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5일 금요일

[범용기 제3권] (44) 北美留記 第一年(1974) - 한국 민주화 운동의 연속선

[범용기 제3권] (44) 北美留記 第一年(1974) - 한국 민주화 운동의 연속선


나는 1969년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때부터 반독재 민주운동에 나섰다. “3선개헌”이란 말은 “독재선언”의 “속말”이다. 의복으로 말한다면 “3선개헌”은 “겉”이고 “독재”는 “안”이다.

물론 나도 반대다. 그러나 “성명”은 낸 일이 없으며 그럴 기회도 없었다.

나는 기독교인의 정치참여를 주장해 왔었으나 나 자신이 “정치”에 Involve된 일은 없었다. 8ㆍ15 해방의 소식을 듣자마자 “한 크리스찬의 건국이념”이란 팜프레트를 낸 일이 있었지만 그것은 정치인들에게 내 나름대로의 “나라 세우기” 이념을 참고재료로 제공하려는 의도였고 나 자신이 직접 그런 정치를 하겠다는 “시정연설”은 아니었다. 그런데 2term이 거의 끝나려는 무렵에 박정희는 자기가 다시 대통령으로 입후보하기 위하여 헌법을 고친다고 선포했다. 대통령 3선을 헌법으로 합법화라려는 억지 공사였다.

하루는 장준하와 송원영이 수유리 내 장막에 찾아왔다. 3선개헌 반대 운동에 나서 달라는 요청이었다. 나도 물론 3선개헌에는 반대였다. 그러나 공개운동을 일으킨 일은 없었다. 그들은 정치에 ‘숫처녀’ 같은 나에게 Propose를 감행한 셈이었다. 그래서 “교제”가 시작됐다.

김상돈, 이철승 등이 계주했다. 결국 “3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가 조직되고 내가 “위원장”이란 직책을 떠맡게 됐다. 내가 무슨 정치나 사회 집단의 “감투”에 야망이 있었다면 몰라도 진정으로 싫다는데 그렇게 됐다는 데는 일종의 “신의”가 움직이는 것이 아닐까 싶어지기도 했다. 왜냐하면 불의에의 항거가 그대로 “정의”의 증언이기 때문이다. “아니오” 할 것을 “아니오” 할 용기가 없다거나 “아니오” 할 것을 “예”로 번복하는 것은 가장 비윤리적인 “외식”이고 비굴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후부터 “한국민주화” 운동은 나의 본업같이 되었다. 때와 장소를 가릴 여가가 없었다. 아주 “생리화”했달까! 안하면 나 자신이 괴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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