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2일 화요일

[범용기 제2권] (137) 잠시 “런던”가 바람쐬고 다시 투위에(1969) - 삼선개헌안 날치기 통과와 국민투표

[범용기 제2권] (137) 잠시 “런던”가 바람쐬고 다시 투위에(1969) - 삼선개헌안 날치기 통과와 국민투표


3선개헌안이 국회에 제출되더라도 통과될 가망은 없었다. 박정희의 ‘바지저고리’라는 이효상 국회의장이 또 무슨 날치기 지령에 놀아날지 몰라서 국회의원들은 밤낮 의사당에 농성하는 것이었다.

토요일밤 열두시 -

“이제부터는 일요일인데 일요일은 의사일정도 없으니 다들 돌아가 쉬시지요”하고 이효상 의장은 말했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 의장은-

“그럼 나는 집에 가겠오”하며 뒷문으로 나간다. 몇 사람의 공화당 의원이 따라 나갔다.

자정이 지났으니 통금시간이라 길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의사당 뒷골목은 어두컴컴했다. 길건너에 ‘제3별관’이 있다.

물론 앞문이 닫혀 있다. 이 의장과 몇 사람 위원은 뒤로 돌아 판자로 된 뒷문을 뜯고 들어가 제3별관 어두컴컴한 뒷방에 촛불을 켜고서 삼선개헌안 통과라고 속삭이고 방망이를 두들겼다. 그리고 각 신문사에 통고한 다음에 생쥐처럼 도망쳤다. 박정희는 새벽 세시에 ‘싸인’하고 기자들에게 발표했다. 신문은 대문짝같은 호외를 돌렸다. ‘날치기’라는 내용을 폭로한 것이다.

이효상은 물론 박정희의 지령대로 한 것뿐이다.

국회의원들은 닭 쫓던 개가 울타리 쳐다보는 식이 되었고 시민들은 울분이 곤두솟아 불신자들까지도 교회당에 마구 모여 들었다.

“덤덤한 설교하는 목사는 없다”고 수군거리더라는 것이다. 특히 경동교회는 초만원이었는데 강원용 목사의 설교는 울분의 분화구였다 할까. 모두들 통괘하다고 했단다. 나는 주일날 아무데도 나가지 않았다.

나는 곧 삼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 실행부를 모이고 대책을 강구했다. 이제 국민투표 절차가 남았는데 끝까지 투쟁해 보자는 것이었다.

투표 자체를 ‘뽀이콧’하느냐 투표를 하면서 부투표를 던지느냐 하는 문제로 격론이 벌어졌다. 김상돈은 전적으로 ‘뽀이콧’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투표 거부란 시골에서는 불가능한 얘기였다. 동반장 책임으로 트럭을 동원하여 전 주민 유권자를 투표장까지 실어가는 판국에 ‘거부’가 성립될 리가 없기 때문이다.

투표를 하든, 안하든,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니 ‘부표’ 던질 기회라도 국민에게 허용하는 것이 옳다는 것으로 낙착됐다.

이 판국에 ‘부정선거’ 아닌 ‘공정선거’를 기대할 수는 물론 없는 것이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