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14일 월요일

[1233] 長空 칼럼 (9) : 5ㆍ16과 미ㆍ일 ( 1979년 5월)

長空 칼럼 (9)
5ㆍ16과 미ㆍ일


미국의 한국에 대한 기본정책은 친미ㆍ친일ㆍ반공에 철저한 정권 수립이었다.

이승만은 “친미”였으나 “반일”이었기 때문에 4ㆍ19를 계기로 미국의 압력에 의하여 “하야”하게 되었다.

장면(張勉)은 친미ㆍ친일이었으나 친일 외교에 대한 국내의 반대세력을 가차없이 탄압할 담력이 없었기 때문에 “무능”이란 딱지를 붙여 퇴진시켰다.

그리고 친미ㆍ친일ㆍ반공이면서 강력 독재할 수 있을 것으로 계산된 군인정부를 내세우게 됐다. 그리고 그 수반으로 박정희를 밀었다. 원래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사관학교 훈련을 거쳐 “천황”에게 충성을 서약한 황군장교로서, 일본의 대륙 침략 때 조선, 중국의 항일독립운동 소탕전 제일선에서 “용명”을 날린 “일군”(日軍)이었는데 8ㆍ15 해방 후 미군지휘 하의 한국군 장교로 전신한 사람이다. 군인이란, 조국 수호에 일관된 충성을 발휘하는 것이 그 본령이므로 진정한 군인이라면 그 충성 대상을 이 나라, 저 나라에 팔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박정희는 친일ㆍ배(拜)일의 체질인 데다가 국내 반박 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할 잔인성도 겸비했고 일단 정권을 잡은 다음에는 그 정권 유지를 위하여 미ㆍ일의 원조를 필요로 할 것이었기 때문에 미ㆍ일의 입장에서 이용가치가 충분히 인정되었던 것이다.

박정희가 국군 속에 공산주의를 침투시키는 책임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는데, 그에게 “반공”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여수 순천 사건 주동자로서의 사형 언도를 계기로 꼼짝 못할 그물에 걸어 놓았다고 보겠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가 인솔한 3500여명의 군대가 서울에 돌입하여 정부기관, 시내요소를 점령하고 정부요인을 체포함과 동시에 서울 전시(全市)의 경찰을 접수했다. 아침 일곱시에 군사위원회가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을 장악하고 혁명의 성공을 방송했다.

5월 19일에 군사혁명 위원회를 “국가재건 최고회의”로 개칭하고 의장으로 장도영을 “데뷰”시켰다. 그리고 군인내각이 발족됐다. 그러나 7월 3일에 소위 “반혁명사건”을 이유로 장도영이 체포되고 최고회의 부의장이었던 박정희가 의장이 됐다. 그래서 명실 공히 “박”은 군사정권의 전권을 거머쥐었다. 그 당시의 내각 수반은 송요찬이었다.

그런데 미군이 이 “반란”을 모르고 있었을까 하는 것이 문제다. 국련군 산하에서 미군 통제 하에 있는 한국군이 과연 독자적인 행동을 해낼 수 있었을까? 그 당시 주한 미 대리대사 “그린”, 주한 국련군(미군) 사령관 “메그루더”는 이 구데타의 “뉴우스”를 듣고 당황한 표정으로 구데타 지지를 거부하는 성명을 냈다지만, 미국무성 대변인은 “한국 방위와 민생안정을 위하여 신군사정권과 협력을 용의가 있다”고 발표했다. 7월 27일에는 미국무장관 러스크가 한국의 신정권에 대한 지지와 원조를 공식으로 발표했다.

어쨌든, 미군사령관의 전면적인 통솔 하에 있는 한국군의 “반란”이 그 유명한 미 정보기관과 아무 관계없이 성공됐으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박정희 김종필 등의 불온한 행동은 그 전해 12월쯤에 항간에 일부 유포되어 장면 내각의 수사기관에서도 그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한다. 그런데 쿠데타의 명수인 미국 CIA가 그걸 모르고 있었다거나 간여한 바 없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지 않은가?

사실 미국, 영국계통의 석유회사를 국유화한 이란의 모사테크 수상의 실각(1953년), 남베트남의 고덴디엠 정권의 붕괴(1953년), 인도네시아의 스카르노 대통령 실각(1963년), 캄보디아에서의 시아노크 전하의 추방(1970년), 저리에서의 아젠데 정권의 붕괴(1973년) 등등이 모두 실질적으로는 미국 CIA의 조작에 의한 정변이었다는 것은 공개된 비밀이다.

특히 한국은 38선에서 공산권과 직접 대치돼 있었고 4ㆍ19혁명 이후에 한국 민중의 남북교류와 통일에 대한 열망은 급속하게 높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장면 정권은 이것을 강력하게 탄압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무능”에 미국은 초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박정희 군사쿠데타를 유발 조종, 협조했다는 것은 그 당시의 행동과 그 후의 발전과정에서 명백해진다.

4ㆍ19에서 한국은 학생만이 아니라 일반 민중의 항쟁력이 상상 이상으로 강렬하다는 것을 미국은 알았고 허정, 장면 등 유약한 정권으로서는 그 폭발세력을 통어하기 어렵다는 것도 알았다. 특히 각양 좌익 세력에 조직적인 활동, 민족주의, 진보세력, 통일사회당, 사회대중당, 근로인민당, 민자통, 영세중립화위원회,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등등이 마른 풀에 불붙듯 일어나는 데 놀랐다. 그 중에서도 1961년 5월에 남북학생회의를 판문점에서 열자는 학생운동은 4ㆍ19학생 기백을 그 한점에 몰아 것잡을 수 없는 남북총궐기 현상으로 전개시킬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미군은 강력한 군사독재를 필요로 했다. 그리고 박정희는 이 일을 해치울 수 있다고 보였다. 박정희는 집권직후 자유당, 민주당 계열의 정치인, 부정축재인들에 대해서는 유야무야로 가볍게 처리했지만 혁신계의 정당, 사회단체, 청년, 학생, 노조 등에는 특수범죄처벌특별법(1961. 6.22 제정의 소급법), 반공법(1976. 7.3 공포) 등에 의하여 중형을 가했다. 이것은 미국이 원하는 “반공” 정책에 공훈을 세운 기록이라 하겠다.

둘째로, 일본과의 접근이다. 그러기 위하여는 박정권 초기의 노골적인 “팟쇼”를 완화시켜 “민정”으로 일관해야 했다. 러스크ㆍ박 회담(1961. 11), 이께다(池田)ㆍ박 회담(61. 11. 12), “박”의 미국 방문 등등은 한국원조책임을 일본에 분담시킨다는 미국 정책의 첫걸음이었으며 한일유착에의 씨를 뿌린 것이었다.

박정희가 “민정이양” 과정에서 몇번이고 “번의”했다는 것은 이제 말할 것도 없지만, 결국 군복을 평복으로 갈아입은 군정형태를 용케 헤엄쳐 나갔다고 하겠으며 그것은 미국의 이익에 상반되는 것이 아니었다.

미국은 한ㆍ일ㆍ미를 한데 묶어 소련의 동침(東侵)을 막고 중공을 포위하려는 정책을 거의 조급하다 싶어 실천시키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의 “한일국교 정상화” 추진에는 박정희가 안성마춤의 인물이었으므로 교섭은 일사천리로 진전되었다.

1961. 11. 동경에서의 박ㆍ이께다(朴ㆍ池田) 회담, 1962. 11. 청구권 문제에 관한 김종필ㆍ오히라 합의, 1965. 2. 20 한일기본조약 가조인, 1965. 6. 22 한일조약정식조인 등등 숨차게 달렸다. 그 무렵인 1965. 1월에 일본측 수석대표 다까스기(高相普一)는 “일본이 조선을 지배한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일본은 좋은 일을 했다. 20년 더 일본이 조선을 갖고 있었더라면 더 좋게 됐을 것이다. …” 하고 공언했다. - 이것 하나만으로도 한일국교 정상화란 것이 얼마나 치사한 굴욕외교였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굴욕외교” 에 대한 전국민적인 반대 운동은 치열했다. 이 반대운동은 그야말로 범국민적이었다. 1964. 3월부터 12월까지 거의 매일 학생, 시민, 교회, 언론, 법조계, 정치인, 예비역군인, 학계 할 것 없이 모두 참가했었다.

박정희가 그렇게까지 한일밀착을 서두른 데는 미국의 압력 역시 무거운 데가 있었다. 1964. 1. 29에 미국무장관 러스크는 서울에까지 와서 박정희에게 한일회담 조기타결을 독촉했다.

박정희는 국민의 신망이 거의 전적으로 퇴조(退湖)된 것을 느끼게 됐다. 그러니 만큼 탄압과 독재를 향하여 광분했다. 경찰 국가만이 자기 권좌를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다.

미국에서 한일국교 정상화를 서두른 숨은 이유 가운에는 월남파병문제도 있었다고 본다. 미국은 섣불리 불란서의 바톤을 넘겨 받아갖고 진탕구렁이에 빠져 소망 없는, 또 의미 없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뜻없이 희생되는 자기나라 젊은이들이 아깝다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국내의 반전소동이 너무 치열했었던 것이다. 박정희를 “삶아서” 한국 청년들을 대신 그리로 보내자. - 묘안이었다.

미국에서는 1964. 7. 25에 존슨 대통령이 박정희에게 친서로 파병을 요구했고 박정희는 64년 9월에 의료중대를 파견, 65년 1월에 공병중대, 수송중대, 해병대등 정규군 2천명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국회에선 월남파병에 찬ㆍ반으로 갈라졌었으나 “자유를 위한 십자군”이라는 미명 아래서 대다수의 찬성을 얻었다. 그러나 윤보선 씨만은 시종일관 이에 반대했다. 미국에서는 1966년 2월 22일에 험프리 부통령을 한국에 보내여 전투부대의 증파를 요청했다. 결국 “맹호” 부대, 육군전투사단, “백마” 부대 등등이 파견되었고 “인력수출”이란 이름으로 수만명의 노동자가 함께 갔다.

이것은 결국 미국의 “용병”(傭兵)이었다고 할까? 한국으로서는 명분없는 “유혈극”이었다.

그러나 월남의 “호지명”은 그야말로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싸웠다. 그는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비엔디엔 푸”에서 불란서군을 격멸하고 미국군을 손들고 나가게 했다. 그래서 강대국들이 최종 전략으로 안출한 휴전선언 17도선을 없애고 이름 그대로의 통일 민족 독립국가를 이룩했다.

그런데 미국은 자금 정치적으로 한국의 “안보”를 일본에 분담시킨다는 각도에서 한국을 일본에 밀어 맡겼다. 일본은 “일본 국방선은 한국에 있다”는 전통적인 침략구호를 공공연하게 외친다. 유상 · 무장의 배상금과 함께 교묘하게 위장된 경제침략이 진행된다. 소련과의 대결이란 의미에서 미국은 군사적, 정치적으로 남한의 거점을 물러나지 않는다. “박”은 외자 도입에 따른 경제성장을 내세운다. 그러나 누구의 피로 자랐느냐? 누구에게 가는 핏값이냐? 몇 사람의 뱃가죽이 두꺼워진 대신에 수백만의 노동층 핏줄이 말라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는다.

“박”이 처음에는 표독한 호랑이 새끼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대한 “구렁이”에게 감겨들었다. 구렁이는 슬슬 몸을 졸른다. 상한 데가 없으니 “피”는 안보인다. 그러나 답답하고 피가 돌지 않는다. 녹초된 호랑이 새끼는 구렁이 입에 통채로 빨려든다.

이런 영화 같은 박정권의 운명이 과대한 기우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런 비극은 지금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

“미국을 믿지 말라
소련에 속지 말라
일본이 일어난다
조선은 조심하라”

이 해방직후의 동요는 웃어버릴 정도로 유치한 것이 아니다.

그러면 이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거요? 그런 질문이야 말로 유치하다. 밤이 깊고 사람이 자는 때 홀로 앉아 마음을 보시오(夜深人靜獨主觀心)하고 홍자성(洪自誠)은 채근담(采根譯)에 적었다.

높은 자리의 교만한 사람, 부자 영감들 호화스런 안방 그리고 가난하고 눌린 몸팔이 서민 - 모두 한번 생각해 보시지. “강하고 큰 것이 밑에 있고 부드럽고 약한 것이 위에 있어야 제격이라고 노자도 말하지 않았소?”(老子 道德性 78장)

(1979. 5)

댓글 1개:

  1. 박정희 정권에대한 올바른 평가는... 미국과 일본과의 관계도 복합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미국은 박정희 정권 시절에 한미관계를 확고하게 정립하였고... 일본을 끌어들여서 중국과 당시 소련을 견제하는데 상당한 이익을 보았다.

    그런데 그것이... 태생적으로 박정희 정권이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정상적인 민주절차가 아닌 폭력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어쩌면(!) 비극으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당시 민주인사들의 예견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예견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박정희는 사라졌지만, 박정희가 남긴 유산(미국과 일본과의 관계)은 거의 40년이 되는 시점까지도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것이 제대로 정립되는 것이 올바른 대한민국을 세우는 과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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