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12일 월요일

[범용기 제6권] (1621) 투쟁의 과녁

[범용기 제6권] (1621) 투쟁의 과녁

[1] 우리의 전투 대상은?

우리가 전투한다면 우리의 “적”은 무엇이며 누구냐?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민주진영에 서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개인 자유를 기점으로 하여 사회와 국가의 정의를 구현하자는 운동입니다. 현재로서는 이것이 가능한 최선의 System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우리 입장에서 투쟁 상태에 있습니다. 그 직접 과녁은 남한에서 독재정치를 민주정치에로 대체시키는 일입니다.

북한의 김일성은 어쩌려느냐? 그는 어떤 부류의 정치를 하고 있느냐? 합니다.

그도 물론 독재자입니다. 독재자 중에서도 “Pro” 독재자입니다. “남한”의 “박”독재는 그에 비하면 Amature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노릇을 제대로 못하도록 그 출발에서부터 “형”(型)에 부어대는 “수단으로서의 인간상” - 제 손으로 꼼짝도 못하는 “구리 이순신” 식의 “주조인간”(鑄造人間)으로 되게 하는 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적이 이에 국한된 “협의”의 대상이라면 오히려 쉽게 파악할 수도 있겠고, 그 과녁도 연습만 잘하면 명중률을 높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박” 자신은 그 배후 조종사인, 다국적 기업체의 작은 괴뢰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전투의 과녁은 복잡해지고 현혹되어 맞히기 어렵고 그 전술도 국지전에서 세계전에로 전개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고 당나귀처럼 가만히 서서 이리떼에게 자기 살을 뜯어 먹게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어떻게든 싸워야 합니다. 싸움에는 전술이 서야 하고 “무기”도 있어야 합니다. 여름 우등불에 날아 들어 타 죽는 나비들이 되어서는 안되겠단 말입니다.

[2] 전략의 서장

(1) 인화(人和) 문제 – 싸움에 이기려면 하늘이 주는 “때”, 즉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용해야 하고, 그보다도 방어와 전공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가져야 하고,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인간조건인데 국민이 화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맹자”의 교훈입니다. (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 전 국민이 자발적으로 화합하여 “일심동체”로 전투에 임하는 것이 으뜸가는 전략이란 말입니다.

(2) 기회의 문제 - 기회는 언제든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자기는 한결같이 복음증거에 매진한다고 했습니다.

“기회”는 밖으로부터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것만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기회는 자기가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자기 손으로 만들어 낸 기회가 미리부터 준비돼 있지 않으면 기회가 와도 덤덤하다가 놓치게 되기 쉽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기회가 와도 그걸 모르고 있게도 되고 어쩔 줄 몰라 혼란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우리 민주운동도 기회가 속히 오지 않는다고 좌절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기회를 만들기 위하여 장기적인 설계가 서야 하겠단 말입니다.

나는 L.A.에서의 강연에서 “장기전을 각오하라”고 했었는데, 좌담회 석상에서 상당히 많은 반발이 들어왔습니다. 가령 장기화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공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대적은 오래잖아 넘어간다. 승리는 최후 5분에 결정된다. 더욱 분투하라” 하고 사기를 돋궈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만중이 따르지, 오래 간다면 모두 체념하고 전선에서 도망하여 집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말하는 “장기전”이란 것은 다만 시간의 “길이”를 말한 것이 아니라, 우리 행동이 Ad Hoc적인 조건반사적 형태가 아니고 상수리 나무가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세월이 갈수록 더 강하게 자라서 아무도 감히 흔들지 못할 거목으로 정립되게 하자는 말이라고 해두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 방향에서 기원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3] 국내, 국외 문제

국내의 민주운동은 긴박하여 고난이 동반합니다. 따라서 “종교적”으로 농도가 짙어집니다.

그러나 국외의 민주운동은 그렇게 “긴박”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들의 신앙과 양심에 따라 “옳다”, “그러다”를 말하고 거기에 따르는 결과는 하느님께 맡긴다는 다소 “유연”한 태도입니다. 이 말을 들은 어떤 미국인사는 “Beautiful!”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경우에서의 “Beautiful”이란 “순진하다”든지, 사춘기의 감상적 사고라든지에 통하는 일종의 빈정댐이 아닌가 싶어졌습니다.

말하자면 - “전투”는 Beautiful한 것이 아니고 “냉혹”한 것입니다. “박정권”은 무자비한 폭력정치를 불도저같이 밀고 나갑니다. 그와 맞서 싸운다는 것은 Sentimentalism일 수가 없습니다.

“삼선개헌반대 범 국민투쟁위원회” 때, 교회측에서는 특히 최대 교파인 예장측에서는 아무 응답도 없었습니다.

그 이름부터 맘에 안든다고 했습니다.

“투쟁”이란 말이 기독교적이 아니라고 합니다. 교회인은 “비둘기” 같이 평화적이고 온유해야지 “투쟁”이 다 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비둘기도 제 보금자리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무겁게 싸우는 것을 나는 목격했습니다. 어쨌든, 비둘기 같은 교회는 Beautiful하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나는 국내 투사들이 Beautiful하고 감상주의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국내 수난 성직자들과 학생, 청년들이 그 지긋지긋한 고문과 투옥과 죽음을 눈 앞에 보면서도 흔들림 없이 자유전선에 나서는 엄숙하고 순교자적인 Sentiment를 아낌없이 찬하합니다. 나는 세계 어디로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자랑”하기를 서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국내 동지들의 국외 동지들에 대한 태도에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국외 민주운동에 대한 “과소평가”를 삼가야 한다는 그것입니다.

“풍요사회”에서의 불진실한 “유희”라든지, 일종의 “부업행위”라든지, “체면유지책”이라든지 하는 비판은 “자학행위”란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요는 국내, 국외가 공동전선을 구체적으로 결성하고 Overall한 Strategy를 세워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공인된 작전에 의하여, 피차 양해와 신뢰와 협동으로 한 가지 목적 달성에 행군해야 하겠습니다.

[4] 기관지가 필요합니다.

동지의식을 고위하고 일관된 활동을 추진하며 계몽과 훈련과 회담과 격려와 공적인 “체킹”을 진행시키려면 기관지 간행이 절대 필요합니다. “체킹”이란 것이 반드시 법적인 징계, 처벌 등은 아니라 하더라도 계통과 일체감 조장과 재료제공과 평론 등 언론교류의 역할은 맡아줘야 하겠습니다. Communication이 활발해야 합니다. 우리 몸에서 혈액순환이 거침없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본인은 삼선개헌반대 때, 박정희 씨가 제2의 궐내 쿠데타를 감행한 것을 보고, 이제는 장기전을 벌일 밖에 없다고 단정했습니다.

그래서 투쟁위원회 중앙위원회를 긴급소집하고 후원회의 해산을 선언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장기 투쟁으로 들어간다고 공포했습니다.

그리고 “제3일”이란 월간지를 시작했습니다.

그 주장은 “교회의 사회화와 국민의 민주화”란 타원형적인 성격의 것이었습니다.

처음 호는 800부를 찍어냈습니다만 차츰 붓수가 늘어서 다음 호는 1000부, 4년후에는 4천부를 냈습니다. 주로 “기장” 교회 지도자들에게 보냈습니다만, 다른 교파에도 퍼졌고 사회민주인사와 학교의 교수와 학생들에게도 골고루 퍼졌습니다.

전라도 대도해로부터 강원도 산골까지 안 가는 데가 별로 없었습니다.

1974년 3월에 등록이 취소되고 지형도 압수되었는데 4월호는 그때 인쇄중이었기에 인쇄소에서 독자들에게 흘러나와 동인들 손에 들어가기도 했답니다. 그것이 마감이었습니다.

내가 3월 하순에 북미주에 건너오자, 국내동인들이 국외에서라도 속간하라고 요청해 왔기에 지금 속간 제10호, 통권 54호를 냈습니다.

초라한 간행물이지만 국내 민주운동의 공동전선 조성에 작은 공헌이라도 되었다고 자부합니다.

목사들은 교인을 사회화하고 교수는 학생을 사회화화고 지성인은 민중을 사회화해야 합니다.

목사들이 교인을 역사에서 유리시켜, 내세소망에만 풍선처럼 부풀게 한다든지, 교수가 학생에게 상아탑이나 쌓아 올리는 것으로 만족하게 한다든지 하는 것은 발이 땅에 닿지 않는 “인간유성”을 만드는 것입니다. 지구의 중력 때문에 오래잖아 떨어지고야 할 것인데 그 떨어짐이 대단할 것입니다.

이런 주장은 한국에서만 문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도 문제되야하고 전세계 교회로서도 “사활” 문제라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3일”은 여기서도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됩니다.

역사의식에서 유리된 교인들에게서는 가장 중요한 “화제”가 소실됩니다. 서로 만나도 계속될 얘깃거리가 없어집니다. 극상했자 교리논쟁이나 이기적 기복요망 정도일 것입니다.

일반사회인에게서 정치담이 사라지면, 음담패설이나 취중잡가가 고작일 것입니다. 역사관계에 있어서 교환인들은 “정교분리”라는 신화에 둔갑하여 자기류의 신성에도 취하거나 “위장성역”에 안주하는 일이 많습니다. 종교적 이기주의가 넘칩니다. 계몽이 시급합니다.

[5] 우리의 대 이북문제

우리의 남ㆍ북통일 문제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느냐 하는 실제문제에 봉착합니다. 거기에는!

(1) 이념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2) 단일민족이라는 감정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전개시켜서 설득선까지 밀어 올리느냐? 가 문제입니다. 여기서 민족과 문화는 숙명적으로 유착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 민족 문화의 공동 발굴과 공동 연구, 그리고 무엇보다도 “ism”의 우상을 파괴하고 “인간애”를 서로 나누는 노력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통일문제에 있어서 “선민주 후통일”, “선통일 후민주”, 통일과 민주 동시에 진행 등등의 논란이 있어왔던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만, 어느 하나도 구체적인 실현성이 확인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강대국들의 손에 쥐어진 “주사위” 노릇을 할 밖에 없는 “남”과 “북”이기 때문입니다.

근자에 “키신저”는 미ㆍ중ㆍ남한ㆍ북한 4자회담을 제의했다고 합니다만 그것은 결국 정치적으로 “분단”을 항구화 하자는 의도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선통일 후민주”라면 다짜고짜로 공산통일을 연상시킵니다. “연방제”라는 안은 이북에서 나온 독단 제안인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박정희 씨는 자기 집권의 약화에 대한 공포와 이북에 대한 패배의식 때문에 오히려 자기가 만든 조개껍질 속에 농성하는 것을 택합니다.

[6] 남한에서의 외자문제

민심을 잃고 권력을 유지하려면 구루마를 옆으로 미는 것과 같아서 제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순리로 안되는 것을 기어코 밀고 나가려면 숱한 노동력을 사야 하고 따라서 돈이 무척 밀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박”은 외자도입과 외세영합으로 “공동”을 메꿔 보려고 했습니다.

미ㆍ일 투자에 벌거벗고 그 몸에 제공합니다.

그랬기에 “박”은 “걸푸” 석유회사의 시중꾼 밖에 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실정을 보도했대서 “동아”의 이부영 기자는 “유언비어” 죄로 8년 징역에 처해졌다고 합니다. 지금 박정희 치하의 감옥 안 인구는 5만 5천명이라고 했습니다. (Nation 4월 10일 기사) 4백명의 교수가 파직되고 1천명의 학생이 감옥에 삽니다. 시인 김지하는 종신징역이랍니다.

3ㆍ1절 민주구국선언 사건에 동참한 김대중 등 12명의 목사, 사제, 교수 등은 감옥에 있습니다.

“새마을” 운동을 해서 농촌을 갱생시킨다고 하는데 어떤 면에서는 잘 된 것도 없지 않습니다만, 농민들은 매호당 3만원 이상의 생빚을 지게 됐다고 합니다. 도시에 있어서도 최저생활비가 다섯 식구 한 집에 매달 $113-인데 54%가 이 액수의 “반”도 못번다고 합니다.

노동자의 쟁의권도 없어졌습니다. 노동 예비역으로 대기 중에 있는 사람이 5백만인데 1백만이 실직자고 1백만이 불완전 고용인이고, 2백만에서 3백만 가량이 “기농상경자”(棄農上京者)라 합니다. 그 대신 “외자주”(外資主)들은 평가절하 또는 갖가지 Loophole들을 이용하여 그들의 투자총액과 거의 맞먹는 9억 딸러의 순이익을 거둬갔다는 것입니다.

배후에서 다국적기업이 잔치를 벌이고 있다는 것은 위에서도 언급한 대로입니다만, 이 “마몬” 신에 굴복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 “의”를 구하며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가 우리의 근본문제로 부각됩니다.

[7] 투쟁의 방법론은

지금까지 우리는 비폭력ㆍ불타협 방법을 지켜왔습니다. 물론 이것이 100% 그러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당면하는 상황에 따라 지가방위의 수단으로 어느 정도 폭력을 행사한 경우는 언제나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종의 “상황윤리”였습니다.

3ㆍ1운동도 비폭력ㆍ불타협으로 시작하였습니다만, 자연발생적인 폭력행위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해외독립군 활동이라든지, 훨씬 그 전의 이등박문을 총살한 안중근 씨라든지에 대하여 국민은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4ㆍ19의 경우에도 비폭력ㆍ불타협 원칙을 들고 나왔습니다만, 경찰의 폭행에 맞서서 투석전을 벌였습니다.

5ㆍ16은 “자유민주”를 말살하고, 일제, 이승만 아래의 독재를 확립하기 위한, 철두철미의 폭력행위였으니까 폭력으로 항거할 밖에 도리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한국의 비상사태 뒤에는 언제나 미국의 손이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을 상정할 때, 그 거대한 “힘”에 응전하려면, 저절로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속담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미국과 소련이 군사적 경쟁자니 만큼, 미국은 남한에 군사지기를 가져야 하겠고, 일본을 자기 진영 안에 안아 두기 위해서 일본에 경제수단을 제공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박정희 씨는 미국을 좋아하는 축이 아니었습니다만, 자기의 권력유지를 위해서는 미국의 비위를 건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종주국적인 권력구조와 박정권의 위성국적인 권력구조가 서로 안고 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거대한 “권력악”입니다. 이 권력악이 일인독재라는 “박”의 성채 속에 농성하고 있습니다. “체제악”입니다. Liberalism 정도로서는 함락시킬 수 없는 “성채”라 하겠습니다.

체제 자체를 공격할 밖에 없습니다. 체제변혁이란 것은 일종의 Revolution입니다.

Revolution Without Violence란 것은 그야말로 Beautiful합니다. 그러나 소기의 성과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냉혹한 실전”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나 자신도 Beautiful한 “낭만파”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본국에 돌아가 젊은 수난 동지들 곁에나 앉아 있기를 기대해 보기도 합니다. 함석헌 옹도 낭만시인입니다. 그는 자기를 “하느님의 발 끝에 채여 굴러가는 뽈”이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하느님이 좀 더 힘차게 차서 감옥에까지 굴러가게 했는가 했더니 어중간한 데서 ‘뽈’이 또 멈추고 말았다”고 투정을 부리기도 합니다. 그 논법대로 한다면 나는 하느님이 기껏차서 바다건너에까지 굴러온 “뽈”이 아닌가 싶어집니다. 어쨌든, 이런 경우에 우리는 각기 그 있는 고장에서 최선을 다할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개별격파를 당하지 않기 위하여는 국내 국외를 “일체화”한 세계전선이 형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비전” 실현을 위한 “방법”도 유동적일 밖에 없습니다. 가령 독일의 “본 훼퍼”의 경우로 보더라도 히틀러 한 사람이 하루를 더 산다는 댓가로 무죄한 Dissenter들이 수천, 수만 단위로 학살된다는 사실을 어떻게 윤리적으로 평가하느냐 하는 의문이 그의 초조한 행동을 촉구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Theorize할 여유를 즐길 여가자, 낭비자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으면 한 바가지 물이라도 빨리 떠다 붓는 사람이 바른 사람일 것입니다.

어떤 Alternative가 반드시 없지는 않았을 성 싶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다른 길을 택할 여유는 없었습니다. 십자가의 길이란 원래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결국 냉혹한 Reality였던 연합국의 세계전선이 히틀러를 밀어내고 독일을 그 마수에서 해방시켰습니다.

한국의 “일제”에서의 해방도 비슷한 노정을 걸었습니다.

우리는 후자의 경우에도 “심판과 갱신”이라는 하느님의 뜻이 작용했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런 예증에서 Violence가 하느님의 수단으로 선용됐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Violence든 Violence가 아니든 간에 우리 민주운동에서 크리스찬 윤리가 제외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행동에서는 기독교 윤리적인 Justification이 언제나 신중히 검토되어야 합니다.

구체적인 방법론에 있어서는 아주 다양한 제안들이 나올 것입니다.

(1) 사회화, 현실화에 필수조건인 “참여의식”이 강화되어야 하겠습니다.

앞뒤를 재며 추리와 추측에서 심오한 이론을 전망하는 것을 실제 운동에의 참여에 대체시킬 수는 없습니다.

행동자들을 냉소하면서 자기들을 “고차적”이라고 자긍하는 태도는 삼가야 하겠습니다.

“너희가 떠든다고 무어 될 줄 아느냐?”, “입 닥쳐!” 하는 식의 경고는 “오만”이 아니면 “기법”의 “사생아”일 것입니다. 사사건건 동참은 못하더라도 격려는 해 줘야 할 것입니다.

3ㆍ1운동 때 수백만이 “데모”에 참여했다는 사실, 4ㆍ19 때 교수와 학생이 한 데모 대열에 참여했다는 것, “매스콤”이 그 극성스러운 검열 속에서도 민주운동 보도에 협동했다는 것 등을 국민은 높이 찬탄하고 감사했습니다.

(2) 침투작전 – 군, 정부, 여당, CIA 등 기관에 침투하여 실정을 파악해야 하겠습니다.

C.I.A.는 인간의 약점을 잘 이용합니다. 인간은 돈, 색, 지위 등 유혹에 약하다는 심리를 노립니다. 우리도 좀더 Smart해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3) 대중 앞에서는 “장기”를 “단기화”하자고 외쳐야 하겠습니다. “기간”이란 것은 우리의 작전과 업적에 따라 신축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4) News 침투가 다양하고 다채로워야 하겠습니다.

알지 못하는 사람, 알고 싶지 않다는 사람이 대다수입니다. 선전이 절대 필요합니다.

(5) 세계적인 Councel형의 Coalition이 형성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행동통일이 가능해야 합니다. 임시정부 설도 종종 듣습니다만, 일제 시대와 달라서 잘하나 못하나 “우리 정부”가 있는 한, 또 하나의 정부는 문제해결 보다도 문제를 더 복잡하게 하는 것이며 우리의 충성 대상에도 분열을 조장하게 될 것 같습니다.

(6) 교회의 반독재, 민주사상이 신앙과 신조에서 “본분”으로 선포될 필요가 있습니다. 신학적인 Justification은 착착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7) 학자들의 민주활동 이론과 남북통일안과 세계 정책과의 연대운동이 강화 “주지”되어야 하겠습니다.

(8) 자금조달이 활발해야 하겠습니다. 실업인의 돈벌기 동기와 목적이 이 운동을 위한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1976년 5월
성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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