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30일 수요일

[범용기 제2권] (117) 5ㆍ16 군사반란(1961) – 4대 의혹사건

[범용기 제2권] (117) 5ㆍ16 군사반란(1961) – 4대 의혹사건


1963년 4월에 소위 ‘사대의혹사건’(四大疑惑事件)이 탄로났다.

국민경제를 교란시켜 그 틈을 타서 횡재를 거둬먹으려는 공공연한 도박 행위였다.

이것은 몰래 일본에 드나드는 김종필의 작전이었다 한다.

① 힘센 사람이면 한손으로 번쩍들어 팽개칠 수 있다는 ‘새나라’ 자동차 수입 – 명색이 자동차니만큼, 헐값으로 사들여 정상적인 자동차 값을 다 받는다는 계산이었고,② 도박을 위한 ‘빠찡코’ 기계 수입③ ‘워커힐’에 맘모스 유흥장 시설④ 증권파동 조작 등등을 ‘4대의혹사건’이라 부른다.

이것은 물론 한일국교정상화 이전 얘기니까 모두가 불법임에 틀림없다.

① 경제에는 경제의 법칙이 있으니만큼 군대의 호령대로 행진하는 것은 아니다.

‘부정축재처리법’이니, ‘농어촌고리채정리법’이니 하는 구호는 그럴듯한데, 악성인플레와 물가앙등만이 치솟아서 ‘민생고’는 여전하다. 절량농가 문제는 완화된 것 같았지만 이농(離農) 자가 증가일로를 걷는다.

그래서 도시 실업자가 부쩍 는다.

② 정권의 내분이 심각해진다. 군사정권을 구성한 ‘인맥’과 ‘파벌’은 ‘육사 8기생’ 중심이다. 그러나 ‘반8기생’, 평안도파(장도영 계열), 함경도파(알라스카파), 해병대파(김동하파), 김종필파, 반김종필파 등등이 서로 반목질시한다.

1961년 7월의 장도영 반혁명 사건, 1963년 3월의 박림항, 박창암 등의 반혁명사건, 1963년 10월의 김윤근 쿠데타 용의사건 등등은 집안싸움의 일종이었다.

그런데 최고집권자인 박정희는 경륜도 신념도 경험도 정견도 없기 때문에 그 ‘근본해결책’을 강구하기 보다도 그때그때에 생각나는대로 탄압제일주의로 나갔고 그것이 잘 안되면 ‘번의’를 떡먹듯 하는 것이었다.

그는 과잉의욕과 시행착오를 겸한 ‘데마고그’였다.

③ ‘반공’을 국시로 한다 했지만, 6ㆍ25의 공산군 남침 이후 남한국민으로서 반공의식 없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진짜 공산그룹은 해방 후에 곧 월북했고 6ㆍ25때에 대거 월북했기 때문이다.

‘박’은 ‘반공’에 ‘국시’(이승만 때에도 마찬가지였지만)라는 닻을 달아 부동(不動)의 무게를 덧붙였다. 그리고 자기정권에 반대하는 자는 ‘반공법’으로 처단한다.

‘반 박정권’자는 공산분자고, 이북간첩이고 국가반역자라는 자리류의 공식을 만들어 중형에 처한다.

‘반공’은 박정희의 ‘만능호신부’(萬能護身符)다. 그는 ‘시행착오’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건 자기 잘못이 아니라, 부하들의 불찰이거나 국민의 ‘몰지각’ 때문이라고 한다.

“좀 더 따끔하게 졸라라!” 따라서 KCIA는 어깨가 으쓱해진다.

‘박’은 원래가 정보장교 출신이니만큼 그가 만든 국가도 ‘정보국가’로 태어나지 않을 수 없겠다.

‘민심’은 그를 떠난지 오래다. 국민, 특히 학생, 교수, 기독교지도자의 일부는 ‘박’에게 책임을 묻는다.

독재자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무신유물론자니 하느님께 책임질 맘도 안생긴다. 자기가 ‘신’의 자리를 점령했기 때문이다. “‘박’이 곧 국가다”하는 오만자다.

그러나 그건 제생각일 것뿐, 국민은 ‘덜 된 녀석’으로 밖에 보지 않는다.

국민이 납득하지 않는 한, 아무리 탄압해 본대도 혼자서 3천만을 대항하여 이긴다는 계산은 나오지 않는다. 진시황도 히틀러도 그러했다.

군정의 장기화란 미국의 치욕이기도 했다. 미국 대통령 케네디는 그를 미국에 초청하여 담판했다. 2년 후인 1963년 여름까지 민정으로 이관한다고 ‘박’은 다짐했다.

그때부터 ‘박’은 ‘민정’이란 탈바가지 속에서 ‘군정’을 연장하려는 흉계를 꾸민다.

① ‘박’은 1963년 8월 12일에 민정으로 이관한다고 발표했다.

② 정치정화법을 만들어 구 정치가의 활동을 봉쇄했다. 3,038명이 정치 활동금지를 당했다.

③ 1962년 여름부터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을 시켜 비밀리에 전국을 순방하며 어둠속에서 민주공화당 조직을 진행시켰다.

④ 1962년 12월 27일에 박정희는 쿠데타 당시의 공약을 깨뜨리고 자신의 대통령 출마를 선언했다. 그리고 다음해 1월 1일부터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⑤ 1963년 2월 18일에 아홉가지 정국수습방안을 발표하면서 이런 것들을 수락한다면 자기는 민정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성명했다.

① 5ㆍ16 혁명과업의 계승
② 5ㆍ16 혁명의 정당성 인정
③ 정치적 보복의 금지
④ 혁명주체세력의 군 복귀 또는 민정참가는 개인의 의사에 맡길 것
⑤ 유능한 예비역 군인의 기용
⑥ 한일문제의 초당파적 추진

이런 조건들이 각 정당과 정치지도자에게 수락된다면 박정희 자신은 민정에 참가하지 않는다.

이것은 2ㆍ18성명이라고 한다.

이런 성명을 내게 된 것은 ‘군사정권장기회’에 대한 국민의 불만과 정권 내부의 의견대립을 무마하기 위한 ‘제스츄어’였다.

⑥ 1963년 2월 27일 – 박정희와 각 정당ㆍ정파 지도자들과 군 대표가 회집하여 시급수습방안을 수락하고 준수하겠다는 선서식을 거행했다.

같은 날에 최고회의는 ‘정정법’ 해당자 중에서 2,320명을 해제했다.

⑦ 1963년 3월 7일에 박정희는 5ㆍ16 쿠데타 정치질서에 해를 끼친 기성 정치가의 후퇴를 요구하고 군사쿠데타를 지지하는 새 세대에 정권을 맡겨야 한다는 ‘세대교체’론‘을 주장했다.

⑧ 1963년 3월 15일에 수도방위사령부 소속 현역군인들이 민정이관에 반대하고 군정연장을 요구하는 ‘데모’를 했다.

‘범용자’도 그 광경을 목격했다. 짚차대열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보병들은 마치 전장에 나가는 돌격대같이 긴장된 표정이었다.

⑨ 1963년 3월 16일 – 박정희는 군정 4년연장을 국민투표에 의하여 결정한다고 발표함과 아울러 ‘비상사태수습 임시조치법’을 공포하면서 기성 정치가의 정치활동을 중지시켰다.

⑩ 1963년 3월 19~22일 – 재야정당인과 시민이 군정연장 반대데모에 나섰다. ‘3군지휘관회의’에서는 군정연장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⑪ 1963년 3월 23일 – 미 국무성은 군정연장을 반대한다는 것과 합리적인 민정이관을 기대한다는 서한을 박정희에게 전했다.

⑫ 1963년 4월 2일 – 미국 대통령 케네디는 박정희가 보낸 회답에 대한 회신에서 “한국에 민주정부가 서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 당시 외무장관은 이동원이었다.

이동원은 박정희와 미국대사관과의 사이에 ‘쌘드위치’가 됐다.

그의 말에 의하면 – 박정희는 미국대사에게 대통령 출마를 포기했노라고 울면서 얘기했단다. 미국대사는 박정희의 신변보호와 남은 생애의 보장과 미국 이거(移去) 등등을 절대보장한다고 했다.

박정희는 승낙하고 나갔다. 얼마후에 또 와서 “암만해도 안 되겠다”고 ‘번의’한다.

그러기를 몇 번 하다가, 군부데모가 있은 그날 밤에 와서는 기승한 태도로 “나는 그만두지 않는다. 그만 둘 수도 없다”, “군부가 일어나 궐내 혁명을 일으킬 때, 너희가 책임지겠느냐?” 하고 마구 대들더라는 것이었다.

⑬ 1963년 4월 8일 – 박정희는 군정연장에 대한 국민투표를 9월말까지 보류하고 기성정치인의 정치활동금지 조치법을 폐기하고 정당활동을 재개하게 했다. 이것을 4ㆍ8성명이라 했다.

⑭ 박정희는 국민투표를 중지하고 연내에 민정으로 이관한다고 발표했다.

⑮ 1963년 5월 27일 - “민주공화당”은 전당대회를 열고 박정희를 대통령 후보를 지명했다.

⑯ 1963년 7월 27일 – 박정희는 대통령 선거를 10월 중순에, 국회의원 선거를 11월 하순에, 새 국회소집을 12월 중순에 실시한다고 ‘민정이관’ 절차를 발표했다.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이미 사전암약을 통하여 말단 조직과 전략과 국회의원 입후보자까지 정해져 있었지만 ‘야당’ 측은 군소정당이 난립경쟁하여 난맥상을 이루었다.

이제 그 정당 이름만을 적어보기로 한다.

① 민정당 – 윤보선, 김병로, 이인, 전진한
② 신정당ㆍ국민당 – 허정
③ 범국민당ㆍ자유민주당 – 친여야당으로서 위원장은 소선규, 부위원장 김용우
④ 민주당 – 박순천, 홍익표 등
⑤ 자유당 – 장택상
⑥ 정민회 – 변영태, 인태식
⑦ 민우당 – 이범석, 이윤영

이것을 계보적으로 정리한다면 ① 이승만계, ② 한민당계, ③ 군부계로 된다.

그 밖에 – 이동화, 김달호, 윤길중 등은 옥중에 있었고 서상일, 최근우, 이훈구 등도 옥중, 장건상, 김성숙, 김성주, 조헌식, 정화암, 구익균, 송남헌 등은 출옥되었으나 감시하에 있었으며, 박기출, 유병묵 등은 지하에 잠복하고 있었다.

‘범용자’가 목격한대로 민주공화당에서는 정구영을 총재로 하고 의장에는 김정렬(金貞烈)을 선출했었고, 시골있는 정구영을 억지로 서울에 모셔다가 취임식 준비까지 완료했었다. 그런데 박정희가 그 자리에 나타나, “너희가 그 따위로 한다면 맘대로 해라. 나는 당과 절연한다”하고 퇴장했다고 들었다. 그래서 ‘당’에서는 ‘울며 겨자 먹기’랄까, ‘억지춘향’이랄까, 박정희를 총재로 한 것이라 했다.

항간에는 ‘민주공화당’은 ‘민주’도 아니오, ‘공화’도 아닌, ‘박’의 ‘탈바가지’라는 ‘까십’이 돌았다. 말하자면 “비민주ㆍ비공화당”이라는 이름의 ‘도당’이라고 야유하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육군대장이 되어 예비역에 편입했다. 그리고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1963년 8월 31일 제3차 전당대회에서 민주공화당 총재로 선임되고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했다.

선거는 유사이래 유례없는 부정부패였다고 한다. 면장, 동장, 반장, 소, 중학교 교사 등이 총동원, 사전매표에 광분했다. 그러나 대도시는 어느 정도 예외였다.

어쨌든, ‘박’은 군복을 벗고 민간인 의복을 갈아 입었다. 같은 배우가 복장만 갈아 입고 무대에 ‘데뷰’한 셈이었다.

국민은 여전히 조소와 냉담과 분노화 항거로 들끓으며 출구를 찾고 있었다.

난립된 야당들도 반성하게 됐다. 그래서 단일 또는 협동야당운동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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