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5일 금요일

[범용기 제3권] (45) 北美留記 第一年(1974) - 참여의식

[범용기 제3권] (45) 北美留記 第一年(1974) - 참여의식


민주주의란 Participant Society니 만큼 나는 민주운동이란 이름의 모임에는 국내에서도 거의 빠짐없이 “참여”했다. 상대방의 “사이비적” 위장 때문에 속는 경우도 있지만 속는 줄 알면서 “참여”하는 것은 속지 않기 위해 “게토”되는 것보다 났다. 그것이 좌익의 의식적인 전략인 경우에는 어색하고 곤란한 경우도 당한다. 그러나 크게 본다면 모두가 “인간”으로 태어났지 “성분”의 화신으로 출생한 것은 아니겠다. 무슨 “주의자”란 것이 노예시대에 노적이 “노예”인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잉태되어 노예로 출생하던 것과 같을 수는 없다. “인간”을 인간으로 “인간답게” 대접하고 “인간사랑”으로 “이웃”이 된다면 남북의 근본문제는 해결되는 것이 아닐까? 그 다음에는 사무적인 절차만 남을 것이다. 이 사무적인 절차가 원칙적인 합의를 ‘무’에 돌릴 수는 없을 것인데, 지금까지의 남북회담이란 것은 원칙에 성실했다기보다는 사무적인 절충에 좌우되었다고 본다. 지금까지에도 원칙이 아주 없달 수는 없겠지만, 그것은 분단된 현실을 “원칙”으로한 자기 이익본위의 전략적 기정사실에 고정되어 있었다. 큰 테두리 안에 작은 테두리가 들어 갈 수는 없다. 통일문제는 분단 현실보다 두곱이나 크다. 와싱톤 민통이나, 학자회나 UM이나 “통일”문제를 의제로 다룰 경우에는 이 점을 맨 먼저 염두에 두고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무엇이 남과 북의 공통분모가 되는가? 남과 북의 민중이다. 민중은 남과 북을 합친 것보다 크다. 그런데 독재자는 자기가 민중보다 크다고 생각한다. 민중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생각하는가? 그들은 각 개인의 자유인임과 그들의 사회가 정의로움과 나라끼리 평화롭기를 원한다. 그리고 평화롭게 잘 살기를 원한다. 남과 북이 갈라져 살기를 원치 않는다. 갈라놓은 것은 권력주의자들이다. 그들도 “통일”을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내심은 자기 자신의 권력권 확장에 있다. 남과 북을 자기 빛깔 단색으로 칠하려는 “통일”이라 하겠다. 그것은 인간을 살리는 통일이 아니다. 인간의 시신을 한데 묶는 “통일”일 것이다. 다니엘이 본 환상에서와 같이 정금머리, 온 가슴과 팔, 놋 종아리, 그리고 철 발 하나, 진흙 발 하나의 우상, 버티고 선 두 발이 하나는 철이고, 하나는 흙이니 발이 맞지 않는다. 맞잖은 발이니 아무리 금 머리, 은 가슴, 동 종아리라도 진흙발이 허무러지는 순간 함게 사그러져 온 몸이 파편으로 딩굴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폭력으로 세계를 통일한 바벨론의 운명을 “우화”(alegory)로 표현한 구절이다(다니엘 2:31-33). 다니엘은 그것에 대체할 “인간”의 “이메지”를 예언했다. 인공적이 아닌 “산 돌이 날아온 우상을 치고 그 돌이 자라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더라……”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나라를 말한 것이다. 다니엘은 또 사자, 독수리, 곰, 표범 등으로 상징되는 강대국들이 세계를 나눠갖고 역사의 권력을 뺏고 뺏기고 하는 무대에 한 “인간과 같은 이”(One Like a Son of Man)가 나타나 “인간의 나라”를 하느님으로부터 받아, 영원한 왕국을 세우는 Vision도 말하고 있다. “Son of Man”, “人子”란 칭호는 후에 “메시야” 칭호로도 사용됐다. 예수는 이 칭호(人子)를 즐겨 자기의 칭호로 사용했던 것 같다. 이것은 “참 인간”이 참 하느님 아들이오. “참 메시야”라는 예수의 존엄한 인간관을 말한 것이 아닐까! 통일문제나 세계평화 문제에 있어서도 “인간존엄”을 앞세우고 “ism”이니, 국가이익이니 하는 따위 “우상”을 타파하는 것이 선결문제일 것이다. 크리스찬이든, 크리스찬 아닌 분들이든 다 같이 숙고할 기본과제라 하겠다.

나는 우선 “참여”하기 위하여 제8회 “재북미한인기독학자회”모임에 가기로 했다. 이것이 북미주에서의 나의 첫 “참여”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