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16일 수요일

[1116] 제3일의 논리와 역사의 내일 / 1974년

제3일의 논리와 역사의 내일


(1974년)

‘제3일’은 부활의 날이다. 그 윤리 역시 부활에 근거한다. 인간이 죽었다가 다시 산다는 것을 두고 예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 중에서도 찬ㆍ반 두 파가 있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했고, 바리새파 사람들은 부활이 있다고 믿었다. 예수는 바리새파인의 믿음에 동조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죽음에서 immediate하게 부활이 실현된다고 예언했다. 그러니까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파인들에게는 좋은 질문거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마태복음 22장 23~33절을 보면 사두개인들이 예수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선생님, 모세가 우리에게 일러준 율법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자녀가 없이 죽으면 그 아내를 그 동생이 자기 아내로 삼아서 형을 위해 자식을 낳아 줄 의무가 있다고 했는데, 우리 이웃에 7형제가 있는데, 형이 자식 없이 죽으니까 둘째 동생이 그 형수를 아내로 삼았으나 자식이 없었고, 둘째 동생이 죽으니까 셋째동생이 또 그렇게 했지만 그도 자식이 없이 죽고 … 이렇게 하여 일곱째 동생에게까지 갔지만 자식은 없었으니, 언젠가 그들이 다 함께 부활한다면 그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됩니까?”

물론 이것은 부활이 불합리하다는 빈정대는 질문이었지만, 예수는 진실하게 대답했다.

“너희는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권능도 모르기 때문에 잘못 생각하고 있다.” 부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너희들에게 하신 말씀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 했으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 여기서 부활에 대한 예수의 논리는 ‘산 자’라는 데 근거가 있다.

우리는 보통 “사람은 나서 살다가 죽는다.”라고 하는 것을 기정사실로 알고 있다. 다시 말해서, “산다는 것은 죽음에서 끝난다. 죽음은 삶의 마침표다.”라는 것이다. 삶이 죽음에 삼킨 바 된다는 것이니까, 죽음이 왕좌에 앉고 삶은 아무리 몸부림쳐 봐도 종당 그의 ‘밥’이 되고 만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런 줄 알고, 사는 날까지 살다가 미련 없이 죽는 것이 현대의 깨달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거기에 해결의 열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숙제를 포기한 것뿐이다. 죽음은 ‘비존재’로 되는 것이니까 살다가 죽으면 없어지는 것이다. 허무가 판을 칠 밖에 없다. 결국 없어지는 데, ‘있다’, ‘있게 한다’ 하는 게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사람은 나서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했다. 죽음은 삶의 종지부가 아니라 그 완성점이고 삶이 영원히 타오를 초점(focus)이라고 보았다. 그러기에 그는 애당초부터 자기 죽음의 한 점을 똑바로 보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던 것이다. ‘십자가’는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었다. 그의 삶의 보람이었다. 그 최후 결단이 그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민이었다. 죽음의 고통과 공포는 그곳에 그만큼 고귀한 값이 품겨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죽는 삶’이 아니라, ‘사는 죽음’이란 것이 예수의 견해라 하겠다.

여기서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죽은 다음에 천당 가게 한다.”는 사후 처리에나 필요한 분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살고 있는 인간에게 산 하나님으로 대좌하는 주권적인 분이라는 것이다. 그는 아브라함이 살아 있을 때에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그의 생애를 인도하고 보살피고 그의 물음에 대답하며 그와 언약을 맺은 분이었고, 아브라함이 죽은 다음에는 그의 아들 이삭에게 또 그리하였으며, 이삭이 죽은 다음에는 야곱에게 그리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산 자의 하나님은 산 하나님이요, 살리는 하나님이다. 죽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하나님이란 것이다.

삶이란 몸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몸 없는 영혼만으로 사는 것이 진정한 삶이라는, 몸은 인간의 참 삶에 거추장스러운 것이어서 몸을 떠난 영혼인 때에 참 자유하는 본연의 인간으로 된다는, 영혼 불멸 사상은 그리스의 이원론적 철학에서 나온 것이어서 히브리 사상과는 거리가 멀다. 바울도 다소 이원론에 감염된 데가 있으나, 그가 ‘몸’, ‘부활의 몸’을 유난히 강조한 것으로 가려지고 있다고 하겠다. 어쨌든 히브리 사상에서는 ‘몸’ 없는 영혼만의 삶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몸’이 곧 삶의 거점(strategic point)이요, 삶의 표현기관이요, 따라서 삶의 ‘실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이란 몸으로서의 부활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몸이 반드시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생리적 실체와 똑같은 몸이란 말은 아니다. 사두개인들의 잘못된 질문은 성경과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그들의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예수가 지적한 것은 정당하다. 그들은 부활의 세계를 현존 질서의 연장으로만 보았고, 그 고차원적인 변혁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부활의 세계는 변혁된 더 높은 차원의 실상이다.

그 몸은 승화(sublimate)된 몸이다. 부활한 예수의 몸과 같이 자유로운 몸이다. 그 유지를 위하여 물질적 영양소를 보급할 필요도 없다. 시간과 공간에 제약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자유로운 표현으로 사람들과 소통할 수가 있다. 바울이 말한 ‘영의 몸(spiritual body)’이다. 영과 몸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라지만 그 연합이 가능한 데에 하나님의 권능이 드러난다. 이것은 영광의 몸이다. 인간은 본래 몸으로 창조되어, 몸으로 살다가, 더 높은 차원의 몸으로 승화되어 영원히 산다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본래 모습이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죽음’이 선포된 것은 인간이 창조주로부터 받은 자유를 창조주에 반역하는 범죄 행위에 사용한 ‘이후’에 그 ‘벌’로 선포된 것이요, 원래의 창조 질서에 속한 것은 아닌 것으로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다.

인간 이외의 모든 생물들의 죽음은 자연 질서 안에서의 신진대사 법칙에 불과한 것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죽음은 그것 이외에 또 그것 이상의 딴 의미를 갖고 있다. 그것은 자연사의 범주를 넘어서 인간사란 가치의 세계에서 평정된다. 인간에게는 자연적이고 미적인 세계만이 아닌, 그 이상에 있는 윤리와 도덕의 세계, 그리고 영의 세계가 함께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죽어도 그런 불의한 일은 안 한다.”라고 할 때, 그는 벌써 윤리적 가치의 세계를 죽음보다 더 높은 선택 기준으로 삼았다는 ‘인간적’인 선언을 한 것이 된다. 우리나라의 사육신이라든지, 서양의 철인 소크라테스의 죽음 같은 것은 이런 부류에 속한 것으로서 죽음이 그들에게 최후의 권세를 부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살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더 큰 삶에 들어간 것이었다. 참인간이기에 할 수 있었고, 참인간이 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인간적인 죽음이었다. 자기 실존의 안전과 자기 인격의 긍지, 또는 자기 보존과 자기 존엄, 이 두 가지 중에서 후자를 택한 인격적인 결단 행위였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은 이런 자연적인 죽음, 인간적인 죽음보다도 더 높은 차원의 죽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죽음이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는 선과 악의 이원적인 대결에서 선을 택했기 때문에 죽은 것만이 아니라, 선과 악, 거룩과 속됨 등의 대립을 초월한 더 높은 차원의 신적인 절대 사랑의 사건으로 죽음을 택한 것이었다. 선한 자와 악한 자에게 함께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몸으로 나타낸 사건으로서의 죽음이었다. 다시 말해서 인간들, 특히 가난한 대중 죄인과 타락자 등 짓밟힌 인간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의 타락된 인간성을 회복시켜 ‘하나님의 형상’으로 환원되게 하기 위한 인간 회복에 필요한 희생제물로서 자기를 몸 그대로 제단에 던진 속죄 행위였다. 이런 죽음은 자기 자신의 죄벌이란 요소가 전혀 포함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덕률 자체를 초월한 절대 사랑의 죽음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 아들’의 죽음이라고 부른다. 이런 죽음은 ‘죽음’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삶으로서의 죽음, 살리는 죽음이라 하겠다. 하나님은 이 속죄 행위로서의 죽음을 옳게 여겨 ‘아담’ 이후 모든 인간들의 죽음의 기록을 지워버리고 죽음이 생명에 삼킨 바 되었다는 부활을 선포했다. 그 결과로 무덤이 열리고 영원한 생명의 아침이 밝아온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인간은 죽는다.”,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한 창세기 첫 아담의 기록으로부터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는 신약성서 둘째 아담 예수의 세기(century)로 옮겨져 사는 것이다. 이것은 새 세기의 탄생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탄생과 함께 ‘세기’도 새로 시작되었다.

이런 논리는 신앙의 논리다. 신약성서 히브리서 11장 1절에 있는 것과 같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 인간이 지금 이 현실에서는 갖고 있지 못하나 ‘약속’된 것이기에 마치 지금 여기서 갖고 있는 실상인 것같이 확신하고 바라며 사는 것이 믿음의 삶이고, 지금은 나타나 보이지 않지만 마치 상속자가 부동산 등기부등본을 손에 쥐고 있는 것같이 확증적으로 사는 것이 믿음의 삶이다. 부활도 이런 신앙의 논리에서 파악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허망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이런 종말적인 인간상의 ‘처음 익은 열매’로 우리에게 실제로 나타나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라고 한다. 당연한 말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죽는 것을 어김없이 목격한 제자들은 실망 낙담하여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과 같이(눅 24:13~35) “우리는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람으로 알았었는데 이제는 다 틀렸다.” 하고 황혼의 탄식에 잠겨 있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생명이 위험하다 하여 여기저기 흩어져 숨도 크게 못쉬고 숨어 있었다. 그러던 그들이 어떻게 이틀 후인 ‘제3일’에 그런 용기로 일어설 수 있었겠는가? 진실로 깜짝 놀랄 무슨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다시 살았다.”는 소문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 자신이 부활한 예수와 만나 대화하고 강의를 듣고 음식을 같이 먹어 도무지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후에 그들이 성전에서 예수의 부활을 선전할 때, 두 번 세 번 잡혀서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어도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다.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은 다시 살리셨다.” 하고 맞섰던 것이다.

시체에 향유라도 발라 드리려고 이슬을 밟으며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고 한 그 부활의 메시지와 함께 기독교는 탄생한 것이다. 초대교회, 로마제국이 기독교 박멸에 미쳐 돌아갈 때에도 신도들은 서로 암호로 연락하며 전 로마 판도의 땅속에 잠입했다. 지금도 땅 아래 로마가 땅 위의 로마보다 더 크다는 카타콤이 여행자를 놀라게 한다. 300년을 지하에서, 지하에 뿌리를 늘이면서 치밀어 떠받치는 생명을 뚜껑으로 덮어낼 재간이 없어서, 로마 황제 콘스탄틴은 덮은 뚜껑을 열기로 했다. 무시무시한 세력으로 자라고 퍼질 거라고 짐작했다. 누르지 못할 바에는 거기에 편승하여 이용당하면서 이용하려 했다.

그래서 313년 콘스탄틴 시대가 등장했다. 교회는 귀족화했다. 귀족은 천대받지 않는다. 귀족은 고생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상징으로 되고 부활한 그리스도는 성직자들의 권위주의에 전용되었다. 십자가는 교회당의 지붕에, 사제의 목에, 묘지의 위패에 장식품으로 미화되었다. 시민 중산층을 배경으로 개혁 기독교가 생겼다. 그러나 신분 사회에서 귀족이 지배하던 것과 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유한 평민이 지배하는 것뿐, 교회는 구태의연한 것이었다. 돈 있는 사람은 천대받지 않는다. 그들은 고생하지 않는다. 천대와 고생을 면하려고 악착같이 돈을 벌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십자가는 상징으로밖에 애용되지 않는다. 고생은 예수가 도매금으로 진 것이지 우리가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저 “예수가 우리 대신 죽어 주셨으니 고맙습니다.”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죗값은 예수가 치렀고, 의(righteousness)는 우리가 차지하니 이런 ‘땡’이 어디 있느냐 한다. 우리가 할 일은, 예수도 좀 우리처럼 버젓하게 살도록 해드리는 것이라 하여 교회당을 장엄하게 짓고, 제단을 으리으리하게 꾸미고, 예배의식도 귀족적으로 거행하고, 의자도 두툼하게 만들고, 될 수 만 있다면 주단(carpet)도 발이 풍덩 빠질 정도로 두껍고 보드랍게 깔자는 것이다. 그리하면 우리가 호화주택을 즐기는 것처럼 예수도 좋아할 것 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구ㆍ신교를 막론하고 진정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 몸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자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역시 예외로 치부된다.

예수의 십자가는 예수의 몸보다 무겁고 육중하다. 예수가 그걸 갖고 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예수가 못박혀 달려야 할 십자가다. 그건 결코 상징이나 노리갯감이 아니며 미술품도 아니다. 무시무시한 죽음이다. 그것은 악마의 세력, 세속, 역사의 불의와 불신앙에 도전하는 결사대의 행진으로서의 십자가다.

그러나 이제 콘스탄틴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포스트 콘스탄틴 시대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것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한다는 외로운 죽음의 씨앗에서 싹트는 부활을 되찾는 시대가 오고 있다는 말이다. 관념이나 상징이나 미술품이 아닌 ‘몸’으로 죽고 사는 역사의 시대다. 이미 세계에는 그것이 와 있다. 소련에, 동유럽에, 북한에, 중국에 와 있다. 서구와 북미에도 다른 양상으로 그것은 오고 있다. 안일주의, 허망한 낙관, 하나님 없는 인간, 탐욕으로 일관된 배금주의(mammonism) 등도 이 기독교를 자기 시녀로 미화하고 있다.

예수의 부활은 역사의 내일을 위한 십자가의 행진에서 그 현실적인 의미가 체득된다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진실한 메시지며, 그것이 제3일의 논리이기도 하다. 서구와 북미에서도 이것을 깨닫고 외치는 예언자 들이 적지 않다. ‘나라와 의’를 위하여 몸으로 역사를 심는 하나하나의 밀알이 사회화한 교회의 오늘의 십자가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마치 예수의 부활한 몸, 변화산상에서의 몸처럼 바탕에서 변혁된 새 역사가 탄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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