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22일 월요일

[범용기 제5권] (132) 輓章文記(만장문기) - 宮內 彰(미야우찌) 敎授(교수)

[범용기 제5권] (132) 輓章文記(만장문기) - 宮內 彰(미야우찌) 敎授(교수)

1940년 일제 말기였다. 전문학교령에 의한 조선신학교 설립은 ‘서북’과 ‘기호’의 교권승갱이 때문에 전도 요원했다. 그래서 장공은 우선 급한대로 경기도청에 가서 ‘학교’가 아닌 ‘학원’이란 이름이 붙은 ‘조선신학원’ 인가를 받았다. 학원은 1년에 한번씩 인가를 갱신해야 하니까, 2학년, 3학년 등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수업년한 3년의 학제를 제멋대로 만들어 그렇게 실시했다.

총독부에서는 학원에도 일본인 전임선생 한분 있어야 한다기에 우리는 그 당시 대만신학교 ‘교수’로 있던 ‘미야우찌 아끼라’(宮內 彰) 목사를 초빙했다. 그는 1945년 해방 때까지 우리와 고락을 같이 했다.

1944년(?) 그는 50고개를 바라보는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징집되어 ‘행방불명’이랄까 소식을 알 길이 없다. 1945년 8.15 해방과 함께 그는 서울에 나타났다. 그래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수표교 골목 길가에서 녹두지지미를 먹으면서 그동안의 소식을 교환했다. 그는 제주도에 가서 한라산에 땅굴파는 노동을 하고 있었노라 했다.

그 길로 그는 귀국하여 청산 4정목 일본 기독교회를 목회하다가 수년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참 크리스챤이었다.

이제 그가 ‘장공’에게 보낸 마감편지 중 몇 구절을 소개한다. 日文(일문)이기에 필자가 번역해 쓴다.

“…소생도 아직은 현역으로 일합니다. 김선생께서 ‘세계’에 기고한 ‘한국기독교회는 왜 싸우느냐?’하는 제목의 글을 읽었습니다. … 일본은 진짜 문제의 나라입니다. 김대중 납치사건에도 일본은 박정권에 대하여 강경한 태도를 갖지 못하고 어물어물 넘깁니다. 대기업체들이 한국에 투자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니까 한국분들이 일본을 미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일본 ‘교회’라도 각성하여 바른 말을 해야 하겠는데 그것은 제대로 못합니다. 38선에 의한 한국의 분단도 일본이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안의 화재 보듯 할 뿐 아니라, 현상유지파에 가담하고 있습니다.

작년 여름에 이스라엘을 거쳐 유럽을 돌아본 일이 있습니다만, 영국이고 불란서고 모두가 관광지로 자족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선교활동 같은 것은 생각도 안하더군요. 거기에 비하면 한국교회와 한국교인은 살아 있습니다. 문선명교 같은 것은 좀 곤란합니다만.

김 선생님, 일본에도 오셔서 일본 사람들을 좀 계몽시켜 주십시오. 그리 하신다면 저도 犬馬之勞(견마지로)를 아끼지 않을 작정입니다.

부디 더욱 건강하십시오….”

5월 20일

宮內先生(궁내선생)은 소위 대동아 전쟁 때에도 ‘武運長久’를 기도 제목에 넣는 일이 없었다. 어느날 나는 宮內 씨에게 말을 걸어 봤다. “일본이 중국을 휩쓸고 있는데 선생의 소감은 어떻소?”

그는 서슴찮고 대답했다.

“나는 일본이 지기를 바랍니다.”

“왜요?”

“일본이 지며는 그래도 회개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지만, 이기면 교만해져서 더 못된 짓을 할테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일본이 지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참 크리스챤 일본인이란, 이 비슷한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기에 해방 후에도 그에게 배운 한신 졸업생들은 그를 잊지 못한다. 조향록 등 그에게 배운 졸업생들이 왕복여비를 거둬 그를 초청했었다. 나도 반가왔다. 그는 새로 지은 수유리 한신 강당에서 강연도 했고 환영도 받았다. 뚝사바리에 끓인 김치찌개가 제일 맛있다면서 간데마다 그것만 먹곤 했다.

한국교회 선교 50주년 기념 때에던가 내가 무슨 일로 캐나다 가던 길에 ‘가루이자와’에서던가 그를 만난 일이 있었다. 그는 무던히 비대해 진 것 같았다. 그것이 땅 위에서의 마감 만남이었다.

그가 ‘한신’에 봉직할 동안에도 우리와 똑같은 봉급으로 꼭같이 고생했었다. 사택비란 이름으로 ‘방세’를 학교에서 담당한 것만이 한국인 교수보다 다른 것 뿐이었다. 부인이 유치원 보모로 취직해서 얼마 살림에 보태곤 했다. 그가 동경 청산교회 목회 때에도 생활상태는 한국 있을 때와 꼭 같았다. 전공은 신약햑인데 외국 유학은 못했지만, 학계에서도 인정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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