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9일 금요일

[범용기 제6권] (1620) 교회의 본 모습

[범용기 제6권] (1620) 교회의 본 모습

독일의 “히틀러”가 연합군에 의하여 타도된 다음에 독일교회는 회개와 재건의 길을 걸었습니다. 말하자면 원점에 돌아가 첨부터 다시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교회는 둘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하나는 “독일교회”란 이름으로 히틀러의 산하에서 그의 명령에 순종한 “교회”였고, 또 하나는 “고백교회”라는 이름의 교회여서 “니물러”와 그의 동지 교역자 몇천명이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감옥에 간 교회들이었습니다. 그중에는 “침묵의 다수”라는 제3의 회색지대가 있었지만 그건 참여자도 수난자도 아닌, 그러나 참여자도 수난자도 되려면 될 수 있는 중간지대 인간들이었다고 하겠습니다. 가면극의 선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영광은 없습니다. “인간”될 기회는 있었으나 “인간”될 용기는 없었습니다. 달걀로 말한다면 “썩은 달걀”에 가까운 못먹을 달걀이었을지 모릅니다.

감옥교회의 “주역”이었던 “니물러”도 히틀러 밑에서 해군으로 근무했었다는 기록이 드러나자 연합국 측에서의 신망이 다소 퇴색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가 “히틀러”에게 항거한 것은 히틀러의 광적인 유태인 학살 때문이었고 히틀러 정권 자체의 악마적인 독재에 정면 대결한 것은 아니었다는 평도 있었답니다. 그러나 그가 옥중에서 예배를 인도할 때 설교를 준비할 필요가 없었고 그 주일 동안에 히틀러가 저지른 일을 비판하면 그것이 그대로 설교가 되더라는 그의 고백은 그의 인격적 진실성을 자증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상에 완전한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바울의 말을 읽는다면, 가혹한 평도 삼가야 할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연합국 측에 있어서도 교회가 자신의 독자성을 생각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조급스레 전쟁행위에 타협했다는 점에서 맛 잃은 소금이 되었다는 비판을 듣게 되기도 했습니다.

제2차 대전 중 일본은 히틀러 독재정권 꽁무니에 편승하였기 때문에 히틀러가 “유럽”을 석권한 것 같이 일본은 동양을 삼킨다고 경망을 떨었습니다.

그러나 뱀이 토끼를 통째로 삼킬 수는 있어도 “황소”를 삼킬 만큼 배가 굵을 수는 없습니다. 삼킬 수도 없거니와 삼켰다 해도 배가 터져 죽을 것입니다.

일본은 중국과 미국을 삼킬만한 “뱀”은 못됩니다. 그래서 결국 원자탄 때문에 배가 터졌습니다.

일본이 만주, 중국, 동남아를 마구 삼킬 때, 일본 교회는 어떠했습니까? 무조건 협력했스니다. 시키는 대로 시녀 노릇을 했습니다.

“천조대신”이 더 높으냐 “하느님”이 더 높으냐 하고 물을 때 그들은 용감하게 자기 신앙을 고백하지 못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일본교회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앞잡이 노릇도 하고, 심부름꾼 노릇도 하고, “위안부” 모집에 협력도 하고, “무운장구”를 빌기도 하고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교회”로서의 양심은 마비되었습니다. “한국교회”도 비슷했습니다만, 그것이 더 가혹한 일본총독정치의 압력 때문이었다는 것 때문에 용서받을 여백은 좀 더 넓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전세는 급전직하여 일본 천황은 맥아더 장군 앞에서 무조건 항복했습니다. 이제는 “원점”에서부터 재출발할 밖에 없이 되었습니다. “재출발”은 “회개”란 좁은 문을 통과합니다. 그런데 일본이 회개했다는 “증거”는 없다고들 합니다.

일본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일교회에서처럼 회개운동이 일어났다는 말은 들리지 않습니다.

3ㆍ1운동 때 주일날 수원 제암리교회 예배자 전원을 학살한 일본 군벌의 만행에 대하여 해방 후 일본교회가 대표자를 보내어 사과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교회가 일본 군벌과 한몸이 되었다는 증거 밖에 남기지 못했습니다.

1945년 해방 직후 일본 군벌 정부가 무너짐과 아울러 총리대신 도오죠오가 전쟁 책임자로 처형된 때, 전쟁협력자였던 일본 교회는 머리 둘 곳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 군벌의 침략정치를 반대하고 신앙양심에 충실하기 위하여 감옥살이를 택하거나 예비검속을 당했던 무교회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국민들 앞에 존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교회에는 교회로서의 독특한 바탕이 있고 위치가 있고 “메시지”가 있고 맛이 있고 위신이 있습니다. 그 중 어느 하나를 잃으면 다른 모든 것도 뒤따라 잃어집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밖에 버려져 발에 밟힙니다. 등잔에 불이 꺼지면 온 방에 암흑만 남습니다.

그러면 교회의 본 바탕, 그 맛이 무어냐? 하고 물을 것입니다.

사도신경에 짤막한 교회관이 쓰여져 있습니다.

“거룩한 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사오며……”한 구절입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는 것은 Christian Fellowship을 의미합니다. Fellowship은 “사랑의 사귐”입니다.

전통적인 카톨릭 교회에서는 Una Sancta, Catholica, Apostolica란 네 단어로 교회를 규정합니다.

“Una”란 “하나”란 말이니까 “몸”이 하나인 것과 같이 교회는 유기체적인 한몸이다 하는 것입니다.

“Sancta”는 거룩하다는 말이고, “Catholica”는 보편적, “세계적”이란 뜻이고 “Apostolica”는 “사도전승적”이란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성도” 즉 크리스찬의 친교를 생명의 혈맥으로 한 사도들로부터 전해받은, 세계적, 거룩한 한몸이란 것입니다.

바울의 말과 같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그리스도의 몸이 산산조각으로 찢어질 수는 없습니다.

현존한 교회는 “로마 카톨릭”과 “그릭 정통교회”와 “푸로테스탄트”의 셋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한몸”이라기에는 어렵게 되었습니다. 각기 자기 교파 안에서의 “친교”는 있습니다만, 타교파와는 일체감이 거의 없습니다. 제각기 “외로운 섬”입니다. 물론, 변천하는 역사 속에서 2천년을 살아오노라면 그때 그때의 선교적, 사상적 필요에 의하여 역사 정황과의 타협 또는 적응을 안할 수 없었을 것은 사실입니다. 그 중에서도 자유교회는 각 개인의 신앙양심의 자유를 생명으로 하느니만큼, 양심대로 말하고 증거하고 대답하는 사이에 저절로 딴 그룹이 형성됩니다. 그러나 최악의 경우가 아닌 한, 스스로 기성교회에서 갈라 서기까지는 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성교회에서는 자신들의 기독교권에 위협을 느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교권으로 탄압하고 처벌하고 어떤 경우에는 축출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개인이 아니라, 집단인 경우에는 축출된 집단이 자기들 양심과 신념에 따라 따로 모입니다. 얼마 지나면 새 교파가 하나 생깁니다. 신학도 강조점이 달라지고, 신조, 예배의식, 교회형태, 생활양식 등도 얼마씩 다르게 됩니다. 이제 와서 다시 합하려면 피차 어색하고 생소하게 됩니다.

국가 지상주의가 고조될 시대에는 교회도 국가별로 분립됐습니다. 그러나 뜻있는 기독자들과 교회지도자들 중에는 “교회”의 본 모습이 그렇게까지 조무래길 수가 있겠는가 싶어 교회의 세계적 일치를 탐색하고 갈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에큐메니칼” 운동이 일어나고 세계교회협의체(World Councel of Churches – W.C.C)가 생겨났습니다. 교파가 다르고, 나라가 다르고, 예배 의식이 다르고, 어느 정도 신학체계도 다르고, 신자의 생활양식도 다르다 하더라도 그것은 한몸의 “지체”가 각기 맡은 기능(Function)이 다른 것 뿐이오, 몸 전체가 갈라진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교회는 역시 “하나” - Una라는 것입니다.

(2) Sancta – 교회는 거룩하다 합니다. “거룩”이란 것은 “속되다”는 것과 대립되는 개념입니다. “거룩”에는 “분리”한다는 뜻이 품겨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거룩”이 “사랑”의 Dynamics를 갖고 있지 않을 경우에는 냉혹한 율법주의적 금단과 처형을 강화하게 됩니다. 그리고 위선과 형식주의로 화장합니다. 미국의 청교도들에게도 그런 형식주의가 늘어났습니다. 한국교회 보수파(Fundamentalist) 중에서도 그런 증상이 드러났습니다.

“세속”은 더럽고 부정하고, 죄 투성이고, 썩었는데, “성별”된 교회의 목사나 장로나 교인이 어찌 거지 섞일 수 있느냐 하고 낯을 길다랗게 내리 쏟으며, 못본 체 도도합니다.

“거룩”이란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나면서부터의 “인간”은 거룩한 것도 아니요, 거룩하게 된 것도 아니요, 거룩하게 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는 거룩하다”하고 선고함으로써만 거룩하게 일컬어진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칭의”, 영어로 Justification이라고 했습니다. 진짜 “의인”은 아닌데, 의인 대접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신자”가 세속을 더럽다 하는 것은 인간교만의 소산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하나님의 세계인데 인간이 감히 더럽다 할 수 있겠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이 “대단히 좋다” 하신 것을 사람이 “더럽다”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다는 인간을 어떻게 더럽다 하고 차별, 배척, 기계화, 금수화할 수 있겠습니까? 세속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다 거룩합니다. 다만 그 거룩을 “세속”이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것 뿐입니다. 인간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인간이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뿐입니다. 신자는 그런 점에서 계몽돼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기 자신이 거룩을 쟁취했다는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신 것을 사람이 속되다 하지 말지니라”(사도행전 10:9~16)한 말씀을 기억할 것입니다. 신자는 “세속”에 내포된 하나님의 거룩을 인정하고 그것을 세속에 증언할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3) 교회는 보편적이다 하는 “Catholica”에 있어서는 위에서 “Una”를 풀이할 때에 이미 언급한 바입니다만, 다시 말한다면 – 교회는 어떤 개인이나, 정치 권력이나, 경제 특권자나, 어떤 사회구조나, 정치구조 즉 국가나에 그 존재와 운명이 예속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나 교회의 한 “교구”(敎區)라는 것입니다. “선교자”란 것은 선진국 교회가 후진국 백성들에게 베푸는 “구제품 배급자”, “시혜자”(施惠者)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진국이고 후진국이고 간에 교회는 그런 경계선과 국경선을 넘어서 세계적인 공동체기 때문에, “세계적”이 되지 않고서는 “교회”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교회되기 위한 본질적인 “본분”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Catholica란 것은 로마 카톨릭교회에 국한된 의미가 아닙니다. 사도신경은 로마 카톨릭 교회보다 거의 2세기 전에 채택된 신조입니다. 요는 신교나 구교나 그 밖에 “교회”로 이름된 역사적인 기독교파는 모두 세계적인 공동체 안에 포옹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4) 사도전승적 “Apostolica”란 것은 위에서도 잠시 언급한 것입니다만, 예수님이 남긴 “자서전”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려면 제자들이 듣고 본 것을 기록한 사도들의 증언을 권위로 받을 밖에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지성인”, “교양인”인 바울의 “교회”에 보낸 서한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됐습니다.

이런 문서도 각양각색이었지만 교회 지도자들이 엄밀공정한 심사를 거쳐서 “경전”(Canonize)이 됐습니다. 그 “경전”으로서의 표준 조건은 사도들로부터 전해졌다는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전승”은 성경의 권위와 교회의 권위를 규정짓는 유일한 표준이었습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카톨릭이나 개신교나 마찬가지입니다. 카톨릭은 구조적인 전승에 치중하고 개신교는 “메시지”에 치중한 것이 다르다면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몸의 분열이 아니라 직책의 분업이라 하겠습니다. 둘다 Ecumenical입니다. 세계적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어떠합니까?

독일의 국가교회 편입니까, 고백교회 편입니까? 이승만 정권 시대나 군사정권 시대나 한국교회가 “고백교회” 편이었다고 자랑할 염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독일에서처럼 전후 회개 운동이라도 본격적으로 일으켰느냐 하면 그런 것 같지도 않습니다.

물론 부흥회는 유례 없이 많았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만, 각 개인을 “교회” 안에 낚아들이는 운동이요, 책임적인 사회참여나, 정의사회 건설 운동에의 ‘출사표’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독재정권이 심판 받을 때에는 “공범자”로 법정에 서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은 고소하는 원고인과 함께 법정에 가는 도중에 있다고 보겠습니다. “길에서 얼른 그와 화해하라.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한 푼까지도 깔축 없이 배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하고 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마태 5:24-26).

한국교회는 심판대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교회로 교회되게 하는” 시발점에서부터 다시 걸어야 할 것입니다.

1975년 10월 26일
시카고 제일감리교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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