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22일 월요일

[범용기 제5권] (133) 輓章文記(만장문기) - 전태형(全台亨)

[범용기 제5권] (133) 輓章文記(만장문기) - 전태형(全台亨)

1972년쯤이던가, 하루는 수유리 내 장막에 한 청년이 찾아왔다. 그는 ‘전태형’이라 한다. ‘숭실전문’ 출신이고 자기 집 근처 교회에 나가긴 하지만 그 교회에 출석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그 교회는 독립교회인데 제직을 뽑아 각기 교회의 행정부서를 분담하게 하는 일도 없다는 것이다.

“‘연보’ 같은 것도 그 액수가 계산되기도 전에 목사 부인이 가져가 버립니다. 우리 교회는 목사의 상점이지 하나님의 교회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목사는 신학도 제대로 공부한 일이 없고 성경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치기 부흥집회에서 목사가 됐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자네 한 사람 뿐인가?”

“같은 신앙동지 너댓 가정 있습니다. 저의 가정도 아내와 사내 자식 셋입니다. 제 아내는 약제사입니다.”

“그런대로 그 교회에 있어보게 그려! 목사가 그런 사람이라면 다른 교인들도 싫어할 것 아닌가!”

“그건 안됩니다. 목사는 벌써 우리를 내쫓고 다른 교인들을 매수하는 공작을 진행하고 있는걸요! 그리고 저희는 기장교회를 세우고 싶습니다. 목사님 도와 주십시오.”

그는 그 후에도 여러번 수유리에 찾아와서 정황보고도 하고 ‘카운셀링’도 청하곤 했었다.

더운 여름도 거의 다 가려는 어느날 그는 강원도 영월읍까지 소풍이나 가자고 한다. 일행은 그와 김종대와 나 셋이었던 것 같다. ‘뻐스’ 여행이다.

우리는 떠났다. 캐나다 연합교회에서 창설한 원주 기독병원을 견학하고 그 길로 강원도 산골로 들어가는 것이다.

한강 상류인 얕은 강 가에 왔다. 소낙비가 함박으로 퍼붓는다. 우리는 ‘풀’(Glue Stick) 같이 질척이는 진흙 오솔길을 맨발로 걸어서 강가 어느 정자처럼 된 여관에 들어갔다. 점심을 시켜 먹었다. 배 고파서라기보다는 여관집에 오래 앉는 것이 미안해서였다. 비 멋기를 기다린다. 산비(山雨)라 바닷물결처럼 波狀(파장)으로 밀려온다.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우리는 알몸에 잠뱅이만 걸치고 빗속을 뛰었다. 찬 빗발이 알몸을 때려 온 몸이 떨린다. 한참 모래사장을 달려 강물에 뛰어들었다. 물 속은 바깥보다 따스하다. 저쪽 언덕은 절벽이다. 나는 중국 문장가들이 시화(詩化)한 ‘적벽’을 연상했다.

절벽에는 가담 가담 새파란 이끼가 붙어 산다. 몸을 비튼 소나무도 깎아 세운 절벽에 뿌리를 박고 투쟁한다. 큰 버스도 따라와서 도선(渡船)에 실려 건넌다. 우리는 버스에 실려 아흔아홉 꼬불한 고갯길을 올라간다. 이 정도면 무던히 높이 올랐으리라 싶어 뒤를 내려다 본다. 뱀처럼 꼬불거리기만한 하얀 노선이 제자리걸음이나 다름없다. 길은 포장없는 단선 길이다. 저쪽에서 오는 버스가 있으면 우리는 비켜서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먼지가 구름같다. 올라가는 버스도 우리 것만이 아니었다. 우리 버스가 선두에 서며는 먼지를 덜 먹는다. 그러나 그런 특권은 어쩌다 오는 행운이다.

앞에 버스가 휘저어 일으킨 황토가루가 우리 얼굴에 퍼부어진다. 황토 얼굴이다.

한탄강(?)은 가파로운 산과 산 사이에 끼어 가득하다. 그 옆에는 사람 하나 다닐 오솔길도 없는 것 같았다.

우리는 정상에 올랐다. 이제부터는 내리막이다. 우리의 앞을 달리는 버스도 없다.

‘정선’읍이 가마솟 밑굽같이 평화스레 앉아 있다. 모두 기와집이고 한탄강(?)이 옆을 둘렀다. 그리고 저쪽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맑고 큰 강물이 저쪽 변두리를 감쌌다. 요충지대의 대읍임에 틀림없겠다.

우리는 옷을 벗어 정수리에 이고 두 강물을 건넜다. 늦어서 나룻배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일 그럴듯한 여관에 들었다. 서울이나 대구의 일급 여관과 별 다를 것이 없었다. 욕실에서 몸 씻고 잘 차린 저녁상 받고 옆마루에 반나체로 앉았다.

밤 느지막해서 우리 여관 저쪽 Wing에 어마어마한 행차가 든다. 강원도 경찰국장이라고 했다. 정선 경찰서장 이하 모든 직원이 와서 마루 밑에 ‘국궁’한다. 국장님의 발을 씻어 드린다. ‘금준미주’에 안주상이 호사롭다. ‘산해진미’가 저녁 상에 비좁다. 이 산골에서 어떻게 이런 진미가 비장되었나 싶었다. 여관 주인도 쩔쩔맨다.

구 한국때 관찰사 만큼이나 ‘귀하신 어른’이었다. 한국의 민주주의란 전도요원하다고 나는 혼자 맘 조리기도 했다.

이튿날 우리는 ‘주인’과 얘기할 수 있었다. 그는 ‘전’ 씨였다. 전대형과 족보를 따지기 시작한다. 전군도 여간 아니었다. 자기 족보의 어느 파 어느 분의 후손이고 선조들의 신라시대 관작까지도 ‘줄줄’ 이었다. 주인은 전군과 촌수를 따지며 자기가 아랫대임을 말하고 전군 앞에 절한다. 40대 분이었다.

‘정선’ 고을에는 정선 전씨가 많이 살고 있었다. 우리는 시외 산촌을 찾아갔다.

길에서 ‘우체부’ 한분을 만나 한참 같이 걸었다. 그도 정선분인데 편지 한 장 배달하기 위해서 산 넘고 물 건너 하루에 백리 길을 걷노라 했다. 하루에 짚새기 두 켤레 망가진다고 했다. 이제는 익숙해셔서 다리가 노상 가볍노란다.

한달에 얼마 받느냐 했더니, 그래도 농사하기 보다는 훨씬 나은 셈이라고 만족한 표정을 짓는다.

‘정선읍’은 평지에 ‘성’으로 두루 작은 도시지만, ‘읍’을 벗어나면 험한 산 비탈을 ‘단’으로 층계를 만들고 거기에 옥수수, 또는 ‘모밀’을 심는다. 옥수수 이삭은 ‘소형’이었다. 작아도 맛은 달았다. 우리는 길가 어느 댁에서 점심을 먹었다. 주인은 역시 ‘전’ 씨였다. 옥수수를 삶아왔다. 역시 족보 자랑에 열중했는데 꽤 객관적이고 자세했다.

모두 ‘신라’와 관계 되 있었다.

교회는 어디에도 없었다. 강원도는 우리의 선교지역이라고 절감했다. 저 멀리 산 밑에 작은 마을이 보인다. 거기에 신자 가정이 있다고 했었지만 가보지는 못했다. ‘정선기행’은 대한일보에 게재되기도 했었으나 영원히 잃어진 글이겠다.

‘장공’은 전태형 군과 함께 강원도 산협지대를 탐방할 수 있었던 추억에서 이미 고인 된 전군을 맘 깊이 모시고 싶어졌다.

아래에 전군이 보낸 마감 편지 두 장을 옮겨 적어 ‘불망비’에 대신하려 한다.

[제1신]

목사님, 장기간의 이국생활에서 얼마나 고적하십니까? 주님 은혜중 평안하옵시기를 빕니다. 사모님과 다른 자녀분들도 별고 없으신지요.

목사님의 활동 소식은 종종 듣고 있습니다.

이곳 서울 형편은 별고 없습니다. 전경연 박사님과 김익선 목사님은 다 잘 지내십니다.

저희 ‘제3교회’ 형제들도 다 건투합니다.

목사님이 서울에 안 계시는 동안도 교회는 여전히 조금씩 자라서 지금은 그 면모가 꽤 변했습니다. 1974년 11월 17일에 노회의 인준을 받아서 정식 교회 설립을 하고 설립예배를 가졌습니다. 목사님이 안계시는 것이 제일 섭섭했습니다. 노회장님과 여러 목사님 장로님들이 함께 참석했습니다. 1974년 봄부터 기장총회 사무국에 계시는 김익선 목사님이 저희 교회에 오셔서 지금까지 많은 노고를 겪으시면서 수고하십니다. 아시는대로, 요즘와서는 총회 사무실도 전에 없이 시끄럽고 분주하신대도 우리 교회 강단을 맡으셔서 아주 감명깊은 설교로 우리 교우들을 길러 주십니다.

교인은 약 40명 정도이고 주일학교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주일학교는 한국신학대학생 2명을 유급으로 전담시켰습니다.

교회당은 약 20평 정도의 건물을 빌려쓰고 있습니다. 이제 앞으로의 계획은, 1975년도 6월쯤에 교회당 건축부지를 구입하고 늦어도 1976년도에는 갈현동, 불광동 지역에 말끔하고 아담한 각종 어린이 놀이터까지 구비한 기장교회당이 처음으로 건립될 것을 모든 교우들이 갈망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이 돌봐주시던 제3교회가 끝내 이 지역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김목사님, 전목사님, 돌아가신 노홍섭 목사님, 김익선 목사님, 그리고 그밖에 많은 목사님 장로님들의 간곡한 기도와 노력 때문이라고 감격해 합니다.

김 목사님, 지금 우리 교회를 봉사하고 계시는 김익선 목사님 더욱 격려해 주시기를 간곡히 바랍니다.

교회 부지 구입비로 1975년 1월부터 은행 적금 일백만원 구좌를 설정하고 달마다 불입하기 시작했습니다.

1975년 2월쯤에 또 일백만원 구좌를 불입하려 합니다. 저희 몇몇은 특별헌금을 하려고 합니다.

현재의 생각으로는 교회의 대지는 약 300평 짜리를 사려 하니다. 좀 넓게 잡으려는 것입니다. 교회당 건물은 2차적인 문제이고, 대지를 넓게 잡아 어린이들과 학생들의 자유로운 ‘요람’을 만들려는 것이 우리 교우들의 일치된 의견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대로, 이 지역에 정말 교회다운 교회가 설 때를 바라보며 저희는 온 힘과 온 재산을 바칠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 교회도 또 다른 교회 건립에 인색함 없이 협조할 것입니다. 진실로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이 일이 성공되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만큼 우리의 결의에 난관과 시련이 닥쳐오리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제3교회 역사가 2년밖에 안됩니다만 그 동안에 우리 끼리서도 참기 여려운 일들이 많았습니다. 회의와 좌절과 실망이 우리를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남에게 알리잖고 우리끼리서 무사히 극복했습니다.

이제는 정말 한뜻으로 전진만 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목사님과 여러 선배님들이 격려하시고 기도해 주신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우들은 목사님의 건강과 소식을 궁금하게 기대합니다. 속히 귀국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목사님, 사모님 자녀 여러분의 안녕을 빕니다.

(1975. 1. 20. 제3교회 교우 일동)

현재 교회 내용

교회당 – 20평 정도(전세)

교인 – 약 40여명

주일학교, 중등부 – 약 15명

주일헌금 – 10,000원 정도

월정헌금 – 80,000원 정도

목사님 교통비 – 매월 20,000원

주일학교 교사 2인 사례금 – 20,000원

제직 – 집사 10명(남 5, 여 5)

대외봉사

성남단지 주택교회에 재봉틀 하나 기증.

명진 보육원에 크리스마스 명절 선물 갖고 방문.

[제2신]

목사님,

목사님이 보내주신 서신과 수표 감사합니다.

교인들에게 다 읽어드렸습니다. 모든 형제들이 감격하며 감사했습니다.

지금 한국은 갈수록 암담할 따름입니다.

한국에 기독교인이 수백만이고 교회역사도 100년이 되어 가는데 자기 국가의 역사를 정도로 이끌어 가지 못하니 책임이 한국교회에 있다고 생각되어 스스로 부끄러워집니다.

교회다운 교회가 몇 없고, 교인다운 교인도 없는 것 같습니다. 다 악의 세력에 휘말리고 교회는 ‘무덤’처럼 되었습니다. 할 말도 못하고 무덤같이 침묵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역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신다고 믿습니다. 소수의 교회나 교인이라도 각기 자기 입장에서 최선을 다 하노라면 언젠가는 세월이 올 것이라 믿습니다.

교회 소식을 전합니다.

부활주일 헌금이 230여만원이 되었습니다. 이제 교회가 한 번 다시 헌금하면 약 4, 5백만원은 될 것 같습니다. 교회 대지를 겨우 구입할 정도의 금액입니다. 국내 교단의 몇몇 분이 얼마 도우련다고 김익선 목사님이 전해 주셨습니다. 지금 저희들의 일념은 교회당 건축이란 한 점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목사님 기억하시고 도와주십시오.

목사님 귀국하실 때까지에 저희들 교회당이 건축되어 목사님 모시고 멋있는 예배를 함께드려봤으면 하고 모두 목사님 귀국을 기다립니다.

그곳 교회와 교우들에게도 하느님 은총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1975. 4. 20. 서대문 불광동 367-1 전태형 올림)

이 편지 받고 ‘장공’은 곧 회답을 써 보냈지만, 전태형 군은 편지 회답할 남은 날도 없이 가셨다고 한다. ‘간염’이 ‘간암’으로 번져서 그의 목숨을 탐식(貪食)했던 것이다. 전부터도 전군은 안색이 검은 축이었다. 그러나 그의 정의감과 봉사의욕과 뜨거운 신앙과 창조력이 그를 몰아 밤낮 뛰게 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렇게까지 속히 떠날 줄은 아무도 몰랐고 해외에 있는 ‘장공’은 더욱 그러했다. 그의 서거로, 그의 동지들이 일시 좌절되었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남은 친구들이 그의 소원을 이뤄드려야 도리가 아니겠나 싶어 다시 열심들 냈다고 한다. 그래서 교회당도 아담하게 세워졌고 교인도 2백명 선에 이르렀고 자립교회이면서 대외봉사에도 앞장선다고 한다. 부인께서 약제사시기 때문에 아들 3형제를 길러 고등교육까지 마치게 하고 각기 자기들 살림을 유족하게 꾸려 가게 됐다고 김익선 목사님이 알려주신다.

‘인간’으로서의 그는 몸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지만, 그의 ‘영’ 또는 ‘영체’는 하나님 안에서 영원할 것이다.

전태형님께

전선생은 어찌하여 그리도 서둘러 저 세상에로 옮겨가셨소! ‘장공’은 이럭저럭 귀국의 길이 수월찮아서 차일피일 10년 가까이를 해외에서 지냈습니다.

나가서 전선생과 전선생의 번제단이랄 수 있는 제3기장교회에도 가서 전선생과 동지들을 부둥켜 안고 한바탕 울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 40대도 못 된 전선생이 먼저 가셨군요! ‘장공’이 이제 나가도 전선생은 안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전선생의 영혼은 자유로 내 심장에서 혈맥에로 돌며 나를 반길것입니다.

교회다운 교회 하나 선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장공’ 老爺(노야)도 잘 압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기관이기 때문에 악마의 질투와 방해가 대단합니다.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기기 보다도 지는 율이 훨씬 높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 힘 이외에 성령의 힘이 있습니다. ‘성령’은 악마를 이깁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하면 물러가지 않고서는 못배겨 냅니다. 그래서 교회가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뿌리가 내리기 전에는 업신여겨 함부로 건드립니다. 그러나 든든히 선 다음에는 뽑아지지 않습니다. 아름들이 상수리 나무를 뿌리채 뽑을 장사는 없습니다.

태형군과 여러 동지와 성직자들이 제3교회에 옥토가 되고 거름이 되어 이제는 불광동에서 제3교회를 함부로 건드릴 악의 세력은 없어졌습니다.

태형 동지가 그렇게까지 염원하던 아담한 교회당도 섰습니다.

저 세상에서 태형 선생은 찬양하고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태형선생은 원래 간장이 약한데다가 너무 과로하신 것 같습니다.

태형 씨 돌아가신 후 영부인께서 세 아드님을 깔축없이 키우시고 교육하셔서 지금 모두 막힘없이 빛나는 앞길을 걷고 계시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훌륭하고 장하신 어머니십니다.

태형 씨는 용감한 ‘정의파’였습니다. 불의와는 끝까지 싸웠습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성령으로 정화된 내 양심을 애매하게 둔화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입니다. 불의의 탁류가 ‘해일’이 되어 우리 역사에 덮쳐 휘감기는 오늘의 태형 군의 바른소리 울려옵니다. 들을 귀에는 들립니다.

우리 모두 통전된 하나님의 세계 안에서 다시 만날 그날을 기다립시다. 강원도 급경사산 얼굴에 야곱의 사닥다리 같이 단에 단을 쌓아 올리고 기어코 먹고 살 양식의 씨알을 심는 농부들처럼 이 박토 중의 박토인 우리 현실에 의로운 사랑의 생명을 심읍시니다.

전선생의 일생은 십자가였습니다. 부활의 날은 올 것입니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영광 중에 쉬십시오.

1976년 장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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