.Y.부대가 내린다. L.A. 보스톤부대도 온다. 약 100명이 됐다.

N.A.부대는 숱한 죄수복을 싣고 왔다. 부인동지들이 밤새가며 만든 생광목 바지 저고리다. 우리는 모두 양복위에 죄수복을 입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연행된 민주인사 “함자”를 한데모원에게 한분씩 가슴에 달았다. 내게는 윤보선씨 성함이 차례졌다. 그리고 긴 밧줄에 손목이 엮인 모습으로 행렬은 시가를 걷는다. 구호는 이승만, 시노트 신부가 선창했다.

이 죄수복 대열은 백악관, 한국대사관, 일본대사관, 국회의사당, 그리고 거리를 종일 외치며 걸었다. 경관대와의 충돌도 심심찮게 잦았다.

밤에는 황재경 목사 교회에서 한경직 목사가 친여적 부흥회를 한다기에 만나려고 전 데모대원이 갔었지만 경관대의 포위로 입장이 거절됐다. 김병서 박사만이 보통 교인으로 분장, 뒷문으로 들어갔단다. 우리는 밖에서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데모” 구호를 외치고서 헤어졌다.

김병서 박사의 보고에 의하면, 그는 상복 위에 외투를 입고 옆문으로 들어가 강단 바로 밑에 앉았다. 한경직이 나타나자 그는 외투를 벗고 죄수복차림 그대로 한경직 앞에 다가섰다한다. 한경직은 당황했다. 그는 “몇마디 여쭈어 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했다. 장로들이 달려들어 한경직을 피신시키고 김병서를 몰아냈다고 한다.

그날 밤 나는 홍성빈 집에서 유숙했다.

2월 27일(일) - 낮에는 백인들과 연합하여 백인교회에서 연합예배를 드렸다. 영어와 한어를 섞어 진행시킨다. 나는 영어로 축도한 것 뿐, 문재린 목사 사모님의 3분간 연설은 “압권”이었다.

“나는 내 아들이 먼저 나오기를 원하지 않는다. 동료들이 다같이 나올때까지 거기 머물러야 한다. 나는 감옥 안에 있는 사람들만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 감옥 안이나 감옥 밖이나 통털어 ‘감옥’이기 때문이다.…”

밤에는 촛불행진이다. 백악관 앞에까지 갔다가 다시 회의장소에 돌아오는 ‘코오스’였다.

2월 28일(월) - Washington에서 모이는 North America Coalition의 Steering Committe에 참석하고 전규홍 박사의 초대로 점심, 오후에는 두 파로 나뉘어 한 파는 Fraser의원 회견, 한 파는 백악관 동북아안보담당관을 회견하기로 했다. 나는 후자에 배정됐다.

임창영 박사도 나와 같은 일행이었다.

관료와 민간인과의 회견이란 그리 유쾌한 기분일 수가 없다.

발언을 무척 삼간다. 그는 임창영 박사의 말씀을 약 10분간 듣고서, “그래도 ‘이북’보다는 낫지 않느냐?”한다. 임박사의 성분을 “친이북”으로 규정짓고 말하는 ‘야유’였는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이 별로 말이 없기에 나는 “억압에 대한 감도(感度)는 다분히 주관적이어서 컴퓨터식의 해답을 얻기가 어렵다. 가령 미국시민이 박정희 정도의 탄압정치 밑에 있다면 그 반발정도가 지금의 한국시민과 꼭 같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들으려는 성의를 보였다. 그리고 얘기도 얼마했다. 30분 약속시간은 엄수랄까. 그는 황급하게 자리를 떠난다.

3월 1일(화) - 홍성빈 집에 머문다. 세계은행의 인도담당직원인 “귀진”의 인도얘기를 흥미롭게 들었다.

인도 농민은 영양부족으로 몸이 쇄약하다. 육류를 먹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육우(肉牛) 목장을 설계하여 인도정부로 세계은행에서 차관을 얻도록 하고 영양식품공장을 세워 염가로 서민층에 영양식품을 제공하는 구체적 계획서 작성에 노력하고 있노라 했다.

12시 45분에 토론토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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