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17일 목요일

[0431] 노동의 신학 / 1956년 4월

노동의 신학
(데살로니가전서 2:9~12)


(1956년 4월)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노동은 천역이라고 해서 짐승이나 종이 하는 일이고 사람이 하는 일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노동꾼은 인간 이하로 보았습니다.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적으로 풀이하여 항구한 가치 계열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그의 인간학에서 다루었습니다.

인간은 정신과 육체로 되었는데, “인간의 주체는 정신이며, 따라서 영혼은 육체 없이도 온전히 독립하여 자유할 수 있다. 오히려 육체에서 벗어나면 더 자유롭고 즐겁다. 영혼이 육체 안에 갇혀 있을 동안에는 육체가 자기 욕심대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어쩔 수 없어 고민하고 있었는데, 일단 육체를 벗어나면 육체 때문에 받는 구속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죄의 책임은 육체가 질 것이고 영혼은 무관하다. 사람이 죽을 때, 영혼은 육체의 감옥에서 해방되어 즐겁게 자기 본래의 위치를 회복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람의 사람다운 활동은 정신활동이다. 생각하고 창작하고 철학하고 아름다움의 세계를 소리로, 조각으로, 극으로, 오페라로 표현해 보는 등의 정신문화를 창건하는 것이 참인간으로서의 활동이요, 육체의 노동과 직접 먹을 것 입을 것 등을 얻으려고 땅 파고 집 짓고 지게 지고 길 닦고 하는 따위의 활동은 동물적인 인간 이하의 천민·기민들이나 하는 일이다.” 하고 초연했던 것입니다.

고대 로마를 창건한 건국시조는 농민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폭발적인 정력을 처치할 수 없어서 괭이로 땅을 파고 길을 닦고 집을 짓고 개천을 만들고 성을 쌓고 했습니다. 그들은 피곤을 몰랐습니다. 밤낮 일했습니다. 그들은 노동자 중의 노동자였습니다. 그리하여 한 마을을 건설하면 그 다음에는 칼과 창과 활을 들고 다음 촌락을 정벌합니다. 그들의 칼은 그들의 삽과 곡괭이 못지않게 정력적이었습니다.

이리하여 노동하고 정복하여 마침내 로마를 세웠습니다. 대제국이 그들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사가 되고 왕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딴 나라들을 정복하고 숱한 포로들을 잡아옵니다. 이제부터는 스스로 노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노예들이 다 맡아 합니다. 노동은 노예들에게 시키고 자기들은 귀족이 되고 신이 되어 오직 향락에 즐겁습니다. 그들은 문화인이 되었습니다. 놀고먹는 팔자가 그들 것이었습니다. 결국 로마는 망했습니다.

인도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인도인은 딴 각도에서 비슷한 길을 걸었습니다. 육신은 비실재(maya)라고 해서 참 구원을 위해서는 일찌감치 육정을 해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 세속에서 살다가는 성인(sadhu)이 되어 의식주와 세상사를 위한 번뇌를 벗어나 출가하여 명상과 고행으로 육을 이기는 데서 업(karma)을 멸하고 윤회전생의 고해를 탈출하여 니르바나, 즉 영원한 정적(靜寂)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육신을 위한 노동은 무연중생, 불가촉민이나 하는 일이란 것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육체노동은 천역으로 칩니다. ‘놀고 먹는 상팔자’니 ‘발바닥에 흙 안 묻히고 평생 살 팔자’니 하는 것이 모두 노동 천시에서 나온 속담일 것입니다. 양반은 사랑방에 앉아 글이나 읽고 시를 짓고 고상한 윤리 철학을 논강하고 풍류를 즐기는 것이 제격이라 생각했습니다. 양반 중에서도 문관이 상위요, 육체적인 우수성과 전쟁기술의 연습 등을 본질로 하는 무관은 차위 양반으로 여겼습니다.

서양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받아들여 기독교를 설명하려 한 까닭에 그의 솜씨대로 기독교를 그림으로 그리고 형상으로 조형하고 하였던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이 그 방향이었던 것은 여러 번 언급한 바와 같습니다. 특히 노동에 대한 견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을 답습했습니다.

정신적인 것이 첫째요, 육신은 무익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영혼을 위하여 정신운동에 종사하는 문학인, 예술인, 철학자, 시인 등은 아주 고상한 인간들이며, 특히 종교인과 귀족들은 최고의 인간이고, 농민과 노동자는 최하급의 인간으로 규정지었습니다. 그것이 중세기의 사회질서로 고정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본래의 입장에서 보는 노동의 위치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인간학의 소속입니다. 창세기의 설화에서는 ‘하나님’이 흙으로 인간을 만들고 하나님 자신의 입김(바람)을 불어넣으니 “사람이 산 영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육체와 영혼이 통전되어 한 몸으로서의 인간이 되었다는 말이겠습니다. 여기서 어느 한 편만으로서는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구약성서에서 본다면 육체를 잃은 영혼은 비실재는 아니라도 반(半)실재 정도에 불과한 것이어서 어두컴컴한 저승(Sheol)에 내려가 반의식 상태로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황천(黃泉)이란 말에 해당할 것 같습니다. 구약에서는 또 “조상과 함께 잔다.”고도 했습니다. 그것도 비슷한 생각인데, 조상이란 혈연을 덧붙인 것이겠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는 육신의 부활 없이는 인간성 자체의 완성을 기대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부활사상은 히브리 사상(Hebraism)의 당연한 결론이지만 헬라 사상(Hellenism)에서는 부활의 필요가 없으며 기대하지도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구약성서에서는 육체를 위한 노동, 또는 육체적인 노동을 인간 이하의 천역이라고 제도적으로 경시한 일은 없습니다.

“제7일에는 일하지 말고 쉬어라. 네 가축까지도 쉬게 하라.”고 한 안식일 계명은 노동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노동을 존중히 여겨서였던 것입니다. “너희들이 엿새 동안 부지런히 일하고 제7일에는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일하지 말고 쉬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쉬라’는 단어는 ‘숨을 돌리’는 뜻입니다. 인간고에 대한 하나님의 연민입니다.

타락 이전의 인간, 하나님의 형상 그대로의 아담에게도 낙원에서 놀고 있으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낙원을 가꾸고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즐거운 노동이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즐거움이었습니다. 타락 이후에도 일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그것은 마음에도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기쁨에서가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한 고역이었습니다. 이마에 땀을 흘려야 했습니다. 같은 일을 해도 그 일이 희열보다는 고통을 느끼게 했습니다. 죄인이 감옥에서 일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죄의 벌로서의 노동이었기 때문에 즐겁지 않았던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서도 노동자 농민, 과부와 고아 등을 억울하게 다루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들을 도와주며 존경하여 그들의 인간성에 모욕과 좌절을 갖게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은 솔직하고 강렬한 정의감을 갖고 노동자 농민, 피압박자, 착취당한 자, 천민, 서민 등을 대변했습니다.

예수님도 30년 동안 노동자로 지냈습니다. 목수였다고 생각됩니다만 농사도 해보았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는 30년 동안 묵묵히 일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3년 동안의 선교활동에 있어서도 스스로의 생활을 위하여 노동하지는 않았으나 숱한 병자들과 죄인들과 버림받은 자, 소외당한 자들을 위하여 노동자 이상의 노동을 하셨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 6:27) 하신 말씀들은 결국 노동을 천시한 것이 아닌가 하고 개운찮게 여기는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물적 무신론적인 배경에서 의식주 생활에 제1차적인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에 불과하다 하겠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지금도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는 것이 예수님이 생각하신 노동의 신성이었습니다.

바울도 노동하였습니다. 그는 전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면서도 어느 한 사람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손수 장막 만드는 일과 장막 수선하는 일 등에 종사하면서 자기와 자기 동행자들의 여비와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어쩌다가 교회에서 얼마라도 여비에 보태도록 송금하는 일이 있으면 너무 고마워서 축복에 눈물겨워하였습니다. 그는 자비(自費)선교를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이 자랑을 스스로 포기해야 한다면 차라리 죽는 것을 택할 것이다.” 하고 지사(志士)로서의 면목을 과시하였습니다.

수도승들도 노동했습니다. 트라피스트 종파의 승려들은 ‘무언노동’을 기본적인 수도조건으로 삼았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 특히 개신교회가 이 노동의 전통에 충실했는가? 그렇지 않으면 이교적인 헬라, 로마, 인도 또는 우리나라 양반습성에 추종하고 있는 것인가? 정직하게 자신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교회가 중세기 봉건시대에도 그러했습니다만, 자본주의의 발생과 발전에 따라 산업혁명이 일어났을 때 취한 태도도 그리스도적은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자본주와 노동자가 이익이 상반되었을 때 자본주를 교회의 상좌에 모시고 노동자는 문 밖에 몰아냈습니다. 그 때문에 기독교 안에서의 사회주의 운동, 구세군 운동 같은 것도 생겨났고, 기독교 밖에서의 무신 유물적 공산주의 운동도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교회가 대 사회관계에서 제 구실을 다했었더라면 공산주의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으로 생각 됩니다.

신약성경 야고보서에서는 이런 가시돋친 말을 내뿜었습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에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약 2:2~4) 하였습니다.

기독교가 이 노동의 신학에 있어서 오랫동안 너무나 광범위하게 이교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참다못해서 마르크스를 시켜서 이것을 폭로하고 공산당을 강화하여 기독교회를 때리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회개를 기다리는 사랑의 채찍이라 하겠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 아니 전 세계의 교회가 지금까지의 그릇된 노동관념, 이교적인 인간학을 청산하고 정직하게 노동자 농민의 실생활 속에 들어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십자가 크리스찬 자신의 십자가를 세우려는 이 노동에의 바른 신학과 생활양식을 추진시키지 않는다면 다음 세대를 우리 진영에 이끌어들일 소망이 서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좌든, 우든, 중간이든, 무관심이든, 맘몬이즘이든 어디론가 새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리하면 기독교는 후손 없는 늙은이같이 외로울 것입니다. 맛 잃은 소금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노동자 관심이 한 시대적 정신일 뿐 아니라, 기독교 본래의 모습이란 것을 밝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적 사랑의 공동체 안에 화육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의무며, 당연한 본직이요, 결코 부업이 아닙니다. 그것이 선교활동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폭력 혁명을 예방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속량이요, 숙청이 아닙니다. 너도 살고 나도 사는 생명의 길입니다.

댓글 1개:

  1. 소위 엘리트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노동'이라는 것이 단순무식하게 '몸'을 사용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해서 꺼려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은 천한 것들이나 하는 거야!'

    이것은 고대로부터 머리쓰기 좋아하는... 소위 '잔머리를 굴리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편리함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노동이란 신성한 것이고... 그것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없이 오늘을 맞이한 한국의 교회는 반성하고 반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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