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22일 월요일

[범용기 제5권] (134) 輓章文記(만장문기) - 김정준 학장

[범용기 제5권] (134) 輓章文記(만장문기) - 김정준 학장

長空(장공)이 晩穗(만수)를 처음 만난 것은 아마도 1933년, 평양에서였던 것 같다. 그때 ‘정준’은 숭실전문학교에 다녔었다. 나는 숭인상업학교에 교사로 있으면서 숭인, 숭실, 광명 등에 재학중인 유망하다고 인정되는 기독학생, 특히 신학에 뜻 둔 청년들을 모아 일주일에 한번씩 새벽에 상전째 교회당에서 기도하고 성경읽고 토의하고 하는 모임을 가졌었다. 그때, 숭실중학의 정대위, 숭인상업의 최봉윤, 광명중학의 어느 감리교 학생 등이 Sinior 그룹으로서의 충실한 맴버였다. 프로그램 작성과 진행은 자치적으로 학생들이 번갈아 맡았었고 나는 성경강화 정도의 일을 했다. 정대위가 주장할 때는 자작시를 읽고 아름다운 기도문을 송독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부터도 정대위는 ‘시인’이었던 것 같다. 二葉(이엽)의 仙壇(선단)이랄까.

숭전에 다니는 정준도 동참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연령으로나 학력으로나 정준은 그 그룹에서는 선배였다. 그래서였던지 완전히 섞이지는 않았다. 열심이다가도 간데 온데 없이 사라지곤 했었다. 晩雨兄(만우형)이 산정째 목사임과 동시에 숭실중학 성경교사기도 했었기 때문에 정준, 대위 등이 모두 산정째 교회에 나오는 것이었다. 장공도 그 교회 집사로 있었다.

일제 말기, 일본 군벌이 발악상태에 접근할 무렵에 그들은 모두 졸업했었다. 만우와 장공의 연줄로 그들은 청산신학부에 추천되어 입학되었다. 그러나 국수주의적 일본 군벌의 대륙침략이 성숙되면서 신학교육의 자유도 억압되었다.

특히 한국학생들에 대한 사찰과 소위 ‘부정선인’(不逞鮮人) 취급은 잔혹했었다. 정대위는 비교적 자유로운 ‘동지사대학’으로 가고, 최봉윤, 선우학원 등은 일찌감치 도미하고, ‘김윤국’은 구주 감옥에 갇히고, 그때 구주제대학생이던 시인 윤동주는 구주 감옥에서 해방직전에 옥사했다. 김정준은 ‘연전’에서 영문과 2년을 마치고 동경청산신학부에 옮겨 1943년 3월에 본과를 마쳤다.

정준은 캐나다 유학생으로 뽑혀, 1953년 4월에 토론토의 Emmanuel College(신학교)를 졸업하면서 B.D. 칭호를 받았다. 54년 5월에는 그 대학에서 Th.M 칭호를 받고 귀국했다.

그는 1959년 5-9월, 독일의 Heidelberg 대학교에서 청강했고, 1961년 7월에 스카틀랜드 에딘바라 대학교 New College를 졸ㄹ업하면서 Ph.D in Divinety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한신’에 봉직했다.

그는 경남 동래 근방 출신으로서 조실부모하여 고생하며 자랐다. 그래서인지, 무엇이든 하려들면 하고야 마는 성격이었다. 1945. 8. 15. 해방 직후에는 T.B.가 위험선을 넘었었다. 마산 요양원에 입원됐다. 그 요양원은 일제 강점기에 시작됐고 미군정청에서 돌봐주고 있었다. 오래 입원해 있었지만 병은 낫지 않는다. 의사들은 가망없는 환자라 하여 그를 병원 복도 옆에 옮기고, 회진(回診)도 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산송장’이었다. 아직 살아 있으니 ‘시체실’에 넣을 수는 없고 살 소망이 없으니 ‘병실’에 뉘어두기에는 과분(過分)하다. 그래서 어중간한 복도 옆에 좁은 간이침대를 놓고 거의 뉘여 죽는 날을 기다리게 한 것이었다. 병원 의사로서는 非情(비정)이겠지만 전쟁중이나 초 비상시에는 그런 심리도 노상 없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하루는 미군 군의관이 정준이 누운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다. 정준은 영어로 자기 사연을 말했다. “내게도 살 가망이 있는지 없는지 당신이 좀 봐주시오!”

그는 전문의라 얼마 두들겨 보고서 “살 수 있다”고 한다. 그의 주선(?)으로 따스하고 빛 잘들고 공기좋은 林間(임간) 특별실에 눕게 됐다. 그때쯤에는 특효약인 ‘파스’란 것이 발명되어서 폐결핵은 ‘불치병’에서 제적되는 판국이었다. 그는 날마다 건강이 회복되어 다시 살았다. 그는 “관 속에서 나온 사나이”란 투병기를 책으로 낸 일이 있다.

정준은 한신 졸업생이 아니다. 그러므로 장공과 사제간이랄 수는 없다. 그러나 형제라고 하는 사람들은 자주 본다. ‘金在俊’, ‘金正俊’ 하는 이름이 ‘준’짜 항렬의 형제관계를 연상시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46년 3월 해방직후 ‘한신’ 재건때 김정준도 전임강사로 시무했었다.

1950년 6.25 동란때, ‘만우’는 납북되고 김정준은 거제도에서 여러 작은 교회들을 목회하고 있었다.우리는 1951년 3월에 부산 남부민동에서 ‘한신대’를 개강했다.

학감은 정대위였다. 학교 살림살이까지 맡아 좌충우돌할 밖에 없었다.

어느날 정대위는 UNESCO 사무총장으로 전출되고 그 자리에 김정준이 선임됐다.

살림살이란 어려울수록 얼키고 설켜 매듭이 안풀리고 할 일은 많고 복잡한 법이다. 정준은 한 주일도 못 되어 깨끗이 정리해 버렸다. ‘천리마’ 같이 잽싸고 잘 뛰는 재사라고 보았다. 정준은 천리마라고 나는 말한다.

일제말기에 신사참배가 강요되자, ‘만우’는 평양 ‘산정째 교회’를 그만두고 부산에 내려가 호주 선교부 후원으로 ‘빈민선교’ 사업을 시작했다. 그때 정준은 만우의 부관 직책을 맡았다. 만우는 성빈(聖貧)이란 정기간행물을 내면서 정준에게 편집사무를 맡겼다. 정준은 내게도 글을 청했기에 내 글도 가담가담 실리는 일이 있었다. 정준은 혼자서 그 간행물을 너끈히 해 냇다. 체재와 기사배치 등이 산뜻했다. 취학 못한 빈민아동들을 위한 야간 국민학교도 가르치고 이발기계로 그들 머리도 깎고 말끔하게 목욕도 시키고 했다.

해방직후에 유재기 목사는 ‘홍국시보’를 내고, 이주은 등도 무슨 Leaflet을 내기 시작했다. 장공의 신학사상이 ‘정통’이냐 하는 의구심도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김정준은 이주은 씨 간행물을 통하여 장문의 지지논설을 발표했다. 장공은 젊은 동지의 용기에 행복했다.

박정희 군사독재 벽두에 장공의 한신학장직은 갑자기 소실되었다. 대구의 ‘이여진’이 학장으로 취임했다. 그의 과도한 친정부 태도가 한신대의 건학정신을 근본에서 변질 또는 전복시킬 우려가 있다하여 교수와 학생이 총궐기 하였다. 교수진은 총사직하고 학생들은 경찰차에 실려가게 되었다. 학장 자신이 경찰차를 Campus 안에 불러 들였다는 얘기도 있다. ‘한신’ 역사에 ‘공동’이 뚫렸다. Campus는 Empty다.

긴급이사회가 모였다. 전원 출석이다. 이 학장은 교수들 사직서를 모아 이사회에 제출했다. 이것은 한신대의 존폐문제였다. 이사회에서는 이여진 학장 부부(부인은 기독교교육 교수)의 사표까지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구두로 사의를 표명한다. 이사회에서는 서면 제출을 명령했다.

사면은 수리되고 신임 학장으로 김정준이 추천됐다.

그때 김정준은 연세대 구내에 있는 ‘연합신학대학원’ 원장으로 있었다. 교섭은 장공이 하기로 했다. 그때 정준은 심장이 나빴다. 언제 멎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정준은 절대로 못하겠단다. 부인 주재숙 여사도 강경하다. 장공도 강경했다.

“지금 정준이 맡지 않으면 한신대는 문 닫힌대로 종말을 고한다. 정준 목사는 창설 교수로서 창설자의 한 사람이다. 연세대에 있으면서 못본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준 박사에게 내리시는 ‘사명’인줄 믿는다. 건강은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이다……”

결국 그는 수락했다. 이사회에 나와서 수락을 선언하고 “시정연설(?)”을 했다. 사면한 교수들은 모두 복직시키고 학생들도 무조건 복교시킨다고 다짐했다.

정준은 천리마다. 騎手(기수)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그 효능에 차이가 생긴다. 1961-1962년 일년간의 ‘기수’는 적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1970-1976, 만 6년간 학장으로 재직할 동안의 기수는 능숙했다. 천리마에게 천부의 재질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을 만큼 자유로운 공간을 제공한 것이었다. 박정희 군사독재, 전두환의 답습, 한신대와 기장 교단에 대한 탄압과 간섭, 그리고 문교부의 횡포 등등의 광란 속에서 두 번 세 번 “관에서 나와” 끝까지 ‘한신’의 신학 제단에 목숨 바쳐, 수난의 영광 속에 승천한 김정준은 한국 기독교사와 신학사와 민족사, 특히 기장의 역사에 불멸의 유산을 남겼다.

그가 장공에게 인편으로 보낸 ‘제1신’은 그가 어떻게 독재정권의 불법한 간섭에 항거한 수난기여서, 탄식 과찬이 없이는 읽을 수 없을만큼 절실하다.

제2신에서, 정년퇴직 후에 모교인 임마누엘 대학에 일년간 초빙교수로 있게 주선해 달라는 그의 요청에 대하여는 장공과 이상철이 여러번 Jay를 만나 제청했고, Jay가 한국 나갈 때 공항에서 다시 부탁하고 손잡고 기도하고 보낸 일까지 있었다.

Jay가 토론토에 돌아왔을 때 우리는 다시 그를 방문했다. Jay는 당장 실현시키기는 예산문제 때문에 불가능하지만 내년에는 가능할 거라고 했다. 다음 해에는 예산도 섰다. 토론토 대학 당국과도 합의되었다. 그러나 그때에는 건강 때문에 정준 자신이 포기하고 말았다. 제1신에 정준의 건강상황이 자세하게 진술되었다.

기적적으로 죽은데서 다시 산 정준은 ‘꼴인’ 직전까지 경주 선수처럼 여념 없이 달렸다. 그는 그후 수년동안에 놀랄만큼 많은 연구 저서를 내었고 그의 선교활동도 광범위였고 다양하였다.

이제 정준 학장의 마감 서신인 제1신과 제2신을 그대로 적어 남기려 한다. 원문 그대로다. 가필이나 첨삭을 피했다.

[제1신]

김재준 목사님께 이 글을 올립니다.

마침 인편이 있어서 자세하게 씁니다.

먼저 저의 건강문제로 인하여 많이 염려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학교의 어려움은 내 건강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자비 없이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없었을 것임을 깨닫고, 날마다 오늘이 내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고 사니까 많이 안정되고 담대해질 수 있음을 감사합니다.

지난 4월 휴교령이 내린 이후 학교로서 다른 25개 대학과 같이 제적하라는 학생을 제적시키고 하라는대로 다 했다면 휴교령도 안 내리고 지금쯤은 다른 대학들과 같이 공부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2월 15일 석방된 4명의 학생 중, 석방된 즉시로 가능한 두 학생을 입학시켰다는 학교 태도가 문교부의 비위를 건드려 그들을 복학 못 시키도록 여러 가지 압력을 가해왔습니다. 우리 학교 태도는 2월 28일까지 내가 복학 서류에 결재하기로 했지만 그 다음에 올 경과가 연세대와 같을 것이 아닐까 하고 그 사후 대책을 강구하다보니 학생 복학은 자연히 다시 연기되어 3월로 넘어갔고 그러다가 그만 우리 학교는 휴교령을 받고 만 것이 4월 10일이었습니다.

나는 고된 긴장의 날을 보내다가 3월 28일 그만 병원에 입원하여 3, 4일간 의식불명으로 지내다가 4월 1일 밤에는 내가 죽고 있었습니다. 혈관주사는 되지 않고, 팔의 조직이 죽기 시작했고 심장도 멎어가고 의식도 없고 하여, 미국 있는 ‘영일’에게 급히 나오라는 전화를 걸고 마지막은 집에 옮겨 임종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시 맥박이 뛰고 주사가 들어가고 심장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폐장은 본래 다 못쓰게 된 것입니다. 입원할 때부터 산소 호흡기로서 숨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담당의사의 말대로 “하나님의 기적”으로 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하여 차츰 의식이 회복되고 산소호흡기도 빼고 제대로 숨쉬기 시작하여 결국 4월 14일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완전히 또 한번 덤으로 받은 목숨이니 이제 내가 바쳐야 할 제단은 ‘학교’라는 것을 깨닫고, 사는 날까지 아니 내 심장이 뛰는 날까지 학교 위해 살다 죽자는 각오를 하고 나왔습니다. 멀리 전지요양을 권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내 사정이 그런 ‘사치’를 허락할 수도 없어서 ‘공관’으로 들어와 요양을 했습니다.

휴교령이 내리자 문교부는 10명의 학생을 제적시키라 했습니다. 처음에는 숫자도 이름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4월 9일 YWCA에서 ‘감신대’와 우리대학 학생회 주최로 강연회를 연 후에 성명서 낭독을한 것이 죄라 하여 학생 징계를 요구한 것입니다. 이때 대부분의 학교들은 2.15 “석방학생” 복학 관련 ‘데모’로 자진 휴강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날(9일) 밤 사태를 보아 휴강할 생각을 가지고 교수 두 사람을 강연장에 파송하여 상황을 보고, 다음 날에 공부가 불가능하리라 판단되는 경우에는 자진 휴강을 문교부에 통고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예상대로 성명서가 낭독되고, 필한 뒤에 학생들이 찬송가를 부르면서 YWCA 그 좁은 골목을 나오니 당국에서는 데모라 간주하고 미리 와 있던 수백의 곤봉부대 즉 데모방지대가 학생들과 충돌되었습니다. 그래서 학교로서는 그날 밤 9시에 문교부에 자진 휴강을 보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12시 15분쯤 문교부는 그 깊은 밤중에 와서 휴강은 받아들일 수 없고 휴교령을 받아라 하여 문제는 더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서는 학생징계를 요구했습니다. 우리는 처음에 학생회 간부들에게 주의를 시킨 일이 있기 때문에 부득이 학생회 간부 5명을 무기정학시킨다고 보고 했습니다. ‘감신대’는 무기정학 2명으로 낙착되었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이 받아지지 않았습니다. 10명을 제적시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거부하니까 문교부에서는 10명의 명단을 보내 왔습니다. 학교로서는 학우회 간부 5명 이외의 다른 5명에 대한 처벌 증거사항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유로 거부한 것입니다. 문교부에서 그 명단이 내려왔습니다. 결국 우리는 5명 무기, 문교부는 10명 제적으로 대립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문교부와 우리와의 대화는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내가 병석에 있는 동안 교무과장인 주재용 목사가 학장 대리직을 위임받고 있었기에, 이 어려운 판국에서 내가 더 이상 집에 누워 있을 수 없어서 5월 7일에 다시 집무를 했습니다.

문교부에서는 강력한 태도로 우리 학교에 대한 종합학사 감사를 일주일 이상 강행하였기 때문에 우리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중요한 사항들을 적는다면 ① 대학입학 예비교사에 불합격된 학생들을 ‘선과’에 입학시켜 공부시킨다는 것. 도대체 ‘선과’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② 선교대학원, 교역자 연장교육원, 즉 야간 특수 대학원 등등이 모두 불법이라는 것, ③ 학생회 자치예산에 ‘데모비’가 지출 항목에 계정되 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학교 당국이 학생 데모를 공적으로 지원하고 있다는 것 등등이 지적되었습니다. 하여간 우리 학교가 증오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것만은 사실인가 봐요.

제가 5월 7일부터 집무를 시작하고 보니 문제해결은 교수단 Level에서 총회 Level로 가야 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오늘 실정에서 ‘기장’이 증오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기장 계통 사람에게는 일체 여권을 주지 않는다는 방침, 조향록 목사가 연세대 이사로 선정되었지만, 신원조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 YMCA 같은데서도 기장 출신 이사는 다른 사람으로 대체시키라고 당국에서 압력을 가하는 것, 우리 졸업생 윤만서 군이 선교사로 임지에 가려해도 여권을 주지 않아서 못 가고 있는 것, 외국에 유학가려는 우리 졸업생에게 신원조서가 잘 나오지 않아서 여권을 얻기 어렵게 된다는 것, 지난 12월 동북아 신학교 협의회 이사회에 참석하려 할 때에도 복수여권을 받아야 하는데 일본 비자 신청에서부터 막고 있다는 것 등등 이렇게 우리 신학교 문제는 기장 교단의 문제와 직결된 것 같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학생 제적을 문교부 지시대로 한다고 해서 학교가 열려지느냐 하는 것도 의문입니다. 연세대의 경우에서는 그렇게 모든 요청을 다 들어주었는데도 너무나 창피한 일들만 전개되고 있습니다. 기장 자체가 차제에 자기 성격을 밝혀야 할 때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2월말에 모인 이사회에서는 학장에게, 학생 10명 제적하는 방향으로 추진하고 학교 문을 열어주기 바란다는 이사회 결의를 통고해 왔습니다. 나는 학장으로서 받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안 받을 수도 없는 dilemma에 빠졌습니다. 그러다가 교수들의 의견을 모아 전 교단적으로 선후책을 강구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5월 12일에 ‘아카데미하우스’에서 학교 대표로 김정준, 안, 문, 장일조, 이사회 대표로 이사장 신양섭, 원로측으로 증경총회장 강원용, 조향록 등이 연속회의를 열었습니다. 그 모임은 학생 10명을 어떤 형식으로든지(자퇴같은 것) 제적케 하는 방향으로 학교가 수습된다면 그 10명을 제적시키고 총회는그 학생들에게 목사고시 자격을 부여하는 어떤 특별 방법을 강구하여 이 제적된 학생들의 목회자로서의 길을 열어 주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5월 13일에 긴급조치령 No. 9가 나오고 그 이튿날 문교부는 우리 학교에 와서 문동환 박사와 안병무 박사 두 교수를 해임시키라는 Card를 두고 갔습니다.

5월 15일 기장총회 총무와 한신대 이사장이 문교부 장관 면회하러 갔다가 장관 면회는 못하고 고등교육 국장과 면담하게 되었답니다. 그 결과는 학교 휴교령 철회에 앞서, ① 제1차적으로 학생 10명 제명할 것, ② 교수 2명 파직시킬 것을 조건으로 한다. 그 밖에 다른 조건도 제시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합니다. 그 다른 카드란 고대의 경우로 본다면, 학교와 학생회가 각서 비슷한 성명서를 신문지상으로 공개해야 하고, 안보 궐기대회를 열어야 하고 교수가 학생 하나 하나를 찾아 데모 안하겠다는 서명을 받아야 하고, 교수가 자기반 학생을 비밀 시찰하는 정보원 구실을 해야 하고 문교부에 그 내막을 수시로 보고해야 한다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그 진행되는 실적을 보아서 이만하면 학원 정상화가 되겠다고 인정될 때에 휴학, 또는 휴교조치를 해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학교는 학생과 교수가 모두 신앙고백적인 입장에서 Missio Dei 신학노선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지시는 너무 가혹하다고 고민했습니다. 우리 교수와 직원들은 5월 16일부터 학교 위한 연속기도회를 열기로 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간구하기로 했습니다. 결국 교단 Level의 해결을 위하여 5월 20일 전체 이사회를 열고, 거기서 수습안이 발견되면 그날 오후 3시에 열리는 총회 실행위원회와 원로 증경총회장들과의 간담회를 학교에서 열기로 했습니다. 그날 간담회에서 해결을 찾자면 ‘중구난방’(필자삽입)일 것 같아서 9인위원회를 선출하여 그들이 짜낸 ‘안’을 이사회가 검토하고, 이사회는 그것을 총회 실행위원회에 보내면 실행위원회가 총회의견을 모아 이사회로 하여금 문교부에 보고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5월 26일에 제1차 9인 위원회를 학교에서 모였습니다.

그 중간에 생긴 사건의 또 하나는 총회연석 회의가 모였을 때, 시내 학생들 40여명이 학교에 와서 이사회와의 면담을 요청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실, 시간을 낼 수 없어서 학생들과의 면담은 어려우니 총회장과 이사장 앞으로 학생들이 진정서를 내라고 했답니다. 내일이 마감날이니 그 전에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동료 학생에 의하여 한 시간 안에 Spy되어, 그 편지를 쓴 학생 중에서 3인이 당국에 알려졌습니다.

당국에서는 이 3인도 제적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 3인중 한 명은 이미 제적 List에 들어있는 사람이었기에 결국 2인의 제적 후보생이 되는 셈입니다. 나는 그들을 제적시킬 수 없다는 사연을 상술하여 문교부에 제출했습니다. 그 회답은 없었습니다만 이 편지를 쓰는 5월 28일에 문교부는 그 2명도 제적하라고 통고해 왔습니다.

지난 26일 9인위원회가 모였습니다. 위원은 강원용, 조향록, 조덕현, 은명기, 최희섭, 이주묵, 신양섭, 김정준, 안희국이었고 위원장은 강원용, 서기는 조덕현이었습니다. 이 9人委의 사명은 ‘한신대’ 수습책을 성안하여 이사회에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사회는 그것을 받든지 수정하든지 하여 총회 실행위원회에 넘기는 것입니다. 그것을 총회에서 안건으로 하여 검토 합의되면 이사회에 주어 이사회가 문교부에 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9人委는 완전히 둘로 갈라져서 양론이 맞서서 아무 결론도 못 지었습니다. 즉 학생제적과 교수 파면을 문교부 지시대로 실행한다면 우리 ‘기장’의 신학적 원리인 “Mission Dei”에서 이탈되는 것이니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주장과, ‘한신대’도 다른 25개 대학들과 같이 문교부 지시에 순응하고 휴강조치에서 벗어나자는 주장과의 대립이었습니다. 조향록, 신양섭, 이준묵, 조덕현 등이 후자에 속하여 ‘순응’을 극력 주장하였고, 신앙적 입장에서 당국의 지시에 순종할 수 없다는 입장(前者)을 지키려는 사람은 김정준, 은명기, 안희국, 최희섭 등이고 교단이 분열되지 말아야 한다는 교회 정치적 입장에서 조속한 해결안보다도, 학생제적을 회피하기 위해서 무슨 구실로든지 차일 피일 시간을 끌어보자는 것이 강원용 박사의 ‘안’이었습니다.

지금의 이사회 구성은 과반수가 조향록 안을 지지하고 신앙고백과 양심의 지시를 위해서는 휴교나 폐교도 각오해야 한다는 사람은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신앙고백 입장에서 문교부와 대결하기는 어렵게 되었습니다.

강행하면 교단이 분열되고 총회에 내분이 생길 우려가 있었습니다. 문교부에서는 ‘기장’에 내분이 일어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고백을 애매하게 한다면 불의와 부정에 공적으로 타협하는 것이 됩니다. 이런 신학적인 문제는 우리 교단의 신학자들이 학적으로 해결할 문제고 노회나 총회의 다수결로 결정할 성질이 아닙니다. 우리 학생들과 교수들이 이 점에서 아주 잘못도 없습니다.

신앙고백적인 사회참여 선언과 행동은 우리 기장에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니만큼 각 노회는 임시노회라도 소집하여 지지성명을 해 줘야 하겠고 총회에서는 비상총회를 불러 일치하게 우리 교수의 학생을 지원하여 이사회가 딴 결의를 하더라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조향록 목사는 신학교 체질을 차제에 고쳐야 한다는 말을 하면서 지금의 현직 교수 아니라도 신학교수는 있을 것이니 학교 문을 닫고 싸우는 것보다 문을 열고 싸우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습니다.

문을 열면 정상화되느냐 하면 그것도 매우 의문스럽습니다. “서울대”가 개강하자마자 긴급조치 9호로 걸어넣고 3000명 데모가 관악 Campus에서 일어났고 성명서도 그런 것보다 더 구체적인 것이 나왔고 그것 때문에 총장이 즉각 파면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기독자 교수협의회에서 증언에 앞장선 이문영, 한완상, 서남동 모두가 해임 대상자로 그 명단이 그 대학에 내려 갔으며 이문영은 일차적으로 학교당국의 자퇴 권고를 거부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신’이 조향록 목사 말대로 개강한다고 해도 결코 정상화는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에 쉽게 문을 열지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한신과 기장교단은 최대의 위기를 당하고 있습니다. 저는 1970년 병든 몸으로 와서 한 5년간 학교를 정상화시키고 교회와 학교와의 유대관계를 원활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작년 임기에 맘 가볍게 퇴진하려고 했더니 지금 저는 이사회에서 파면당하게 되었고 두 교수는 물론 다른 교수들까지도 그런 운명에 놓여 있어 참으로 울고 싶은 심정입니다.

집도 한칸 없는 이 교수들이 어떻게 앞날을 꾸려가나 책임자로서 내 문제보다도 동료들의 걱정이 앞섭니다. 캐나다 연합교회가 얼마나 이 딱한 학교의 수난을 알고 있는지도 걱정이고 우리의 편지는 아주 Check를 당하고 있으니 어디다 호소할 길도 없고 호소하려 갈 길도 없습니다.

저는 다시 살아난 목숨을 갖고 끝까지 신학을 주장하다가 죽어지기를 원합니다. 하루하루가 종말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멀리서 기도해 주시고 격려해 주실줄 믿고 이만 씁니다.

이상철 목사님께 안부 전합니다. 건투를 빕니다. 나를 아는 모든 분들에게 안부 전해주시기 바랍닏.

(1975. 6. 1. 김정준 씀)

[제2신]

김 목사님,

하나님 은혜 중 그간에도 대안하시온지요. 사모님도 평안하시고 자제분들 모두 건강하십니까?

이번 Dr. Jay편을 통하여 목사님 강령하시다는 소식들었습니다. 이번에 기장은 새 역사 25년 축하 ‘무드’에 잠겼지만, 고난당하는 형제들이 많아서 한편 마음이 아픕니다. 특히 기장 새 역사 주역하신 김 목사님도 안계시고 고인 되신 이들도 있고 또 딴 사정도 있어 이번 총회 축하식에 나타나지 못한 이들이 많아 유감이었습니다. 동봉하는 Program에서 보시는 대로 첫날은 신도대회로 모였는데 6, 7천명의 대집회였습니다. 순서를 지내고 보니 새 역사 25년 주역을 하신 어른들에 대한 공로상 또는 Words of Appriciation도 없었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을 작성한 실행위원들에 대한 원망이 컸습니다. 그만한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러나 이번 25년 기념대회가 있은 제2일 밤에는 독일서 3명의 손님이 오시고, 캐나다서 Dr. Jay 그리고 미국 연합장로교회에서 Dr. Thompson, 일본에 있는 Sweden 교회 대표까지 오셨습니다. 일본 교단 대표는 Visa 관계로 다음날에사 왔습니다.

이렇게 각국 대표들이 격려의 Message를 몸소 와서 해주시고 정중하게 예방해 주시는 것을 보니 우리 교단은 분명히 “Church in the Community”란 실감이 났습니다.

우리 교단을 Heretic이라 할 때 Condemn하는 쪽에 가담했던 미국 United Presbyterian Church가 오늘 25주년 기념식에는 친히 와서 축하의 Message를 전하는 것을 보고 격세지감(隔世之感), 또는 상전벽해(桑田碧海)를 느낍니다. 세상이 이렇게 달라지는데서 하나님의 비밀을 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번 예장 통합측 총회장은 우리 한신 출신인 김두봉 목사가 되었으니 이것도 ‘이변’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념대회 밤 강연에서 ① 25년 역사가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왔음을 감사하고, ② 이제 앞으로의 25년 역사에는 ‘기장’ 50년 축하식 대신에 장로교 연합 경축대회를 열수 있도록 우리 방향을 설정하자고 했고, ③ 우리 현실의 역사에 남이나 북이나 모두 하나님의 주권이 전적으로 무시당하고 있는 실정을 똑바로 보고 우리 주님의 최초의 Message인 하늘나라가 이 땅에 오도록, 우리의 사회적 책임과 우리의 역사의식을 날카롭게 하여 불의를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더 많이 고난을 당해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우리 기장 이 민족사(史)상 할 일은 이 Demonish Power를 God’s Kingdom으로 변질시키는 그것입니다. 사랑ㆍ정의ㆍ평화를 촉구하는 운동을 촉구했습니다.

Dr. Jay가 한국에 와서 보아주신 것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앞으로 한국과 캐나다와의 차원 높은 유대관계가 맺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우리 Message를 듣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겠습니다.

이건 저 개인 얘깁니다만, 1979. 11월에 저는 만 65세로 은퇴하게 되는데 1980년 3월부터는 자유스러운 봉사를 할 수 있습니다. 혹시 캐나다 어느 신학대학에서 O.T. 초빙강사로 반년 또는 일년을 청해주시면 거기 가서 봉사할 생각도 있습니다.

제 건강은 예상외로 좋아서 전에 50대와 같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금년도에는 무거운 학교강의 책임 외에 책을 많이 써 냈습니다.

(1) 시편 명상 3권제1권 (1-42편)제2권 (43-72편)제3권 (73-110편) 다 나왔습니다.(2) Von Rad의 논문집(번역)이 나왔고(3) 구약성서 이해(4) 약하지만 강하다.(5) 신에 목마른 인간 등이 금년도에 나왔습니다. 과거에 없던 多作(다작)이었습니다.

대외봉사로서는 ① 기독교서회 이사장, ② KNCC에 새로 생긴 신학연구위원회 위원장, ③ 안병무 박사가 주관하는 한국신학연구소 이사장 등 신학 활동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 이력서를 동봉하오니 목사님께서 1980-1981년 1년간 캐나다 Guest Professor로 일할 수 있도록 마련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영국 Selly Oak College에서 78-79년 Guest Professor로 오라는 것을 학교 은퇴 후에 보자고 했더니 그 후에는 소식이 없습니다. 나는 캐나다 쪽에 가고 싶습니다. 여기 서 목사를 비롯하여 이문영, 안병무 등 모두 활동을 잘하고 있습니다.

여기 우리는 항상 ‘종말적’으로 살아갑니다. 국산 미사일 등이 선전됩니다. 체제가 더 굳어진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이 어디 인간이 하는대로 버려둡니까? (잠언 16:9, 21:24…) 사람이 아무리 …한대도 끝맺이는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오.

이상철 목사 내외분 평안하신지요.

여러분께 문안 드립니다.

(1978. 9. 정준)

댓글 1개:

  1. 만수 김정준...
    군사독재정권이 절정에 달해 있을 때.. 그는 한신을 지킨 사람이다.
    군사독재정권이 다방면에 걸쳐서 대학들을 압박할 때... 유독 강하게 압박을 받은 학교가 한신대학교다.

    그러한 압박은 한신과 기장, 기장과 한신이 갖고 있는 정체성 때문이기도 했다. 신앙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학교의 상아탑에서... 목회의 현장에서 정의를 부르짖은 결과는 사회의 곳곳에서 당하는 불이익이었다.

    기장 출신이기 때문에... 한신 출신이기 때문에 제대로 실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감시당하고 활동에 제약을 받았던 시절에... 김정준 목사는 어떻게 해서든 한신과 기장 공동체를 지켜내기 위해서 노력했다.

    현실과 타협해서 일단 공동체를 살릴 것인가? 아니면 불의한 현실을 고발해서 피해를 당하더라도 감수할 것인가를 놓고 한신과 기장은 그야말로 심사숙고를 하게 된다. 당시에 제기된 주장들은 어느 한편이 전적으로 옳고 어느 한편이 전적으로 그르다는 흑백논리로 평가될 수는 없을 것이다.

    외부의 도전에 대해서 내부(기장, 한신)는 끊임없는 투쟁을 해왔다. 서로 내부적으로 입장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민주적 절차로 해결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한 것이다.

    수유리 한신대학원에는 만수 김정준 목사를 기념하는 '만수관'이 생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곳에서 기숙하는 학생들이 만수 김정준의 한신과 기장을 사랑했던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한신은 어느 한 순간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한국의 역사 속을 관통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서 투쟁해온 결과로 오늘의 한신이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역사의 과정 속에서 선택한 모든 것이 다 옳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해서는 안되는 선택을 하기도 했고... 근시안적인 판단으로 선택한 것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오늘의 한신이 존재하게 된 그 과거의 역사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고... 그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오늘을 해석하고...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한신과 기장은...
    과거의 역사에 대해 부끄럽지 않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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