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8일 화요일

[0401] 기독교의 기본문제 - 인간의 종국(베드로후서 3:8-14) - 1955년

기독교의 기본문제


1955년

인간의 종국(베드로후서 3:8-14)

사람의 모든 사위는 ‘살려는 의욕’에서 생겨진 것입니다. 슈바이쳐가 논리의 기반을 ‘생명의 존중’에 둔 것은 그의 실질적인 체험의 소산이라고 합니다. 그가 독목선을 타고 오고웨 강을 올라가며 언덕의 원시림이 연상의 은막에 비친 때 그는 ‘죽음에 포위된 생명!’임을 탄식했습니다. 그리고선 ‘생명의 존중’을 내세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살려는 의욕이 죽음에서 운명적인 패배를 당한다는 것이 과연 의의있는 일일까? 생각하는 사람은 그저 지낼 수 없는 과제일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1) 찰나주의적인 태도가 있습니다. ‘한번에 하나씩’, ‘당장에 좋다고 생각되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 하는 생활 태도, 알지도 못하는 내세를 운위할 것은 없다. 내가 지금 즐길 수 있는 일은 즐기다가 죽음이 오면 죽는 것이요 그 다음 일은 그때 봐야 할 것이다. 하는 태도로 살다 죽는 것입니다. 순 현세주의적인 태도일 것이며 이것이 대다수의 인생철학입니다. (2) 생물학적 영생을 생각해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단세포는 계속하여 유전한다. 지손을 남기고 죽으면 내가 어느 정도 생명적으로 계승된다 하는 점에서 죽음을 이긴 느낌일 것입니다. (3) 그러나 사람이 사람된 것은 ‘세포’가 유전된다는 것쯤으로써 자랑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이상, 인격적 감화가 후세에까지 퍼져가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소원일 것입니다. 그래서 ‘감화의 영생’이라는 것이 생각되는 것입니다. 공자가 죽었으나 그의 감화가 지금도 남아 있다. 그것은 사회의 생명 안에서 계속하여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높은 의미에서 태생이라고 보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감화받는다는 것을 ‘공자’라는 그 실존이 아는지 도대체 그 사후에도 ‘존재’한지를 말하지 못하는 한, 그것은 공자 자신의 현재와는 별개로 생각할 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이 세계는 영존하느냐? 태양이 지구표면에 다가와서 ‘젯트기’ 처럼 획 지나간다면 일순간에 이 지구의 생물은 전멸할 것이라고 생각할 때 생명이란 것은 하염없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하늘이 종이장같이 말려버리고 땅의 체질이 녹아 흐른다”는 오늘 성경본문의 상징적인 표현은 인상적으로 세계자체의 종말을 예고한 것입니다. 이 때에는 모든 인간적인 조작은 ‘만사휴의’라는 탄식만을 남기고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과 역사의 종말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이것도 하느님 관계에서만 규정됩니다. 시편에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해하듯, 내 영혼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아 목마르다!”고 노래한 것이 있습니다만,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을 향하여 갈급합니다. 그것은 거기에만 해결과 안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땅에서 하늘로, 물적인데서 정신적인데로 지향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광물, 식물, 동물, 인간으로 상승한 흔적은 결국 상술한 것을 입증합니다. 그리고 인간자체의 생명으로 볼지라도 어린애 때에는 먹을 것, 놀이개감을 제일 원합니다. 청년이 되면 사업건설의 이상, 배우자, 인격 등을 추구합니다. 좀더 완숙하면 진, 선, 미등 ‘가치’의 세계를 중요시하며 더 나아가서는 종교적인 영원자 영원세계를 찾으려 합니다. 물적인 데서 영적인 데로 생명은 지향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인격궁극의 목표는 물건의 세계가 아니라 정신적, 영적인 세계일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세계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한 것도 이런 의미에서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쉬기까지’는 안식이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화목한다는 것이 생의 지향점이며 사의 극복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누누히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 신앙만이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라고 한다면 그 ‘신앙’ 자체가 곧 종말적인 의의를 가지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내가 세계를 만난다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또는 여러 사람 중 어느 한사람과 만난다는 것과 같이 하나님도 그중의 하나로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절대주권자 앞에 선다는 것, 피조자로서 창조주 앞에, 죄인으로서 지성하신 이 앞에 선다는 것이어서 그 외경의 극치, 즉 철저한 자기부정, 말하자면 ‘죽음’을 가져 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다는 것은 내가 시간에서 영원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내 ‘시간’이란 것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만에서 하는 말입니다. 내가 사흘 후에 죽는다고 가정한다면 내게는 이제 ‘사흘’이라는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끝나면 나는 가진 시간이 없으며 그 포인트가 죽음이며 그 다음에는 영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영원을 만난다는 것은 내가 죽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말에 “하나님을 만나고 살자 누구냐?” 한 것은 깊은 뜻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인데 그것은 생래의 자아에 대해서는 ‘사’(死)의 선고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이기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한 것은 십자가가 하나님을 만나는 ‘포인트’기 때문입니다.

내가 욕심을 중심으로 한 온갖 소유, 아니 나 자신까지도 포기하는 순간, 하나님은 은혜로 나를 받아 다시 살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부터의 나는 ‘죽음’을 앞에 보며 불안과 공포에 떨며 걸어가는 인생이 아니라, 죽음을 뒤에 지내보내고 오직 생명만을 보며 승리자로 영생의 희열에서 생을 영위하는 자가 됩니다. “죽음아 네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하고 개가를 부른 바울의 심경이 곧 이것입니다.

개인뿐 아니라, 역사의 종말도 이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역사 전체로서 하나님 나라를 맞이하려 할때 그 역사전체는 그 앞에서 종말을 고할 것입니다. 전인류의 왜곡된 집단의미, 집단죄악이 하나님의 나라에 전적인 의미에서 반역하는 때에 하나님의 우주적 속량 경륜과 부딪쳐 인간의 나라가 깨어지는 불꽃 속에서 하나님은 그 택하신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인간의 교만이 날로 높아지고 그 범죄상이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호는 의식적으로 모독되고 무시를 당합니다. 한편에서는 혁명의 미명하에 살벌과 잔학이 성행되는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행복의 미명하에 퇴폐와 탐욕이 상규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세기말’적인 위기를 느끼고 있습니다. 홍수직전을 연상합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역사전체로서는 몰라도 각 개인 운명으로서는 ‘하늘이 떠나가고 땅의 체질이 녹아 흘러버리는’,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그 기반에서부터 붕괴되는 것을 느낄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죽음’이라 부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이 빛이 아직도 비치는 동안에 더 견고한 기반, 그 자체 내에 침략할 요소를 내포하지 않는, 말하자면 ‘만세반석’이신 하나님과 정상관계를 수립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야 우리는 설 자리에 선 것이요 죽음이 어쩌지 못하는 영원한 생명에 동참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와 사후문제에 대하여 굉장히 자세한 것까지 미리 알아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라인홀드 니이버가 연유한 바와 같이 어떤 사람은 ‘천당의 기구와 지옥의 온도를 다 조사해 가지고 있는 듯이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쓸데없는 ‘獵奇’(엽기)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생과 사의 주되시는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창조주 하나님의 품안에 안긴 ‘자녀’로서 지내면 그것으로 문제는 다 해결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셨으니 죽음이 우리에게 무슨 권세를 가질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 바울 사원의 故(고) 잉게(Dean Inge)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Heaven is not a far-away place to which we hope to go, but the Presence of God in which we ought live.” 라고.

하나님과 화육하면 거기에 영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께로의 길이 그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그러면 죄와 사망이 권세를 상실합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우리 안에 가지게 됩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