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30일 수요일

[범용기 제2권] (125)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가다 – W.C.C. “교회와 사회” 세계대회에

[범용기 제2권] (125)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가다 – W.C.C. “교회와 사회” 세계대회에


1963년 8월엔가 제네바에서 W.C.C. “교회와 사회” 세계대회가 열린다고 한국대표로 백낙준 박사와 내가 참석하게 됐다. K.N.C.C.의 젊은이들과 강원용 목사가 그렇게 민 모양이었다. 강원용은 Ex-Officio로 참석한다.

어쨌든, 우리는 동경까지 가서 거기서 인도의 ‘봄베이’에 날았다. 그 당시에는 인도의 M.M. 토마스니, 버기스 신부니, 다니엘스니 하는 일파가 아세아 지역을 배경으로 W.C.C. 간부급에 등용돼 있었기에 그들의 입김이 셌다. 그래서인지 인도에서 제나바까지의 비행기는 Air India를 타야한다는 제약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에어 인디아의 제네바행은 자주 있는 것이 아니어서 우리는 무려 열흘 가까이를 본베이에서 호텔에 유숙했다. 덕분에 인도 냄새는 얼마 맡아 본 셈이다.

간단한 기행문은 어디엔가 발표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제네바에서의 회의는 지루했다. 백낙준 박사와 나는 같은 호텔 같은 방에 있었다.

중ㆍ남미, 아프리카 등지에서 온 비교적 젊은 연령층의 대표들이 판을 치며, 거의 전부가 미국에 대한 욕설에 핏대를 올리고 있었다. 이번 회의 비용의 대부분도 미국에서 담당한 모양인데 ‘돈내고 욕먹기’가 미국의 분깃인 것 같았다. 그래도 미국교회 대표들에게서는 한마디 변명도 답변도 없었다. 혹시 사석에서 말이 나오면 “그 정도의 욕으로서는 아직 부족하다”고 한다.

월남전을 미국에서 가로맡은 후였기에 미국의 인기는 형편없었고 회의 끝날 무렵쯤에는 북폭을 개시했다는 것 때문에 반미감정이 물끓듯 했다. 유일한 미국 동정자는 한국대표였다고 할까? “북에서 밀림을 기어 남하하는거나 남에서 공중을 날아 북상하거나 마찬가진데 왜 남쪽만이 침략이냐”고 따지는 사람도 한국사람이었던 것 같다. 마감날 ‘플로어’에서 ‘데모’를 결의하자는 제안이 나왔을 때에는 세시간 이상 격론이 벌어졌다.

마아가렛ㆍ미드는 데모파였다.

한 사람이 3분씩 발언하도록 제한됐다.

투표에서 데모파가 졌다. 그러나 청년들은 자기들끼리서 데모를 했다. W.C.C. 본부에서 UN본부까지 행진한다는 것이었다. 중남미와 아프리카의 젊은 혈기가 열탕같이 끌어 넘치는 것을 느꼈다.

모임이 끝난 다음, 나는 혼자서 런던 구경을 떠났다. 흙탕물 테임즈 강 건너 국회의사당, 웨스트민스터, 성바울사원 등을 잠깐씩 보고 곧장 빠리로 날아갔다. 빠리에서도 혼자였지만 관광팀에 섞였다. 세느 강은 관광선을 타고 돌았고 강가에 중세기 동굴도 샅샅이 걸어보고 에펠탑에 걸어올라가 식당에서 불란서 요리를 먹기도 했다. 베르사이유 궁전도 봤다.

박물관은 한 ‘홀’의 진열품 감상에 하루 걸렸다. 내 감상력이 섬세해서가 아니라 진열품이 너무 많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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