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8일 목요일

[범용기 제3권] (147) 野花園餘祿(其一) - 통일의 염원은

[범용기 제3권] (147) 野花園餘祿(其一) - 통일의 염원은


7월 18일 저녁에 김병욱 장로가 만찬에 초청한다.

“뉴저지”의 강일남ㆍ김은옥이 주빈이고 나와 이남순이 덩달아 불리었다. 그들은 “선통일 후민주”의 주장자들이랄까, 우선 이북과 친해놓고 보자는 분들이다.

10:30PM까지 시국얘기다.

나는 생각한다. “선민주 후통일”이고 “선통일 후민주”고 간에 그건 우리 자신들의 머리 속에서 맴도는 “환각”에 불과하다.

가령 “남한”은 “선민주”편이라 하자. 그러나 지금의 군사독재체제가 그 기득권을 자진 포기하고 민주인사들에게 고스란히 정권을 봉환(奉還)하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들에게는 총과 칼과 가스와 탱크와 데모진압 특수장비가 있다. 거기에 미국이 뒷받침한다. 그러나 일반국민에게는 “넘버”(數)와 돌멩이와 도피전술 밖에 없다. 전투에서는 상대가 안 된다. 그러므로 남한의 민주화는 전도요원하다. “후통일”은 더욱 요원하다.

“선통일 후민주”는 이북의 주장이라고 하자. 그건 가능한가? 휴전선을 넘으려면 당장에 60만 국군과 맞붙어야 한다. 6.25 때와 다르다는 것을 계산에 넣어야 할 것이다.

국군의 배후에는 미군이 있다. 장비와 무기는 미국이 제공한다. “이북군”은 “국군”만이 아니라 “미군”과도 싸워야 한다. 승산이 있을 것인가. 거기다가 “반공”이라는 “이념” 주입이 인간의 정상사고력을 마취시켰다.

미국의 지상군은 철수한다고 한다. 그러나 군함과 군용기는 건재하다. 자기 사람들이 나온 다음의 한반도에는 미련이 없다. 함포사격이다. 군용기의 폭격이다. 살인에 선택이 없다. 죽는 것은 한국사람, 조선사람이다. 그러나 소련과 중공이 한국사람 때문에 싸울 생각은 없다고 본다.

미국도 소련이나 중공과 격돌할 생각은 없는 것 같다. 결국 우리만이 녹는다. 시들시들 마른다. 다시 말해서 “선통일”, “후통일”에서 “통일” 자체가 실현될 확률을 갖고 있지 않는 한, “先”이고 “後”고는 저절로 문제에서 탈락된다.

해외교포만이라도 통일을 위한 공동전선을 형성하자고 한다. “해외”라면 사실상 “자유진영”인데 개인자유가 강압되지 않는 한, 획일적인 공동선(線)은 算出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통일” 문제에서 전원 일치를 기대할 수는 없다. 결국 이북의 의식적인 교란 전술에 고용(雇用)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잃었던 내 나라는 도로 찾아야 하겠다.

Lost and not found여서는 안되겠고 그렇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세계사의 태풍계절을 기다려야 할 것일까?

7월 21일(수) - 5PM에 이목사, 차상달, 신자, 나 강일남, 김은옥 등이 University Studiun에 가서 Canada 대 North Korea Team 축구(싸커) 경기를 봤다.

North Korea Team이 3:1로 이겼다. 교포들이 많이 모였다. 교포는 예외없이 North Korea Team을 응원한다. 열렬한 응원이었다. 영사관에서는 직원이 총 동원인 모양인데 이북 지원열이 너무 앙양된데 두려움을 느꼈는지 돌아다니면서 “좀 조용하게 관람할 수는 없을까요?”하며 은근한 제동(制動)을 건다. 귀담아 듣는 사람이 없다.

“같은 민족인데 그럼 캐나다를 응원하란 말이오?”하고 반발하는 교포도 있었다 한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나는 민족의 피는 저절로 통한다고 생각한다.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속담은 존제 자체의 어쩔 수 없는 진실이다. 그리스도도 “우리 민족”의 피에 섞여 우리 혈관을 쉴새 없이 돌아야 한다.

7월 22일(목) - T.V.로 올림픽 경기 광경을 본다.

소련의 여자선수 김내리 양의 묘기(妙技)에 감탄했다. 금메달 둘이나 탔는데 그녀는 한국사람이었다.

우리 이민사회에서 민족의식이 “증발”한다고 걱정하는 이가 많다. 그러나 이런 국제경기 때를 보면 이론의 시비도 없다. 피가 피를 부르는 것이다. 혹시 잊었다가도 타민족과의 대결이 생기면 “일촉즉발”(一觸卽發)이다.

이스라엘 노무자를 학대하는 애굽인 공사감독을 “모세”가 현장에서 죽여 버렸다는 사건은 앞 뒤를 맞춰보고 한 행동에서가 아니었다. 이성 중심의 전략 문제가 아니라, 같은 핏줄로서의 “촉발”이었고 그 자신의 “존재” 문제였던 것이다.

이것은 국제경기장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6월 17일(목) - 경용은 기술자를 시켜 지붕을 슬레트로 했다. 경용은 금년에 “그라지”도 제 손으로 짓고 벽을 칠하고 했다. 治家에 깔끔하다.

6월 21일(월) 서울 종로서관 장하린 부인이 딸들 보려고 토론토에 와서 반가웠다.

7월 15일(목) - 김정준, 이장식, 박봉랑 등이 도루 한신에 들어갔단다. 기쁜 소식이다.

7월 20일(화) - 미스폽이 한국에로 떠났다. 공항에서 전송.

7월 23일(금) - 한국의 Fay Moon이 시아버지 문재린 목사님 뵈러 토론토에 왔다가 오늘 귀국했다. 공항까지 전송하고 왔다.

7월 29일(목) - 강원용 목사가 W.C.C.중앙위 모임에 가는 길에 토론토에 들렀다. Lord Symco Hotel에서 새벽 한시까지 그의 한국실정 보고와 분석을 들었다. 그는 7월 31일에 유럽으로 떠났다. “경동교회 30년사”를 갖다줘서 읽었다.

8월 2일(월) - 지영의 안내로 세계 최고의 단주탑(單柱塔)이라는 C.N. Tower에 올랐다. 지금까지 몇해동안 멀리서 보기만 했지 안에 들어간 일은 없었다.

8월 3일(화) - 오늘부터 교회캠핑장에서 3박 4일을 지냈다.

8월 10일(화) - 혜원이 Subscripe해 준 “Geographic Magazine” 9월호가 왔다. 이제부터 매달 올 것이란다.

8월 14일(화) - 노인회 주최로 Kingston의 천도(千島) 내해를 하루종일 누볐다. 처도 동행했다.

8월 28일(토) - 울릉도 이일선 목사가 내 사무실에 찾아왔다. 울릉도에서의 경험담을 오래 들었다.

1976년 8월 31일(화) - 동경 오재식 부인 “옥신”이 이목사집에서 유숙. 혜원 부부도 이목사 집에 “옥신”을 찾아 환담.

9월 1일(수) - “옥신”을 공항에서 전송했다.

1976년 9월 7일(화) - 하령이 국민학교 1학년에 입학했다. “하륜”도 같이 배움의 층계를 오른다.

9월 18일(토) - 이상철 목사가 서울로 떠났다. 이번 기장총회 게스트 스피커로 캐나다 연합교회를 대표하여 파송된 것이다. “장공”이 기장총회에 보내는 “메시지”도 갖고 갔다. 총회에서 낭독했고 회의록에도 기재했단다.

10월 4일(월) - 이상철 목사 한국방문에서 돌아왔다. 이목자 집에서 교회 간부들과 함께 귀국담을 들었다. KCIA는 따라다니기도 하고 강연을 녹음해 가기도 했지만 손 대지는 않았다.

장공에 대해서는 원로급에서는 해외활동을 계속하라 했고, 교회측에서는 귀국하기를 원하더라고 했다.

1976년 10월 6일(수) - 7:30PM에 연합교회 친교실에서 열린, 일본인 도미야마씨 주최의 “김지하의 밤” 모임에 참석했다.

10월 10일(일) - 감사주일. 이목사 집에서 저녁에 우리 네집 식구들이 다 모여 큼직한 “터키” 향연을 즐겼다.

10월 16일(토) - 은용ㆍ행강 집으로 갔다. 일터에서 자정에서야 돌아온 행강은 반주상을 갖춘다. 칵테일 한잔이 풍류랄까?

幸江一杯酒
獨酌心自文閑
(“幸江”을 강 이름으로 하고 하는 말이다.)

10월 18일(월) - Mildmay의 박하규 박사가 교회 목사관 Open House에 초청한다.

100마일을 2시간 달렸다. 예배 드리고 백인교회 목회에 대한 신학적 민족적 사명과 그 밖에 참고될 말들을 남기고 사택과 교회당을 구경하고 11PM에 돌아왔다.

역시 농촌은 유장(悠長)하고 “태평”한 것 같았다.

“우리 민족은 전 세계에 퍼져 발전해야 하는데 그 성공을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혼’의 바탕이 되고, 성령이 그 정신의 Dynamics가 되고 기독교 윤리가 그 생활규범이 되어야 하겠다. 그런 신념에 살면 우리의 민족정기(正氣)도 저절로 드높아지고 어느 민족, 어느 사회에서도 존경을 받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경제력도 정치권력도 군사력도 거의 ‘無’에 가깝다. 그러나 복음의 사자(使者), 교회의 목회자로서는 세계 어디에서나 활약할 수 있다. 세속적 특권은 오히려 방해가 된다. Mammonism의 함정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유혹하기 때문이다. ‘없는 자가 복이 있다’는 목회는 우리 민족의 천부적(天賦的)인 ‘직업’이다. ‘너희는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 의(義)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그 밖에 모든 생활 필수품은 하느님이 제공해 주신다’고 그리스도는 말씀했다.”

박하규 박사는 학문의 최고봉을 정복한 수재다. 그러나 시종 변두리의 작은 교회, 주저앉은 교회에서 고생하며 섬긴다. 그 교회구성원이 백인이든, 한인이든 별로 개의하지 않는다. 지금은 갈가리의 한국 이주민들 가운데서 교회를 창설하고 있다. “떠돌이” 동족에게 “생명의 샘터”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그는 대학이나 신학교의 교수직에 “적격자”로 List에 오른다. 그러나 하느님의 경륜은 사람의 지혜를 초월한다. 그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인간의 지식을 넘어선다. 장차 하느님이 그를 어떻게 또 어디에 쓰실지는 은총의 신비로 남는다.

“작은 일에 충성하면 큰 일을 맡긴다.” 우리는 다만 믿고 순종할 뿐이다.

10월 22일(금) - “하령” 생일이다.

무엇인가는 잊어버렸지만 어쨌든 선물은 사다 준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10월 23일(토) - 정대위 박사 생일이란다. 강태룡 장로 댁에서 생일 축하연이 있었다. 정대위 부부도 참석했다. 11PM시까지 옛 얘기, 지금의 얘기에 우정을 새롭게 한다. 호화로우면서 간결한 그의 성격이 “과불급”(過不及) 없는 중용의 길을 걷게 한다.

10월 25일(월) - 저녁에는 “통일교”(문선명 집단)의 신학적 대변자라는 “김영운” 여사의 통일교 원리강의가 토론토대학 강당 작은 옆방에서 열린다고 토론토 대학 교수들의 안내장이 왔다. 이 목사와 나는 거기로 갔다. 신학과 철학 방면의 교수들이 주최한 것이었다.

김영운은 관서 대학교 신과대학을 마치고 이화대학교수로 근무하다가 해방후 캐나다 선교부 장학생으로 뽑혀 Toronto대학교 대학원에서 신학을 연구하였다. 그는 미혼 독신의 30대 미녀였다. 유난스레 외로워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도 근본적인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예수를 미화하고 비인간화하여 중성(中性) 또는 무성(無性)의 존재로 만든데 대하여 반발하기도 했다. 뭔가 피부로 느끼고 몸으로 말하는 남성적 인간상을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됐다.

기독교 역사에는 그런 종류의 Deviation이 늘상 있어 왔고 결국에는 유사 기독교로 한 종파를 이루어 미로를 따라, 자기 배(腹)를 하느님으로 섬기는 자기 신화(神化)에 빠지는 일도 많았다.

김영운은 “신비”를 좋아했다. 자연신비주의를 동경하고 있었다. 동시에 기독교신학의 영향에서 완전히 탈출할 수도 없었다.

박태선, 문선명도 우수한 기업가였다. 그들은 자기 업체의 번영을 위하여 이 양수(兩手)치기가 필요했다. 말하자면 “기독교”라는 First name을 붙이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신비주의라는 막연하고 광막한 영역을 택했다.

김영운에게는 안성마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거기에 몰입했다. 그런데 오늘 저녁 김영운 여사의 통일교 교리해설은 뒤죽박죽이었다. 신학적 문제의 소재(所在)도 Clear하게 Present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통일교 교리해설에 사용된 용어도 신학용어에 대비(對比)하여 그 이(異)와 동(同)을 논리적으로 천명하지 못했다. 주의깊게 청강한 신학교수, 대학교수들은 그들의 질문에서 이론적인 차이와 정의(定義, Definition)의 이동(異同)을 예시(例示)하며 따진다.

동문서답(東問西答)이 아니면 “모르겠다”의 연발이다. 우리 한인들은 기대를 걸고 갔었다. 그러나 결론은 기대가 아니라, 실망과 모멸이었다.

종교는 한국 민족이 은총으로 받은 하늘의 선물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박장로교나 문선명교에서 그 하늘의 선물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강연회가 끝난 다음에 김영운과 인사했다. 옛 친구와의 만남은 인간적으로 기쁘고 반갑다. 그러나 동지적으로는 소격(疏隔)의 서운함이 있다.

10월 30일(토) - 서울 금호동의 외손자 민섭이 오늘 결혼한다고 한다. 멀리서 축복을 보낸다.

전우림 장로의 환갑잔치가 오늘 그의 맏아들 집에서 차려진다고 한다.

4:30PM에 이목사와 함께 그 댁에 가서 하연(賀宴)에 참여했다.

10월 21일(목) - 여류시인 김인숙 여사의 시집 “통일전야”에 서문을 썼다.

10월 22일(금) - 하령의 생일이다.

11월 8일(월) - 이상철 목사는 위통(胃痛)이 잦아서 입원 진단하기로 했다.

11월 9일(화) - 서동천 전도사 차로 나는 이영민과 함께 부탠포드 양로원에 스캇 박사를 예방했다. 91세지만 여전히 정정하다.

11월 17일(수) - 이목사를 병원에 방문했으나 확실한 진단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11월 20일(토) - 내 생일 날이란다. 나는 내 생일을 미리부터 기억하고 기다려 본 일이 거의 없다. 이번에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자녀들의 선물은 여전히 정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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